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으로 본 한국정원문화

해안의 빼어난 절경 품은 침수정 원림의 계류 풍류

021.영덕 침수정 원림

2025.09.17 | 조회 194 |
from.
茶敦온형근
월간 조경헤리티지의 프로필 이미지

월간 조경헤리티지

한국정원문화를 당대의 삶으로 벅차고 가슴 설레이며 살아 숨쉬게 하는 일

영덕 침수정 원림 - 해안의 빼어난 절경 품은 침수정 원림의 계류 풍류

 

낯선 날들이 억지를 부리고 심통으로 우긴다

 

중국은 후한 이후 삼국시대를 거쳐 진에 이르는 1백여 년 동안 편안하지 않았다. 정치적 불안정과 전쟁으로 세상이 혼란스럽다. 위진시대 이야기이다. 노장사상이 풍미하던 시대이다. 죽림칠현1)은 세상의 명예를 허무한 꿈으로 여긴다. 많은 사람이 정치와 세속의 번잡함을 벗어나 자연에서 수신한다. 제도에 얽매이지 않게끔 강호 원림에 은둔한다. 이 시절에 자연에서 은일하며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다[枕石漱流]라고 말하려다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로 베개를 삼다[漱石枕流]로 잘못 말한 손초(孫楚)가 있다. 손초의 친구인 왕제(王濟)가 잘못 말한 것을 지적한다. 자존심투성이 손초는 흐르는 물을 베개 삼음은 귀를 씻겠다는 것이고, 돌로 양치하는 것은 건치를 만들기 위함이라네라고 우긴다.2)침석수류라고 할 것을 수석침류라 잘못 말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굴복하지 않는 고집불통일수록 성격이 오만하다. 억지스럽다.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유산 – 명승 영덕 옥계 침수정 일원 (국가유산청 2022.12.23.)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유산 – 명승 영덕 옥계 침수정 일원 (국가유산청 2022.12.23.)

세상의 상식은 잘못이 발견되면 즉시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過則勿憚改]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허물이라 한다.”[過而不改 是謂過矣] 과이불개 시위과의는 공자의 말이다.3) 법을 어기는 위법만 범죄가 아니다. 법망 안에서 남을 속이거나 뻔히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는 건 사회 구조적 범죄이다. 이것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비상식적 자기기만의 태도를 학습하게끔 하는 사회 교육 기능에서 출발한다. 삶이 곧 교육이다. 듣고 묻는다는 청문회에서 수석침류라 한 말을 설명하느라 핑계투성이다. 사리분별이 명확한 것은 기억이 안난다’, ‘모른다로 초지일관이다. ‘수석침류의 궤변으로 거짓말을 급조한다. 드러난 죄는 다른 당파에 전가한다. 당쟁은 여전히 왕조시대를 떠올린다. 상대는 협력과 동반자 관계여야 한다. 그러나 상대방은 적이다. 나의 사상과 신념은 증발한다. 정당의 방침만 현수막으로 휘날린다. 이 단순한 구조를 어찌하랴. 낯뜨겁고 볼썽사나운 여름이다. 계류 풍류를 즐기던 원림을 찾았다. 영덕 침수정(枕嗽亭)이다. 빼어난 경관과 맑은 물의 절경에 자리한다. 그 웅장한 풍광에 놀란다. 내 안에 지각된 조용한 바닷가 해안을 떠올린다. 정자의 이름이 기막히다. ‘돌과 물을 명사로 삼아 삭제하고 눕고 양치한다는 두 개의 동사, ()과 수()만으로 정자명을 삼았다. 그러니 손초처럼 헷갈리지 않는다.

 

침수정에서 '눕고 씻으며' 노닐다 보면 가슴에 호쾌함이 차오른다. 참으로 특별한 감흥이다. 바다의 경관을 품은 계곡 속 전통 정원은 흔치 않은 모습이다. 손초가 말한 수석침류 혹은 침류수석의 개념은 역설적이게도, 후대 사람들에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이를 '세속을 떠나 자연을 벗 삼아 은거하며 내면의 수양을 쌓는' 원림 애호의 의미로 더 많이 해석하였다. 수석침류의 개념은 침수정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소에서 나타난다. 계곡의 암반 위에 자리 잡은 순천 초연정(超然亭) 원림의 침류대(枕流臺)’ 바위를 들 수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풍류의 장소라는 진술이다. 서계 박세당이 즐겨 찾던 수락동천에도 수옥정(漱玉亭)’이 승경 요소로 등장한다. 덕수궁의 서양식 전각인 중명전의 원래 이름이 수옥헌(漱玉軒)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여기서 수옥은 돌 대신 옥을 사용하여 양치한다는 것이니, ‘수석보다 더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이러한 명칭들은 은둔과 수행의 공간을 역설의 미학으로 한결 부각시키는 경관 용어로 사용된다. 이들은 수석침류를 침수, 침류, 수석, 수옥 등으로 조합하여 장소 이름의 앞부분인 전부지명소(前部地名素)4)로 사용하였다.

