속리산 법주사 –관청의 정원에 흔히 심어 만세수로 불린 찰피나무
시경의 남산유대에 등장하는 찰피나무
속리산 법주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대웅보전 경내에서 자라는 찰피나무이다. 사찰의 경내 마당 공간은 행사를 위하여 식물의 도입을 꺼린다. 그럼에도 동선을 고려한 지극히 절제된 대칭 식재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인다. 『태종실록』에 ‘예조에서 의례 상정소 제조와 의논하여 악조(樂調)를 올리는’ 기사(태종2년, 1402.06.05.)를 보면 3개의 연회 음악에서 ‘남산유대’를 노래한다. ‘남산유대’의 노래 가사에 찰피나무가 등장한다. ‘남산유대’는 『시경(詩經)』 「소아 : 백화지집」에 수록된 시(詩)이다. 시경은 기원전부터 내려온 노래이다. 사서삼경의 삼경 중 하나이다.
‘남산유대’의 내용은 “南山有臺, 北山有萊. 南山有桑, 北山有陽. 南山有杞, 北山有李. 南山有栲, 北山有杻. 南山有枸, 北山有楰.”이다. 여기에 후렴구가 붙는다. 상대의 덕을 칭송하고 장수를 축원하는 기원의 노래이다. 시를 지을 당시 궁궐에 남산과 북산으로 조성된 정원이 있었다.남산에는 삿갓사초(臺), 뽕나무(桑), 호랑가시나무(杞), 털가죽나무(栲), 헛개나무(枸)를, 북산에는 흰명아주(萊), 중국황철나무(楊), 자두나무(李), 찰피나무(杻), 갈매나무(楰)를 식재하였음을 추론한다.
이처럼 『시경』에는 새와 짐승, 풀과 나무, 기물, 지명, 산수, 별자리, 어휘, 생활상이 등장한다. 식물 이름은 총 147개이며, 종류는 136개로 시와 식물이 서로 교감한다. 이 중에서 뉴(杻)는 정학유(丁學游, 1786~1855)의 『시명다식(詩名多識)』에는 감탕나무로 나온다. 대만 생물학자 반부준(潘富俊)의 『시경식물도감(詩經植物圖鑑)』에는 추(杻)로 읽으며〔杻, 椎也, 葉似杏而尖〕 학명은 찰피나무로 파악한다. ‘남산유대’에 나오는 식물을 정학유의 『시명다식』과 반부준의 『시경식물도감』으로 비교하여 정리한다. ‘남산유대’의 식물 10종류 중 뽕나무, 호랑가시나무, 헛개나무, 명아주, 자두나무의 5종의 식물 명칭이 일치한다.
찰피나무는 낙엽교목으로, 프랜츠 요제프 루프레히드 (Franz Josef Ruprecht, 1814-1870)와 카를 요한 막시모비치(Carl Johann Maximowicz, 1827–1891)가 명명하였다. 피나무를 의미하는 속명 틸리아와 만주 지방을 형용하는 종소명 만주리카(Tilia mandshurica)를 학명으로 사용한다. 반부준의 『시경식물도감』에서 『시경』에 나오는 찰피나무는 “예로부터 관청의 정원에 흔히 심었는데, 이름하여 ‘만세수(萬歲樹)’라 한다.〔古代官方的庭園常栽種之,名為「萬歲樹」〕”(반부준, 2014, 213.)고 기술하였다.
『시경』은 중국의 서주(西周)에서 춘추시대 중반까지 약 600년 간 여러 나라의 시 3천여 수 가운데 공자가 305편을 선별하여 묶은 시모음집이다. 주나라를 비롯한 화북지역의 여러 나라는 온대 몬순 기후로 여름에는 고온 다습하고 겨울에는 한랭 건조하다. 낙엽활엽수림과 침엽수림이 발달한다. “중국 경내에는 피나무속 식물이 약 25종 있는데, 『시경』 시대 화북지역에 분포한 이 속의 식물 중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는 몽골피나무(Tilia mongolia Maxim.), 중국피나무(T. chinensis Maxim.), 피나무(T. amurensis Rupr) 등이 있으며, 목재와 나무껍질의 특성이 서로 비슷해 모두 『시경』의 「추(杻)」일 가능성이 있다.”(반부준, 2014, 213.) 피나무류의 단아한 수형이 정원수로 좋은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찰 경내 식재로 살펴 본 찰피나무
속리산 법주사의 찰피나무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떨어진 열매가 마당 마사토에 흩어졌기에 손에 잡히는 대로 주웠다. 염주 만드는 것이라 하니 공력을 모아서 줍는다. 찰피나무의 열매는 포에 매달려 달린다. 그 기하학적이면서 우주과학적인 면모에 반한다. 열매가 낙과할 할 때는 포가 프로펠라 역할을 한다. 팽그르르 돌면서 작은 바람에도 고요하고 평온하게 지면으로 착지한다. 떨어질 때의 소박하면서 재기발랄한 기운에 미소가 절로 번진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마침내 지상으로 도달한 편안한 확신, 그것이 곧 평온이다. 속리산 법주사의 대칭 식재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금강문의 전나무(Abies holophylla Maxim.)와 원통보전의 산철쭉(Rhododendron yedoense Maxim. f. poukhanense (H.Lév.) Sugim. ex T.Yamaz.)이 있다. 사찰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조경이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로운 균형을 말끔하게 보여준다. 사찰 조경의 독특한 식재 규범을 제시한다.
