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스터후드가 넘쳐나는

*이번 주도 조금 늦었습니다 헤헤.. 이번 주의 변명은 '이사' 이고요. 다음 주도 레터를 일요일에 보내드릴 것 같아요. 다음 주의 변명은 '출국' 입니다. 다다음 주에 '시차' 변명을 쓰지 않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늘 감사해요 구독자님. 💙

구독자님, <블랙 위도우> 보셨어요? 👀

개봉과 거의 동시에 수도권은 거리두기 4단계에 진입해서.. 아마도 아직 안 보신 분들도 많을 것 같아요. 저는 막연하게.. 굉장히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영화를 상영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잽싸게 사람이 제일 적을 것 같은 평일 애매한 오후 시간에.. 마스크와 손 소독제로 무장하고 영화를 봤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캡틴 마블>, <스파이더 맨: 파 프롬 홈>,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2019년에 개봉했더라고요? 게다가 <블랙 위도우>는 원래 작년 개봉이었다가 올해로 미뤄진 거니까 따지고 보면 아주 오랜만에 보는 건 아닌 셈이예요. 아마 유난히 '오랜만이다'라고 느낀 건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이미 '인피니티 사가',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아이언 맨,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 토르, 헐크, 호크 아이 등 '1세대'로 명명할만한 히어로들의 이야기가 막을 내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처음 MCU의 초기 영화들을 접했을 때, 이 영화들 뒤에 방대한 원작 코믹스가 있다고 해서 몇 작품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 출장 가서 잠깐 짬이 났을 때 굳이 서점을 찾아서 국내 정발되지 않은 책을 사기도 했고요..(아직도 다 안 읽음) 그런데 영화로 각색된 세계관보다 원작의 이야기가 훨씬 무겁고 우울해서, 저는 큰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MCU와 마블 코믹스에 대해 말을 얹기 시작했기 때문에.. 저는 그러면 또 흥미가 빠르게 식는 타입이라(?) 그냥 편안하게 영화만 즐겼던 것 같습니다.

MCU 초반에는 '블랙 위도우'가 유일한 여성 캐릭터였잖아요. 그래서 블랙 위도우는 마블 영화들이 여성 캐릭터를 창조하고 이야기 안에서 다루는 방식을 몸소 겪고, 때로는 주도해서 변화시켜 온 장본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블랙 위도우는 어벤져스 안에서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바깥 사정이 어려울 때는 나서서 변호하고 안 사정이 시끄러울 때는 중재에 나서는 사람이었죠. 와중에 본업도 잘 하고..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어렴풋이 느껴졌던 '장녀'의 향기가.. 좀 더 확실하게 느껴지네요. 개척하고 책임지고 그 와중에 보살펴야 하는.. 

그런 블랙 위도우의 솔로 무비가 드디어, (그녀가 엔겜에서 죽고 나서야 ㅂㄷㅂㄷ) 나오게 되었습니다!

<블랙 위도우>는 시간 상으로 시빌 워 직후부터 인피니티 워의 시작부분을 주로 다뤄요. 그리고 제대로 언급된 적이 없었던 나타샤 로마노프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잠깐 나옵니다. 여기에서 어린 시절 잠깐 (가짜)가족으로 함께 살았던 동생 옐리나, 어머니 멜리나(이자 레드룸의 부역자), 아버지(역을 맡은) 구소련의 슈퍼 솔져 레드 가디언도 등장하게 되죠. 

시빌 워 이후 종적을 감추고 노르웨이의 시골에 숨어 든 블랙 위도우가, 옐리나가 보낸 의문의 물건을 받으면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블랙 위도우가 옐리나와 함께 레드룸을 쳐 부시러 떠나는 여정을 다룹니다.

팟캐스트 <시스터후드>에서 황효진 님은 "블랙 위도우는 시스터후드가 초능력인 히어로"라고 이야기하셨는데, 이 말에 완전 동의합니다. 블랙 위도우와 옐리나는 시스터후드고 나발이고-를 외쳐야 하는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그것을 저버리지 않는 영웅들이고, 이들의 시스터후드는 거의 초능력에 가깝도록 강력한 힘을 가졌거든요.

어릴 적 레드룸에서 헤어진 후 십 여년이 훌쩍 지나 재회한 옐리나는 죽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레드룸의 킬러로 자라 있습니다. 살가운 동생은 아니고 언니의 히어로 포즈를 놀리고 만나자마자 한 푸닥거리(?)하면서 와장창 집을 부셔놓는 동생이에요. 사실 친자매도 아니고, 게다가 시빌 워 후 도주 중인 블랙 위도우의 입장에서 레드룸에 세뇌된 채 부역하고 있는 다른 동료들을 구하러 가자는 미션은 너무 위험하죠. 하지만 블랙 위도우는 결국 떠납니다. 이 결심에는 다층적인 '시스터후드'가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블랙 위도우 - 옐리나, 옐리나 - 레드룸 동료들, 블랙 위도우 - 레드룸 후배들(?) 등등.. 