 

여름날, 침수정 원림의 풍경 스케치

 

한국정원문화에서 큰 축을 차지하는 행위가 바로 계류 풍류이다. 계류 풍류는 자연과 더불어 속세의 시끄러움을 잊고 평온의 정신 세계와 맞닥뜨리려는 인간 본성의 발현이다. 침수정 원림은 옥계계곡에 인접한 많은 경관 요소들로 옥계 37이라는 선경을 품는다. 영덕 침수정은 그 웅장함이 바다를 떠올릴 정도로 인상적이다. 함양 화림동의 계류에는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이 위치한다. 이들은 계류의 명징한 맑음을 보여준다. 덕유산 용추계곡의 심원정은 자연암반 위에서 두루 주변 경관을 아끼며 조화롭다. 문경 선유동 계류의 학천정은 산고수장(山高水長)의 지조를 상징하며, 합천의 홍류동 계류에 있는 농산정은 계곡 소나무 숲 암반에 우아하게 걸쳐져 있다. 이들 모두는 풍광이 빼어난 심산유곡의 계류에 원림을 경영하였다. 계류를 바라보면 하염없이 깊은 상념에 빠져든다. 침수정 원림은 지금까지 보았던 계류 누정과는 많이 다르다. 침수정을 둘러싼 경관 요소들은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풍광과 규모, 공간감과 장소성이 각각의 규칙으로 독립된 병치의 경관이다. 그러면서 하나의 통합된 침수정 원림 공간을 형성한다. 이제 우리는 이 아름다운 침수정 원림으로 들어간다.

 

이른 여름이다. 처음 방문하는 침수정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계류 원림으로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특히 여름철 물놀이 장소로 유명하다. 이미 사람들이 물에서 즐기며 들락댄다(2024.07.03.). 계곡을 즐기는 한국인의 지혜로운 심성에 그윽하게 빠져든다. 옥계계곡을 이루는 곳은 가천과 대서천이다. 가천의 옥계계곡은 팔각산 남동쪽, 대서천의 옥계계곡은 북동쪽이다. 가천은 청송군 주왕산면 라리에서 발원하여 내룡리와 항리를 거쳐 복동류하다 옥계리에서 대서천으로 흘러든다. 대서천은 포항시 죽장면 상옥리의 점안지에서 발원하여 북류하여 하옥계곡과 옥계계곡을 거느린 대서천을 이룬다. 이 두 곳의 줄기가 침수정 앞에서 만난다. 계곡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하천 유속이 빨라 사계절 맑은 물이 흐른다. 전국에 옥계라는 이름이 많지만 영덕의 옥계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찾고 즐기는 명소이다. 침수정 뒤로는 낙동정맥의 팔각산이 우람하다. 팔각산의 남동쪽 옥계계곡을 사이에 두고 바데산이 마주한다. 답사할 때마다 항상 새로운 감동을 느낀다. 한결같다. 오늘 아니면 다시는 못 본다는 심정으로 집중한다.

병풍암(대) - 침수정을 외풍으로부터 보호해준다.
병풍암(대) - 침수정을 외풍으로부터 보호해준다.

침수정으로 들어가는 문은 뒤쪽에 있다. 출입문은 잠겼다. 문의하여 열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나 수고로움을 끼쳐 드리는 게 도리가 아니라 약속을 잡지 않았다. 그러나 거대한 암반 위에 자리한 침수정에서 다양한 각도의 경관 시점을 살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병풍암 절벽 바위에 산수주인 손성을을 새겼다. 누정에는 편액과 중수기, 손성을의 시가 걸렸다.

