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iling#12 | "내가 열심히 하면 내 이름이 멋있어 지는 거니까"

천용성의 심층 인터뷰 『겉핥기』 #3

2021.06.15 | 조회 1.92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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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링Oiling의 프로필 이미지

오일링Oiling

독립음악 프로덕션 오소리웍스의 아티스트들이 직접 만드는 인디팝 문예지, 오일링Oiling 입니다. 프로듀서 단편선과 아티스트 천용성, 전복들, 전유동, 후하, 보일, 소음발광, 선과영이 함께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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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의 말

🍔용성이는 제멋대로야

🐮용성이가 이번 호 인터뷰가 너무 길다고 했다. 편집중인 원고를 보여달라 했다. 4시간 동안 진행한 인터뷰의 녹취본만 A4로 서른 장이 넘었다. "아니 🐮용성, 이건 너무 길지 않아?" "맞아요." "🐮용성, 이번엔 두 편으로 나누어 내는 게 어떨까?" "한 번에 낼 거예요." 🐮용성은 정말 내 말은 하나도 안 듣는다.

그러고보니 이번 오일링에는 편집인의 말도 없다. 지난 플레이리스트 특집할 때도 편집인의 말이 없어서 "??? 편집인의 말은 어디 감???" 했더니 "이번에 원고가 개수로 거의 열 편인데 편집인의 말까지 쓰라는 말이냐?"라며 역정을 내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인터뷰가 이렇게 분량이 많은데 편집인의 말까지 쓰란 말이냐?"라며 역정을 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어보는 대신 발행인의 말을 써 여기에 남긴다. 🐮용성이는 제멋대로라고.

걱정이 된다. 과연 이 분량의 인터뷰를 읽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믿어보기로 한다. 세상에는 이렇게 길고 긴 인터뷰를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 생각해보면 그런 마음으로 오소리웍스를 운영하고 음악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싶다. 언젠가 우리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모두가 다 알지도, 인기 있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너를 정말 좋아하게 될 거야. 그 마음으로.

🍔단편선 발행인


천용성의 심층 인터뷰 『겉핥기』 #3

🐮 김소라, "내가 열심히 하면 내 이름이 멋있어 지는 거니까"

📸김소라는 한국의 가수, 디자이너, 사진작가다. 과거 '스마일즈', '플레이 걸’, ‘사이드 포니테일’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최근 PPS(Print Print Shop)란 활동명으로 《사진 동굴》을 발표했다. 황푸하의 〈우후〉, 《우리집》, 🐮천용성의 〈중학생〉 등에 사진 및 디자인으로 참여하였고, 현재는 🐮천용성 2집 《수몰》의 시각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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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라가 참여한 음원 및 음반들은 다음과 같다. 스마일즈 《Strawberry Tv Show》(2007), 플레이걸 《플레이걸의 24시》(2009), 〈Christmas Card〉(2010). 사이드 포니테일 《우리끼리 손난로》(2014), 《어쩌나》(2016), 〈여름옷〉(2017). PPS(Print Print Shop) 《사진 동굴》(2020), 몬구 〈눈물의 루비〉(2010), 굴소년단 〈참치(feat.플레이걸)〉(2010), 기린 〈히위고 나우〉(2011), 조길상 〈좋아해, 널 좋아해(feat.김소라)〉(2014)

PPS - 경주

소라 씨를 처음 본 것은 2019년, 1집 쇼케이스 때였다. 뒤풀이에서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눴고, 집에 가서 ‘플레이걸’을 찾아보았다. 그 후 우리는 몇 번 더 마주쳤고, 작은 작업을 함께 했다. 어느 날 소라 씨의 음악을 듣다 그런 생각을 했다. 의의, 의미, 그리고 재미에 비해 너무 빠르게 잊힌 것은 아닐까 하는. 이 인터뷰는, 그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기획되었다.