사찰 조경은 불교와 관련 있는 콘텐츠의 식물을 식재 수종으로 배식한다. '한국전통조경학회지'의 불교 관련 식물을 연구한 내용을 보면, 계수나무, 대추나무, 파초, 느릅나무, 단풍나무, 동백나무, 벚나무, 살구나무, 잣나무, 향나무, 석산, 수련, 연꽃, 불두화, 수국, 배롱나무, 찰피나무, 치자나무 등이 식재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선희 등, 2016, 61.). 염주를 만드는데 이용한 찰피나무는 법주사를 포함하여 17개소에 식재되었다고 보고한다. 원주 천은사, 상주 남장사, 영주 부석사, 경주 불국사, 청도 운문사, 김천 직지사, 파주 보광사, 종로 조계사, 은평 진관사, 남양주 흥국사, 부안 내소사, 장성 백양사, 고창 선운사, 공주 갑사, 공주 마곡사, 보은 법주사, 예산 수덕사가 그곳이다.
찰피나무는 보리자나무(Tilia miqueliana Maxim.), 염주나무(Tilia mandshurica Rupr. & Maxim. var. megaphylla (Nakai) Liou & A.J.Li)와 외형상으로 비슷하다. 열매로 염주를 만들 수 있는 나무들이다. 단정하고 우아한 수형과 염주를 만들 수 있는 특성이 서로 비슷하여 이들 모두를 사찰에서는 ‘염주나무 또는 ’보리수나무‘’라고 부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 앞의 나무는 찰피나무에 비해 잎이 다소 좁고 열매가 납작한 구형이어서 보리자나무로 동정한다. 과거에는 찰피나무라고도 하였으나 찰피나무의 열매는 난형으로 5줄의 희미한 능각이 비교적 뚜렷한 편이다. 사찰에서 염주를 만들 수 있는 나무를 식재하는 것은 지금과 달리 자급과 자족의 ‘사찰 경제’에서 비롯한다. 의식주를 자체 해결하였다. 토목과 조경·건축을 비롯한 건설 관련 기술승이 존재하였다. 자체적인 품셈법으로 물량을 산출하고 자재 공급이 가능하도록 수급을 조치하였을 것이다. 경전에만 도가 있는 게 아니라 몸을 쓰는 기술에도 도가 있음을 퍼뜩 깨닫는 진심의 시대였다.
법주사의 주봉인 수정봉을 보듬는 속리산
한강 이남의 ‘주산 위의 주산’이랄 수 있는 종산(宗山)은 속리산이다. 종산인 속리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간룡(幹龍)인데, 두 날개를 편 채 작고 아담한 수정봉을 보듬는 형국이다. 수정봉 정상에서 사방을 두루 살피면 묘봉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장막을 형성한다. 속리산의 산봉우리가 거대한 파도처럼 울퉁불퉁 일렁이며 펼쳐치는 장막이다. 장막(帳幕)은 산세의 흐름이 병풍 펼친 듯 좌우로 겹겹이 가지를 친 모양새를 말한다. 학이 양 날개를 펼치듯 장막을 열었기에 개장(開帳)이 좋은 형세라 말한다. 개장이 좋으면 내룡(來龍)의 생기가 건강하다. 8개의 각 봉우리에서 뻗어 나온 간룡이 법주사를 품은 수정봉으로 조응한다. 수정봉은 법주사의 주산인 현무를 이룬다.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마치 법주사를 사방으로 감싸 안듯 정겹고 너그럽게 흐른다. 그래서 명당수이다. 명당수는 물길이 혈처를 감싸고 사방으로 둘러싸며 천천히 흘러 나가는 것을 일컫는다. 이내 물줄기는 한데 모여 수구처(水口處)를 이루는데, 법주사 경내를 감싸 흐르고 마애여래의상 앞내를 지나 수정암 입구의 석문 곁에서 잠시 머무른다.