침수정 현판과 원운시, 그리고 산수주인손성을 바위글씨
침수정 현판과 원운시, 그리고 산수주인손성을 바위글씨

침수정에 걸려 있는 손성을의 원운시로 침수정 원림의 경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신해년으로 기록되었으니 정조 15년인 1791년이다.

 

萬事吾身付一亭(만사오신부일정), 만사의 내 몸을 정자 하나에 맡기니
淸音擎碎入牕欞(청음경쇄입창령), 맑은 소리 들어 깨지며 창살로 들어온다.
龍愁春暮蟠歲窟(용수춘모반세굴), 용은 저문 봄이 서러워 동굴에 세월을 감고
鶴喜秋晴舞環屛(학희추청무환병), 학은 청명한 가을의 기쁨으로 병풍대에서 춤춘다.
老石三龜窺淺瀑(노석삼귀규천폭), 오래된 세 마리 돌 거북이 얕은 폭포를 들여다보고
閒雲八角捲疎扄(한운팔각권소상), 한가한 구름이 팔각산 문 귀를 감고 푼다.
平生浮坐煙霞積(평생부좌연하적), 평생 안개와 노을이 쌓여 떠앉아 있는 듯玉府眞緣夢幾醒(옥부진연몽기성), 선계의 참된 인연의 꿈을 몇 번이나 깨었는가.

손성을, 「침수정원운」, 침수정 현판시

 

세상만사 무거운 일을 뒤로 하고 침수정 정자에 온전히 나를 맡긴다. 정자 마루에 앉으면 청류 흐르는 소리에 세상 어떤 소리도 개입하지 않는다. 손성을의 옥계 37경의 장면이 시경으로 등장한다. 정자 왼편으로 물속에 잠겨 있는 용을 닮은 긴 암벽이 봄을 아쉬워한다. ‘복룡담(伏龍潭, 3)’이다. 엎드려 세월을 껴안는다. ‘병풍암주변으로 학이 날며 춤춘다. 세 마리 거북이는 삼귀담(三龜潭, 9)’을 엿본다. 고개 들으니 팔각봉(八角峰, 2)으로 구름이 들락댄다. 안개와 노을이 층적되어 내가 선계에 있는 듯 몇 번씩 꿈과 현실이 교차한다. 이 시는 침수정 원림의 원형 경관을 고스란히 적시한 시경이다. 지금도 이곳은 계절마다 꽃과 안개와 노을과 단풍과 설경으로 과히 신선의 공간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옥계 37경을 읊은 침수정의 주인 ‘손성을’

 

침수정의 주인은 손성을(孫星乙, 1724~1796)이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 검색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과거 시험 합격자 명단에도 없다. 그럼에도 침수정이라는 정자명이나 옥계 37경을 지은 시적 성취를 보면 벼슬에 나갈 생각보다 일찌감치 은일의 삶을 선택한 지식인이었음을 짐작한다. 손성을은 경종4년에 태어나 영조52, 정조20년을 통하여 72세를 살았다.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72년 동안 읽고 쓰고 사람을 만나면서 욕기풍무영귀(浴沂風舞詠歸)5)를 한 셈이다. “논어(論語)기수(沂水)에서 목욕을 하고(浴乎),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風乎)는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詠而歸)라고 하였다. 벼슬에 등돌리고 세속을 초월하여 사는 기상이다. 논어의 저 문장이 의무 교육 문학이라면 수석침류는 보다 심화된 품격의 세계 인식이다. 옥계 37경에 익숙한 용어가 여기저기 출현한다. 옥계 37경에 펼쳐진 시경을 살핀다.

 