소라 씨의 긴 경력을 최대한 담아보고자 노력했다. 실제 대화 순서와는 다르게, 스마일즈부터 PPS까지의 행적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정리하였다. 책, 기사, 인터뷰 등 기존 자료들을 적극적으로 인용했다. 조금 주제넘지만 본 인터뷰가 소라 씨의 활동들을 상기·발굴하고, 활동과 활동 사이 빈틈을 채우고, 재조명하는데 작은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일시 : 2021. 6. 9(수) 15:00~19:00
장소 : 테일러 커피 서교점

인터뷰에 앞서 《수몰》 음반 커버 및 가사지, 『내역서』가 인쇄될 종이를 골랐다. 집에서 가져온 음반을 잔뜩 꺼냈다. 시옷과 바람, 애리, 예람, 오소영, 한동준, 키린지 등등. 왼손으론 가사지, 오른손으론 샘플북을 만지작거렸다.

🐮용성   이거는 아트지죠?
📸소라   네, 이거는 아트지
🐮용성   이거는, 두꺼운 아트지?
📸소라   네, 이것도 아트지
🐮용성   이거는 그럼, 랑데뷰? 시옷과 바람 좋은 종이에 했네.
📸소라   랑데뷰 맞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만져보면 질감이 조금 더.
🐮용성   우와, 엄청 잘 맞춘다. 눈 감고 맞춰봐요. 이거 뭐게요?
📸소라   음, 이거는.

선택을 마쳤다. 음반과 책의 표지, 포스터는 앙상블*. 음반과 책의 내지는 모조지로. 인터뷰를 마치고 근처 인쇄소에 들러 시험 인쇄를 해보기로 했다.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앙상블은 단종 되어서 결국 몽블랑으로 바꿨습니다.)

📸소라   (녹음기를 보며)좋은 게 있네요?
🐮용성   좋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소라   이거 녹음하면, 박제되는 거잖아요(웃음)
🐮용성   (웃음) 안 썼으면 하는 얘기는 ‘오프 더 레코드’라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소라   아, 진짜요?(웃음)
🐮용성   (웃음) 연애 얘기해도 됩니까?
📸소라   공식적으로? 사실 알 사람은 다 아는 얘기긴 한데(웃음)

1. 스마일즈

  5-6살 무렵부터 만들고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부모님이 커튼 레이스 공장을 운영하셔서 바느질이나 뜨개질, 십자수 같은 것들을 많이 접했고, 미술을 권유받아 그림을 시작했다. 그러나 고등학생 때 밴드부로 활동하면서 한동안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아졌다.

「[INTERVIEW] 데이터로 출력된 아버지의 존재, 프린트 숍 PPS 김소라

스마일즈는 2003년 진마와 정중엽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밴드다. 과거 영미 음악 및 음악가들의 스타일을 레퍼런스 삼아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롤리팝 오렌지’, '스트로베리 티브이 쇼'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고 2005년 '스마일즈'로 이름을 바꾸었다. 김소라는 2005년 11월 합류해서 활동 및 녹음을 마치고 2006년에 탈퇴하였다. 정규 1집 「Strawberry TV Show 」(2007)는 김소라의 탈퇴 후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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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   음악은 언제 처음 시작하셨어요?
📸소라   고등학교 때 밴드부를 하면서 시작했어요.
🐮용성   밴드부는 어떻게 들어가게 됐어요?
📸소라   중학교 때 모던록에 빠져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밴드가 하고 싶어졌어요. 그 당시에 EBS에서 ‘토드 솔론즈Todd Solondz’ 감독이 만든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Welcome To The Dollhouse〉(1995)를 봤는데 그 영화 O.S.T에 ‘벨 앤 세바스찬Belle and Sebastian’이 참여했어요. 그래서 벨 앤 세바스찬도 찾아서 듣고. 자우림도 엄청 좋아했었고. 근데 막상 고등학교에 갔더니 밴드부가 없는 거예요. 엄청 낙심하고 있었는데... 2학년 선배 중에 PC통신하면서 음악을 엄청 열심히 듣는 언니가 있었거든요? 그 언니가 밴드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오디션을 보고 밴드부에 들어가게 됐죠. 그때 오디션을 봤던 사람들은 재미있는 음악을 안 했어요. 그 때 노래 잘하는 애들은 소찬휘 같은 걸 불렀거든요. 저는 자우림이나 벨 앤 세바스찬을 좋아했으니까. 합격했죠.(웃음)

  어린 시절,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 2가지가 있었다. 내성적인 나는 ‘100M 달리기’랑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기’가 그렇게 싫었다. (...) 그런데 노래방을 밥 먹듯이 드나들다보니 결국에는 노래하는 게 너무 좋아졌다. 사람들 앞에서도 말이다. 