법주사의 수구처는 속리산이 간직한 최고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훈훈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이곳은 속리산의 내맥이 다시금 기운을 되찾는 휴식의 공간이다. 수구 양쪽에 산이나 바위로 마주한 대문의 문설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을 한문(捍門)이라 한다. 화표(華表)는 수구의 물 가운데 우뚝 솟아 대개 한문 사이에 있는 기묘한 한 개의 바위이다. 화표는 물 흐름을 잠시 쉬어가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흐르는 물의 기운이 멈칫대며 천천히 흘러나가게 한다. 이는 마치 문을 잠그는 관쇄(關鎖)의 기능과도 같다. 이렇듯 법주사의 수구는 한문과 화표가 어우러져 명당의 기운을 보호하는 보국(保局)을 형성한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며 빚어내는 이 신비로움은 가히 빼어난 풍경이다. 법주사가 품은 깊은 의미를 한결 도드라지게 하는 평정의 공간이다. 그 속에서 휴식과 치유를 얻을 수 있다.
수정암 석문과 한문으로 들락대는 영혼과 쉼
법주사에서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곳은 어디인가. 수정암으로 들어가는 석문과 한문 사이에 자리한 공간이다. 속리산의 웅장한 기운은 법주사 경내에서 거의 소진한 후, 남은 편안한 기운이 수정암 석문을 거쳐 이윽고 부도지에 이르러 고요히 머무른다. 바람을 타고 흘러드는 영혼은 석문 아래 호젓한 냇가에서 평온을 찾는다. 많은 이들이 이 유현(幽玄)의 공간을 그냥 지나친다. 흐뭇하고 따사로운 햇살에서 한참을 머물 때 마음속 응어리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평안을 얻는다. 석문을 통과하는 순간, 번뇌는 사라지고 고요한 위안이 찾아온다. 부도지 앞마당은 소박하면서 평온한 할머니의 뜰처럼 정겹다. 아무 데서나 털썩 주저앉아 한참을 정신없이 놀게 한다.
뜰을 거닐며 소요한다. 마당 아래 한 단의 단차를 극복한 계단을 내려간다. 흐르는 잔잔한 물살과 모래톱에 돌탑들이 군락으로 어우러진다. 이 평화로운 공간을 찾은 이들이 남긴 발자취이다. 단양 사인암의 돌탑이 거칠고 험준한 산세를 떠올린다면, 법주사 한문의 돌탑은 잔잔한 호수에 띄운 나룻배이다. 천상을 노니는 궁중 음악처럼 법도가 있다. 고른 호흡이다. 숨소리조차 잦아든다. 명랑한 물소리가 물가로 들락대는 게 입체적이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수정암 냇가 풍광에 생동감을 더한다. 수정봉을 배경으로 펼쳐진 이곳은 자연이 건네는 위로와 평온을 만끽할 수 있는 성지이다. 세속의 시끄러움을 떨쳐내고 자연과 교감하며 본연의 자아를 발견한다. 법주사가 품은 가장 값진 선물이다. 석문과 한문 사이! 진부한 세태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고요하다. 쉼을 향한 영혼의 안식처이다. 법주사 수정암 냇가의 풍광을 시경으로 읽는다.
법주사 수정암 냇가
온형근
짙푸른 속리산 줄기 수정봉으로 모이고
법주사 감싸 안은 명당수와 배산임수
고요와 평정 깃든 물가 경관
은은한 물줄기에 스며드는 고요와 엄숙
흐르던 물은 세월의 무게 머금고 멈칫대며
물줄기의 폭과 깊이에 윤기를 더한다.
석문은 영혼을 정화하는 성스런 대문이다.
한문의 바위와 언덕은 생명의 기운 전한다.
생기 품은 산줄기로 장엄한 수정봉도
석문과 큰 바위 앞에선 고개 숙인다.
암괴는 물살의 간지럼에 살아 숨 쉬고
젖었다 마르면서 생성과 소멸을 일깨운다.
가끔 생채기 낼 때면
물고기도 깃들어 알아채고 위로하듯 곁을 맴돌아
좋은 기운 머무는 수구처에
수없이 쌓은 돌탑으로 모이는 사람의 숨결
-2024. 11.13.
속리산 법주사의 수정암 앞 냇가에 머물렀다. 한눈에 반하는 풍광이다. 명당의 속리산 법주사에서 유난히 그윽하게 숨겨진 장소이다. 짙푸른 속리산이야말로 속세를 벗어난 듯 고요했다. 법주사를 감싸 안은 명당수와 수정봉과의 배산임수가 이곳을 평온의 기운 깃드는 분위기에 들게 한다. 세월의 무게 머금은 물줄기로 경관의 깊이감을 더한다. 수정암 입구의 석문이 너무 좋아 몇 번이고 되돌아본다. 영혼과 생명력이 들락댄다. 커다란 바위덩어리인 암괴는 내를 건너 언덕과 함께 문설주를 이룬다. 암괴가 발을 딛고 있는 잔잔한 수면에서 물고기가 꼬리를 물고 움직인다. 기척을 알아채고 위로하듯 곁을 맴돈다. 자인의 순환과 생명의 교감이다. 냇가에 세워진 수많은 돌탑들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우주이다. 그 고요하고 거룩한 우주 앞에서 마음은 저절로 정화된다. 수정암 냇가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속리산 법주사가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