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는 만큼 누군가는 옆구리가 시리기도 하고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고독을 즐기기도 하실텐데요. 제 주변에서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유달리 자주 들려오는 요즈음입니다. 한 때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방송매체와 OTT를 온통 뒤덮었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다들 먹고살기 바빠 보이지만 사실 가슴 한 켠에는 짜릿하고 로맨틱한 사랑에 대한 동경과 강한 공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최근 제가 인상깊게 본 두 가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옵세션Obsession>
누군가를 아주 오랫동안 짝사랑하고 거절당할까 하는 두려움에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면, 상대로부터 집착에 가까운 갈망을 받아보고 싶어지는 동시에 내가 겪고있는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해주고 싶은 복수심이 들기도 합니다. 영화 '옵세션'은 그러한 왜곡된 욕망이 소원을 비는 행위를 통해 실현되고 그로 인해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을 겪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 죽을 때까지 오롯이 나만을 바라보는 집착에 가까운 형태의 사랑이 정말로 완전한 것일까요? 그리고 사랑의 이름을 한 상대방을 완전히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끝이 있기는 한 걸까요?
<사랑이나 꿈이나 점점점>
주인공 카이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꿈 하나로 도쿄로 와 스물 아홉살이 될 때까지 데뷔하지 못한 채로 아르바이트로 삶을 연명하고 있는 뼈 아픈 청춘입니다. 그러한 그녀에게도 한 줄기 빛같은 사랑이 찾아오는데요. 그 사람의 SNS까지 찾아내 삶을 훔쳐보던 주인공 카이는 그를 따라 오사카로 이주해 SNS를 통해 오프라인 만남까지 이어가게 됩니다. 얼핏 설레는 로맨스 영화같아 보이던 그녀의 사랑이지만 이윽코 동경해 마지 않던 그의 이면들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랑은 계속됩니다. 마치 포기하지 못했던 그림에 대한 꿈처럼요.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은 언제 친밀함을 향한 욕구가 되고, 상대를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변하는 걸까요?

저에게도 10년이 넘도록 꿈에 반복해서 나오는 첫사랑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은 순수한만큼 강렬했고, 서투른만큼 미숙했기에 평생 잊혀지지 못할 사랑으로 남아있습니다. 반면 이루어질 듯 했지만 결국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단념해야만 했던 실패한 사랑도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 두가지의 사랑에 대한 꿈을 나누겠습니다.
H와 나와 친언니가 외국에서 만난다. 바다 근처 같기도 하다.. 언제나와 같이 H를 만나는 설레는 맘을 주체하기 힘들다. 우리는 뭔가 다양한 활동들을 한다. 재밌게 놀기도 하고 내 친구들도 함께 있기도 하다. 뭔가 불안한 순간도 있다 그러나 난 H가 함께 하고 그냥 같이 있어서 너무 좋다. 우리는 주황색 텐트 안에서 놀았다. 텐트가 우리 몸에 맞춰 늘어난다. 또 유리 벽으로 된 콘크리트 인테리어의 힙한 가게 안에서 LP로 음악을 들으며 다 같이 어울렸다. -이 날은 평소보다 2시간이나 늦게 일어났지만 만족스럽고 뿌듯했다.
인스타 피드를 보다보니 A(C의 연인)가 헤어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난 당장 아일랜드로 달려간다. 전에 일하던 카페로 간다. 카페는 한창 붐빈다. 난 C를 찾는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우리는 단둘이 데이트를 한다. C는 평소처럼 여러가지를 설명해주고 말이 많은데 난 C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는지 모르겠다. 데이트를 마치고 C는 카페로 돌아간다. 미련이 많이 남는 얼굴이다. 나는 C를 좋아하는데 C가 나를 만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 나도 C를 만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남성적 심리 요소를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융에 의하면 여성은 사회적으로 혹은 속한 집단 내에서 정의되는 여성성을 살아가지만 무의식 속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남성적 에너지를 품고 있다고 합니다. 융은 이러한 내적 이미지가 외부의 남성에게 투사되어, 실제 인물 그 자체보다 그에게 부여한 의미와 이상에 더 강하게 끌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꿈에 등장한 남성이 반드시 아니무스를 상징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꿈속 인물을 내가 기억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주목해 볼 수는 있습니다. 제가 H를 논리적이고 다정한 사람으로, C를 친절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기억한다면, 그들의 실제 특성과 더불어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나 제가 바라는 모습도 그 이미지에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 H : 첫사랑, 명문대에서 이공계 계열 전공을하고 논리적이며 다정한 성격으로 작성자가 대학에 떨어졌을때 밤새도록 위로를 해주었다.
- C : 이뤄지지 못한 사랑, 무엇이든 잘 알고 친절하고 타인을 도울줄 사람이다.