자연에서 바람을 느끼며 노닐다가 시를 읊으며 노니는 풍류는 옥계 37의 풍호대(風乎臺, 34)와 영귀대(詠歸臺, 36)의 시경으로 표상된다. ‘풍호대는 침수정 앞 건너편 진주암(眞珠巖, 24)의 동쪽 산자락에 우뚝 솟은 암반이다. 선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상징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세속의 번잡함을 바람에 털어내고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인다. “봉황이 나는 듯한 기상의 절벽이 천길 아래로 내려왔다고 묘사하는 풍호대에서 어진 이를 만나는 상상을 한다.[想見曾賢] 높은 대를 흥취 있게 바라보는 즐거움[樂此高臺]을 만끽한다. 함안 무기연당(舞沂蓮塘)무기풍욕루와 유사하다. 한편, 침수정 바로 앞에 위치한 영귀대는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의미를 지닌 바위둔덕이다. 이리저리 서성이며 시경을 읊기에 적당한 너른 바위 마당인 이곳에서 사람들은 홀연히 풍광에 들면서자연의 흥취에 젖어든다. “내 안의 티끌이 없어지고 가슴이 호쾌해지는[浩浩胸中無累塵] 경험을 한다. 살아가는 앞길이 푸른 빛과 봄의 생명력으로 약동한다. 영귀대에서 서성이다 보면 끊임없이 흥얼대는 의경(意境)6)에 사로잡힌다. 영귀라는 개념이 사용된 한국정원문화는 또 있다. 영양 서석지 원림의 영귀제’, 문경 선유구곡의 영귀암’, 수승대 옆의 영귀정암각, 함양 거연정 방수천 아래의 영귀대암각, 함안 무기연당 기양서원 터의 영귀문’, 광주 만귀정의 만귀등이 이와같은 뜻으로 지어진 이름들이다.

 

이러한 계류 풍류의 정신은 옥계의 다른 경관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천연대(天淵臺, 4)는 자연의 깊이와 하늘의 넓이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병산서원의 광영지, 도산서원의 천연대, 그리고 도산잡영에 등장하는 천연대와 그 의미를 공유한다. 이들 모두 자연의 순수함과 깊이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세심대(洗心臺, 11)는 마음을 씻어내는 곳이라는 뜻으로, 함안 무기연당 외원인 유희정에 있는 '세심' 암각, 그리고 문경 선유구곡 4곡의 세심대와 그 의미를 함께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세속의 번뇌를 씻어내고 마음을 정화하는 경험을 한다. 탁영담(濯纓潭, 12)은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 『초사』어부사와 『맹자』이루상에 나온다.7) 도산서원의 탁영담, 선유구곡의 탁청대, 제천의 탁사정, 함안 무기연당의 탁영석, 그리고 도산구곡 5곡의 탁영담과 같은 맥락을 지닌다.

 

세속을 잊게 하는 자연의 쉼과 평온

 

침수정 원림은 지금까지 경험한 누정의 맥락을 탈각시키고 파편화시킨다. 파편화된 경관 요소들이 새로운 평면으로 이질적 종합을 시도한다. 침수정 앞에는 세상의 어떤 형상도 내 앞에서 소용없다는 듯 병풍암(屛風巖, 15)이라는 절벽이 가로막는다. 거대하여 이질적이다. 침수정과 병풍암 사이에서는 세속의 허튼 잡소리가 소용돌이치는 구정담(臼井潭, 18)의 물소리에 잠긴다. 아무 소리도 범접하지 못한다.

 

井臼形容一石宜(정구형용일석의), 우물과 절구의 모양이 하나의 암석에 어울리고
撞舂已罷更淸漪(당용이파갱청의), 찧고 빻는 일 이미 그쳐 더욱 맑은 물결이다.
渫而不食誰曾畏(설이불식수증외), 퍼내어도 먹지 않으니 누가 두려워하겠는가
所幸邑移爾莫移(소행읍이이막이), 다행히 고을은 옮겨가더라도 너는 옮기지 마라
.

손성을, 「18경_구정담(臼井潭)」, 『옥계 37경을 찾아서』, 영덕문화원

 

구정담은 침수정 정면 바로 밑에 움푹 파인 곳이다. 절구통같이 파였다. 구정담 위의 물줄기인 조연(槽淵, 16)에서 달려와 구정담을 때려 부수며 사방으로 물방울을 튀게 한다. 이것을 옥구슬과 옥가루가 날린다고 하였다. 침수정 정자 마루에 앉으면 구정담으로 내리치는 물줄기의 파란이 세심대 바위를 마른 날 없게 한다. 바람이 제대로 불면 정자까지 날라든다. 깊은 포트홀로 이루어진 구정담을 지나면 큰 가마솥을 닮았다 하여 부연이 이어진다. 구정담에서 찧고 빻은 옥가루를 모아 밥을 짓는다. 부연의 물고기를 반찬으로 삼는다. 옥골선풍(玉骨仙風)이 되는 방법이다. 내가 찾아간 그날도 낚시줄을 띄워 물고기를 잡는 사람이 있었다.