김소라. 2010. 『낭만, 듣다』. 북앤컴패니. 113p

📸소라   그때 제가 노래를 좀 잘했어요.
🐮용성   (웃음)
📸소라   (웃음) 그렇게 밴드를 하게 되었고, 되게 재미있었어요. 완전 음악에 빠져 가지고 “나, 미술 안 할거야!”하면서 미술학원도 그만두고. 근데 대학 진학할 때가 되니까 미술을 하면 더 좋은 학교에 갈 수 있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미술을 고2때인가 다시 시작했어요. (웃음)

  ‘뮬’이라는 사이트에 올라온 한 밴드의 멤버 구인광고를 보았고, 거기에 올려 진 데모음원을 들었다. (...) 나는 줄 창 탬버린만 흔들게 된다 해도 무조건 이 팀을 하고 싶었다.

김소라. 2010. 『낭만, 듣다』. 북앤컴패니. 23p

🐮용성   스마일즈는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소라   대학교 들어가면 꼭 밴드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차에 ''에서 코러스를 구한다는 공고를 봤어요. 비트볼에 소속된 팀이고 녹음을 하고 있다고. 데모를 들었는데 음악이 너무 좋았어요. 딱 비트볼 스타일. 당시에 비트볼에서 나왔던 리이슈 음반들을 많이 들었어요. 카메라 옵스큐라, 마마기타 등등. 비트볼에서 나온 음악을 좋아했으니까 “오라고 하면 무조건 가야지” 하고 오디션을 봤는데 진짜 오라고 해서. 근데 들어가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용성   어떤 고생들을.
📸소라   노래를 못해서 많이 혼났어요. 저 빼고는 대부분 전공자들이었으니까. 음이 틀려서 혼나는데 도대체 어디가 틀린 건지 잘 모르겠는 거예요. 근데 자꾸 틀렸대요. 다시 하래요. 뭐가 틀렸는지 모르니까 다시 해도 똑같잖아요. 계속 다시 하는데 눈물이 막 나고. 나는 진짜 모르겠는데. 근데 모르겠다고 말해도 이해를 못 하니까. 사실 저를 뽑을 때도 멤버들이 만장일치로 뽑았던 게 아니었거든요. 저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도 있고. 시작부터 같이 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 것들이 쌓여서 나가게 됐죠. 믿고 있던 사람들한테도 지지를 받지 못했고.
🐮용성   어쩐지 이상했던 게, 스마일즈 앨범 커버를 보면 분명 소라 씨가 있는데, 이후에 활동하면서 한 인터뷰를 보면 소라 씨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이상했어요. 스마일즈 탈퇴 때는 그만둔다고 선언을 했던 거예요?
📸소라   되게 자연스러웠어요. 그만둔다고 하니까, 아무도 반응 안 하고. 자연스럽게.
🐮용성   사장님*도 안 잡고? (*비트볼 레코드의 이봉수 대표)
📸소라   누가 잡겠어요. 걸림돌인데(웃음) 사장님은 저를 질질 짜는 꼬맹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노래도 못하고 질질 짜고. 사장님은 제 인상이 어둡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플레이걸 할 때 그런 얘기도 했었거든요. “너는 웃지 마.”
🐮용성   왜? 
📸소라   냉미녀 컨셉으로 가라고. 근데 제가 그 얘기 듣고 밤마다 웃는 거 연습했잖아요. "웃지 말라고 하니까 웃어야지" 하고. (웃음)
🐮용성   스마일즈는 소라 씨 나가고 얼마 가지 않아서 활동을 중단했는데.
📸소라   노래 부르던 언니 한 명이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거예요. 스마일즈에서 굉장히 큰 존재감을 가진 언니였는데. 그런 것도 있었고. 아무래도 20대 초반의 남녀들이 있었으니까, 팀 내에서 이런저런 관계들이 있었는데. 그런 관계들이 계속 지속될 수는 없으니까. 그런 것도 영향을 끼쳤던 걸로 알고 있어요.