그런데 꿈에 나온 사람들이 정말 그 사람 자체를 의미할까요? 사실 누구든 우리가 안다고 생각할 뿐이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저 그 사람을 경험하며 제 식대로의 해석을 붙였을 뿐일 겁니다. 그러니 '논리적이고 다정한'이나 '친절하고 타인을 도울줄 아는'같은 수식어는 그 사람의 특성도 분명히 들어있겠지만 제가 가진 결핍이나 그림자 속에 존재하는 발견되지 않은 남성적 에너지인 '아니무스'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실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특징에 가까운 사람을 찾아내 저의 환상에 맞춰 해석했을 테지요.
꿈의 디테일한 부분을 좀 더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 구분 | 첫 번째 꿈: H | 두 번째 꿈: C |
|---|---|---|
| 주요 감정 | 설렘, 행복, 만족감 | 미련, 망설임, 불확실함 |
| 주요 장면 | 주황색 텐트, 친구들과의 놀이, LP 음악 | 과거의 카페, 오랜만의 데이트 |
| 관계의 방식 | 함께 경험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 | 서로의 마음과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려 함 |
| 공간의 특징 | 몸에 맞춰 늘어나는 텐트, 함께 어울리는 공간 | 붐비는 카페, 과거의 일상과 연결된 공간 |
| 꿈의 결말 |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행복 | 미련은 남지만 재회를 원하는지는 불확실함 |
공간과 경계의 상징성
첫 번째 꿈의 '주황색 텐트'는 몸에 맞춰 늘어나는 유연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나와 외부 세계 사이의 심리적 경계가 안전하면서 탄력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리 벽과 콘크리트 인테리어, LP 음악이 흐르는 공간 역시 개인적인 예술적 취향이 적용된 긍정적인 안식처입니다. 반면, 두 번째 꿈의 배경인 아일랜드에서 일하던 카페는 '한창 붐비는' 상태입니다. 이는 과거의 바쁘고 치열했던 일상으로의 회귀를 뜻하며, 몸에 맞게 늘어나는 텐트의 편안함과는 대비되는 시공간입니다.
직관적 융합 vs 이성적 모호함
H와의 시간은 매우 직관적이고 감각적입니다. 불안한 순간이 닥쳐도 '그냥 같이 있어서 좋은' 무조건적인 수용을 경험합니다. 융 심리학적 관점에서 H는 긍정적으로 통합된 내면의 아니무스나, 최근 깊은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 자아의 한 측면이 투사된 대상일 수 있습니다. 반면 C와의 데이트는 이성이 지배합니다. C는 여러 가지를 '설명'하고 '말이 많지만', 정작 핵심적인 감정적 교류나 확신은 주지 못합니다. "내가 C를 진심으로 원하는지조차 모르겠다"는 이 양가감정은, 과거의 자아나 가치관이 현재의 나에게 더 이상 맞지 않음을 인지하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자극과 감정 사이
두 번째 꿈은 인스타그램 피드라는 외부의 단편적 자극에 의해 아일랜드로 급히 '달려가는' 자극에 대한 충동에서 시작됩니다. 내 결핍을 빠르게 충족하려는 무의식적 시도였으나, 결국 C는 미련을 안고 돌아가고 당신은 여전히 불확실성에 남겨집니다. 반면 첫 번째 꿈은 자연스러운 어울림 속에서 진행되며, 평소보다 2시간이나 늦게 일어났음에도 '만족스럽고 뿌듯한' 감정으로 마무리됩니다.
결론적으로,
두 꿈은 과거 인물에 대한 투사와 그리움을 넘어서 진정으로 원하는 '사랑의 형태'를 탐색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H와의 꿈에서 나는 사랑을 얻거나 관계를 확정하려 애쓰지 않고, 그저 모두와 함께 놀고 음악을 듣고 세계를 경험하는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반면 C와의 꿈에서는 과거의 관계를 내가 원하던 현실로 만들었을 때 내가 여전히 그 사람을 원하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이는 특정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 내가 원하는 관계의 형태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를 한 문장으로 짧게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단지 연애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세계를 경험하며 살아 있는 기쁨을 나누는 사랑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아마 이 꿈 분석 이후로도 저의 결핍을 채워주는 대상을 찾으려는 본능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 선택받지 못한 사랑이라는 '실패한 사랑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유일하게 배울 수 있는 것은 내가 욕망하는 관계와 사랑의 형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에게 선택받고 그 사람으로 상징되는 나의 결핍을 소유함으로써 완전해지는 느낌을 원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 상대와 내가 바라는 형태의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꿈을 통해 전달된 저의 마음은 적어도 저 자신에게만은 진실하리라 믿습니다.
<어젯밤 꿈속에 나는나는> - 한 여름밤의 꿈 시리즈는 여름의 작별과 함께 10월호를 마지막으로 잠시 휴식기에 들어갑니다. 다음으로는 꿈 상징에 대해 시각적으로 다뤄보는 영상 에세이와 매거진의 형태로 찾아뵙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메일링에 응해주시고 다양한 방법으로 응원을 전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혜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