 

이곳 탁영담(12경), 부연(19경), 삼귀담(9경)은 계류 물놀이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여기서 침수정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구정담(18경)과 세심대 그리고 더 올라가면 조연이 이어진다. 구정담은 움푹 파여 절구통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위의 조연에서 물줄기가 이곳으로 때려 부수며 사방으로 물방을 튀게 한다.
이곳 탁영담(12경), 부연(19경), 삼귀담(9경)은 계류 물놀이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여기서 침수정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구정담(18경)과 세심대 그리고 더 올라가면 조연이 이어진다. 구정담은 움푹 파여 절구통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위의 조연에서 물줄기가 이곳으로 때려 부수며 사방으로 물방을 튀게 한다.

세심대는 굽이치며 부딪히는 물보라에 마른 적이 없다. 흐르는 물은 탁영담을 거쳐 부연(釜淵, 19)과 삼귀담으로 거침없다. 생동하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꼭 물고기가 되어야만 알 수 있겠는가. 침수정에서 구정담 위로 고개를 들면 촛대암(燭臺巖, 8)과 향로봉(香爐峯, 7)을 만난다. 어찌 시 한 수 읊지 않을 수 있는가.

 

開窓坐對博山峯(개창좌대박산봉), 창 열고 앉아 박산의 봉우리를 마주하니
煙紫暾紅瑞氣逢(연자돈홍서기봉), 자주빛 안개와 붉은 아침 햇살 상서로운 기운 만난다.
點雪消融那意味(점설소융나의미), 점점 녹아내리는 눈은 무슨 의미일까
工疎安得善形容(공소안득선형용), 서툰 솜씨로 어찌 아름다움 표현할 수 있을까

-손성을, 「7경_향로봉」,『영덕 옥계 37경을 찾아서』, 영덕문화원

 

향로봉은 침수정 앞 병풍암이 펼친 바위병풍 끝부분에 있다. 작은 산봉우리의 모양이 향을 살려 선객을 초대하는 향로와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박산은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과 같은 의미이다. 침수정에 앉아 새벽 안개로 아침 햇살이 비칠 때의 상서로움을 만난다. 해가 뜨면서 눈이 녹는다. 찰나의 풍광이다. 너무나 아름다워 어찌 표현할지를 재주가 미흡하다는 말로 대신한다. 향로봉은 촛대암 뒤편의 봉우리로 우뚝 솟았다. 경관 대상에 나를 앉힌다. 밤이면 탁영담에서 삼귀담으로 길게 달그림자 드리운다. 달빛이 반짝반짝하며 물에 길을 낸다. ‘달기둥이다. 더러 달밤에 안개가 끼는 달안개도 만난다. 그럴 때마다 조용히 엎드렸던 용이 꿈틀댄다. 침수정 왼쪽 아래 울퉁불퉁 길게 이어진 근육질 암벽이 복룡(伏龍)이다. 복룡을 둘러싼 배를 띄울만한 곳이 삼귀담이다. 복룡담이라고도 한다. 침수정 원림을 시경으로 남긴다.

 

옥계37경의 7경-향로봉
옥계37경의 7경-향로봉


바다를 머금은 침수정

온형근

 

 

 

고요 속에 잠긴 세월의 문은 굳게 닫히고
벼랑길 아래 폭포는 천년의 세월을 쏟아낸다.
기이한 암석 돋을새김 화석 위로
공룡의 꿈이 잠든 듯 태고의 그림자 드리웠다.

수천 년 바람에 닳은 바위는 신선의 꿈을 꾸고 있어
서툰 날갯짓은 허물 벗듯 세상의 짐 벗어던지고
고치처럼 남겨진 용의 등껍질은 미련의 껍데기

날개 꺾인 신선이라 나무라며 속삭이는 현실
억눌린 심화는 삭아들수록 더욱 깊어지는 상처
병풍처럼 둘러싼 암벽을 바라보며 침수정에 드리운 침묵

날 듯 튈 듯
옥계의 선경을 노래하던 옛 시들은 남아
찾는 이마다 두리번거리며 남긴 문장들이 있어
정자에 앉을 틈 없이 흔적 따라 눈길 머무는 옥계 여울

휘청 또는 미끄러질 듯 몇 번을 뒤척이며 여울을 적셨을까
사는 일이 화석일 듯 기다 누운 바위를 더위잡고
시퍼렇게 깊은 구정담 위로 하얗게 바랜 난간을 우러른다.