  사실 밴드를 하는 동안은 순탄치는 않았다.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22살 꼬맹이에게 소프트록은 너무 어려웠다. 당시 나는 ‘화음’에 대한 개념이 전무했고, 너무 깊은 물에서 ‘허우적’거렸다.

김소라. 2010. 『낭만, 듣다』. 북앤컴패니. 55p

2. 플레이걸

플레이걸은 2009년 《플레이걸의 24시》를 발매하며 활동을 시작하였다. 소라, 은별, 단비로 구성된 3인조 그룹. 고등학교 동창인 은별은 소라의 소개로, 단비는 비트볼 레코드 직원의 소개로 참여하였다. ‘플레이걸’이라는 팀명은 동명의 일본 드라마 ‘Play Girlプレイガール’에서 따왔다.

플레이걸의 음악은 ‘플레이보이즈’라는 프로듀싱 팀이 전담했다. 플레이보이즈는 스마일즈에서 활동하던 진마와 일본에서 온 음악가 보브로 구성되어 있었다. ‘플레이걸’ 등의 이름과 설정, 아이디어는 일본문화에 익숙한 보브가 제공하였다.

플레이걸 - 은밀한 버스

* 플레이걸의 주요 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다. CONVERSE의 아시아캠페인 [LOVE NOISE] 촬영, 지산 밸리락 페스티벌 세컨 스테이지 게스트 출연, 캐리비언 베이 인디락 파티, 인천 도시 축전 참여, 문샤이너스(The Moonshiners) 단독 콘서트 게스트, Grand Mint Festival 참여 및 Miss. Blossom House 위촉,  KT&G 상상마당 <시네마 라디오쇼> 출연, 이한철 연말 공연 게스트, 유희열의 스케치북·유희열의 라디오천국·서경석의 뮤직쑈·스윗소로우의 텐텐클럽· 박현준의 라디오 가가·민트 라디오 등 출연, VOGUE·Marie Clare·10Asia·8Volume 등 인터뷰.

🐮용성   플레이걸은 어떻게 결성하게 되었어요?
📸소라   스마일즈 활동할 때, 여자 셋이 처음에는 뒤쪽에 있었거든요. 근데 점점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여자 셋이 노래 하는 게 스마일즈의 시그니처 같은 게 되고. 그런 것들에 착안하여 기획한 게 플레이걸이었어요. 처음에는 셋(진마, 보브, 소라)이 작업실에 모여서 논의를 하고 컨셉을 만들고 했었어요. 처음에는 일본의 여성 듀오 ‘핑크레이디ピンクレディー’ 비슷한 팀을 만들자는 의견이 있었어요. 핑크레이디는 춤도 되게 격하고 되게 어른 느낌이 나는 그런 거라 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자꾸 그걸 하자고 해서 좀 투닥거렸었죠. 그때 제가 좋아했던 건 ‘아사오카 메구미麻丘めぐみ’라고, 조금 다른 컨셉, 굳이 얘기하면 강수지나 하수빈, 이런 쪽이었거든요. 셋이 하더라도 그런 느낌으로 하고 싶었어요.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멤버를 뽑아보니 핑크레이디 쪽은 아니어서 (웃음) 좀 더 귀여운 이미지의 ‘캔디스キャンディーズ’ 느낌으로 방향을 돌렸어요.

  사실 나는 동시대 아이돌인 아사오카 메구미 언니에게 흠뻑 빠져있었기 때문에 캔디스는 안중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플레이걸의 프로듀서인 진마와 보브가 나를 앉혀놓고는, 캔디스의 《Toshishita No Otokonoko》를 ‘Play’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거, 재밌겠는데?”