이에 반해 빌런인 레드룸의 드레이코프는 가족이 없거나 가족을 없앤 어린 소녀들을 납치해서 킬러 '위도우'로 만들어 왔는데요, 그 과정에서 여자 아이들을 신체적으로 학대하고, 세뇌하고, 불임 수술 등의 폭력으로 제압합니다. 그는 (자기가 이긴 줄 알고 떠들 때)"세상에 넘쳐나는 자원이 '여자'"라고 말하는데요. 이 지점에서는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여자를 자원으로 활용해 온 하비 와인스틴, 로저 에일스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실제로 블랙 위도우의 각본가와 스칼렛 요한슨이 만나 줄거리를 생각해내기 시작한 시점에 와인스틴 사건과 #MeToo 운동을 많이 생각했다는 기사

영화의 정신에 대한 것 말고도, 재미도 저는 충분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중에 제일은 역시 플로렌스 퓨가 연기한 블랙 위도우의 동생(아닌 동생) 옐레나 벨로바예요!

블랙 위도우와 닮았지만 닮지 않은 모습, 여성 킬러로서 살아 온 정체성과 옐레나 특유의 시니컬하지만 진정성이 넘치는 성격.. 같은 것,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플로렌스 퓨가 합쳐져서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해요. 블랙 위도우의 처음이자 마지막 솔로 무비에 이렇게 매력적인 옐레나를 보여줘야 했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요.

<블랙 위도우>의 쿠키 영상은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호크 아이>에 등장할 옐레나가 어떤 모습일지를 예상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호크 아이>에는 호크 아이의 기술을 전수받는(?) 캐릭터를 헤일리 스타인펠트가 연기한다는데, 이 둘의 만남 또한 너무나 기대가 됩니당..!

그리고 플로렌스 퓨가 출연한 작품을 한 편이라도 보셨다면.. 그녀에게 강렬한 기운(?)을 느끼신 적이 분명 있을 거에요. 딱히 대단한 액션이 없어도 스크린에서 항상 존재감을 뿜어낸달까요. 좀 옛스러운 말로 하면.. '기백'이 느껴지지 않나요? 저는 <작은 아씨들>의 에이미, <미드소마>의 대니, <레이디 맥베스>의 캐서린에게서 다 엄청난 힘과 존재감을 느꼈어요.

그런데 1996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96년생 배우들 중에 이런 기백이 넘치는 배우들이 진짜 많더라고요. <왕좌의 게임>, <엑스맨> 시리즈의 소피 터너, <퀸스 갬빗>의 안야 테일러-조이, <유포리아>,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젠데이아, <피치 퍼펙트>,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드라마 <호크 아이> 시리즈에 출연 예정인 헤일리 스타인펠트,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의 엠마 맥키,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캐서린 랭포드도 96년생이더라고요. 정말 신기하고 흥미로워.. 

플로렌스 퓨의 옐리나 뿐 아니라, 앞으로의 플로렌스 퓨의 모든 작품들(제가 퇴사 후 보겠다던 영화 중 하나인 올리비아 와일드의 Don't Worry Darling에도 출연 예정이죠 호호), 그리고 플로렌스 퓨 뿐 아니라 기백과 능력이 넘치는 이 젊은 여성 배우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벌써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전에 한 동료가, 영상 콘텐츠에서는 잘 만들어진 캐릭터도 중요하지만 그걸 표현하는 배우의 힘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했었는데요. 이 배우들의 힘이 더 많은 여성 캐릭터들의 깊이와 다양성,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의 여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이런 미래는 스칼렛 요한슨과 그녀 시대의, 또 그 앞 시대의 여성 배우들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개척하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시스터후드였어. 

사실 저도 한 명의 시스터가 있어요. 지금 거실에서 제가 노트북을 덮고 나와서 자기랑 놀아주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데요. 그 시스터를 위해, 오늘의 레터는 여기서 접어보겠습니다. 👭

*다음 주에는 스웨덴 배우들이 스웨덴어로 연기하는, 스톡홀름 배경의 넷플릭스 드라마. 정주행을 끝낸 레어(=다소 유교걸)를 멘붕에 빠뜨린 문제작(?) <러브 앤 아나키>에 대해 적어보겠습니다.

인스타그램 @__ofcl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