난간 마루에 기대니 추녀 아래 서까래가 설핏 보이는 듯
스쳐 가는 바람결에 옛 시인의 옷자락 스친다.
풍광 휘날릴 때마다 솟구치는 시상 담아낸다.

-2024.07.05.

 

고요 속에 잠든 세월의 무게는 굳게 닫힌 문처럼 육중하다. 벼랑 아래로 쏟아지는 폭포는 마치 천 년의 시간을 토해내는 듯 웅장하다. 기이한 형상의 바위에는 태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마치 잠든 공룡의 꿈을 보는 듯 신비롭다. 수천 년 바람에 마모된 바위는 마치 신선이 되어 세상의 짐을 벗어 던지려는 듯 간절한 꿈을 꾼다. 하지만 서투른 날갯짓은 미련이다.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벗어던진 용의 등껍질처럼 옛 시인의 문장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현실은 신선이 될 수 없다고 비웃는다. 날개 꺾인 신선은 침묵 속에 아무말 않는다. 사는 일에 실망하여 억눌린 상처는 시간이 흐를수록 쓸쓸하다. 병풍처럼 둘러싼 암벽은 그 고요함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

 

사는 게 참으로 실망할 일로 두루 흠뻑하다. 욕심이 너무 많은 시절이다. 욕심은 뭔가를 도모하는 마음이다. 하고자 하는 마음만 넘실댄다. 조금씩 양보하고 내려놓는 순간이 침수정에 드리운 침묵으로 다가선다. 움츠려 날고 싶은 복룡이 타협의 심상으로 읽힌다. 타협과 대의가 꽃 피고 열매 맺는 삶은 행복하다. 주저앉고 싶을 때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동력은 쉼에서 비롯한다. 침수정 원림은 쉼이면서 겸손의 생의를 북돋는다. 신선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신선의 삶을 부러워하는 것은 겸허함이다. 자연에서의 겸허함은 평온이다. 평온이 두루 침수정을 드리운다.

 


1)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진() 초의 혜강(嵇康)과 함께 놀던 완적(阮籍),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을 말한다.

2) 孫子荊 年少時欲隱 語王武子曰 當枕石漱流 誤曰 漱石枕流 王曰 流非可枕 石非可漱 孫曰 所以枕流 欲洗其耳 所以漱石 欲礪其齒 (유의경, 『세설신어』 「배조편)

3) 김도련, 위령공 29, 『주주금석 논어4』, 웅진지식하우스, 2015.

4) 전부지명소(前部地名素, front place name morpheme)는 합성어로 구성되는 지명 구축 용어의 앞부분에 위치하는 형태소이다. 위의 수석침류와 관련된 지명의 특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부지명소(後部地名素, back place name morpheme)는 정원 유산의 물리적 형태인 정(), (), () 등이 해당된다.

5) 『논어』선진편에 나오는 욕호기풍호무우영이귀(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에서 나왔다. 이 용어는 한국정원문화의 전부지명소로 수없이 조합되면서 변주된다. ()()()((()(()(()()()() 등의 후부지명소 앞에 놓이는 인문학적 배경으로 작용한다.

6) 의경(意境)’이란 정경(情景)이 융합되어 나타나는 원림 경관의 내적 충만이다. 보는 이의 주관 감정()과 객관 물경()이 합일되어 형성된 융합의 미의식이다. 경에서 정이 생겨나고, 정은 새로운 경을 창출하며 서로 상생한다. 원림은 보는 이의 미의식에 의해 끊임없이 재가공된다.

7)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초탈(超脫)하게 살아가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란 구절에서 출전한다


(온형근, 시인::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茶敦])

『월간::조경헤리티지』은 한국정원문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당대의 삶에서 향유할 수 있는 방안을 찾습니다. 다양한 접근 방법으로 짧은 단상과 긴 글을 포함하여 발행합니다.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설계 언어를 창발創發합니다. 진행하면서 더 나은 콘텐츠를 개발하고 생산하면서 주체적, 자주적, 독자적인 방향을 구축합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월간 조경헤리티지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다른 뉴스레터

© 2025 월간 조경헤리티지

한국정원문화를 당대의 삶으로 벅차고 가슴 설레이며 살아 숨쉬게 하는 일

뉴스레터 문의namuwa@gmail.com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