김소라. 2010. 『낭만, 듣다』. 북앤컴패니. 91p
キャンディ―ズ - 年下の男の子

🐮용성   소라 씨는 플레이걸 시작부터 함께 한 거였죠?
📸소라   네. 그렇지만 사장님은 저를 메인으로 쓸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사장님은 처음에 ‘있으면 좋은 정도의 느낌’으로 절 생각했을 거예요. 사장님이 그런 얘기도 한 적 있는데, “네, 역할은 원더걸스 소희 아니면 핑클 이효리 같은 거야” 이렇게. 완전히 센터는 아니고 옆에 있지만 눈길이 가는. 사장님은 제가 컨셉 잡고 기획하는 것을 잘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플레이걸에서도 무대 아래서는 기획 하고 컨셉 잡고, 무대 위에서는 서브를 담당하는 정도의 역할을 원했던 것 같아요. 한번은 그런 말도 한 적 있어요. 플레이걸 2기를 만들어서, 멤버들은 어린 친구들로 전부 새로 뽑고, 저는 그 친구들을 디렉팅을 하는 식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용성   플레이걸은 설정도 있고 굉장히 재미있는 컨셉으로 활동했었어요. 근데 그 설정이 막 충돌하더라구요(웃음)
📸소라   빠른 년생이라고 하는데 9월 생이고. (웃음) 저희는 첫째, 둘째, 셋째도 나눴어요. 실제로는 나이 다 똑같고, 심지어 단비랑 은별이는 생일도 똑같은데. 나이도 깎았어요. 저랑 단비는 두 살, 은별이는 한 살. 주변에서 86, 87들이 프로필 나이를 실제 나이로 착각해서 말 놓기도 하고.
🐮용성   둘이 학교 동창이라고 하는데 한 명은 나이가 어리고.
📸소라   실제 생년월일이랑 첫째, 둘째, 셋째도 안 맞아요. 실제 생일은 제가 제일 빠른데, 첫째는 단비예요.(웃음)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더라고요. 유희열 씨가 예전에 라디오에서 저희 보고 스물여섯은 되어보이는데, 사기치는 거 아니냐고 그랬거든요. 저희가 두 살을 깎았잖아요? 근데 또 만 나이를 쓰겠다고 한 살을 더 깎았어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스물넷이었는데 스물하나가 된 거예요.(웃음) 근데 대놓고 하는 것도 컨셉이었어서. 취미 이런 것도 다 정해져 있었고. 저희가 서경석 씨 라디오를 나갔었거든요? 근데 서경석씨가 불문과를 나오셨어요. 그 분이 저희 프로필이 진짜인 줄 알고 기대를 하고 온 거예요. 단비 취미가 불어공부,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근데 단비는 실제론 불어 하나도 모르거든요. 그때 서경석 씨 실망한 표정, 김샌 느낌이 아직도 생각나요(웃음). 그때 설정하기론, 제 취미는 꽂꽂이였어요.

  “죄송합니다. 저는 1985년생입니다. 지난 날 저를 87년 생으로 알았던 플레이걸 팬 여러분께는 정말로 죄송합니다. 플레이걸은 나이도, 취미도, 성격도 전부 컨셉이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김소라. 2010. 『낭만, 듣다』. 북앤컴패니. 64p.

🐮용성   방송 출연도 많이 한 것 같아요.
📸소라   스윗소로우 라디오에도 나갔었어요. 근데 그때 컨셉이 게스트가 호스트가 되는 컨셉이었거든요? 근데 그걸 모르고 가서 가만히 있기만 했어요. 라이브 못 하니까 욕도 엄청 먹고. 서경석 씨 라디오에서도 라이브를 제대로 못 했고. 그래서 그때도 아마 반응이 안 좋았을 거예요. 저희가 유희열 나가기 전까지 욕을 진짜 많이 먹었거든요.
🐮용성   누가 그렇게 욕을.
📸소라   단편선도 욕했어요. 자기 블로그에다.
🐮용성   (웃음)
📸소라   단편선 모를 때인데, 검색하다가 단편선 블로그가 나온 거예요. 쌍욕을 하고 이런 건 아니고, 컨셉이나 이런 게 재밌고, 없었던 거니까 되게 호의적으로 생각한다. 근데 노래를 너무 못한다. 이거는 내 동생이 해도 낫겠다, 이런 식으로.
🐮용성   (웃음)
📸소라   프로듀서들이 노래에 바이브레이션을 못 넣게 했어요. 동요처럼 부르라고. 근데 동요처럼 부르는 게 사실 노래를 더 잘해야 좋게 들리는 건데, 노래 못 하는 사람들한테 그렇게 시키니까. 제가 스마일즈 때도 노래 못한다고 혼났는데, 그게 계속 스트레스였어요.
🐮용성   저도 그 맘 압니다.
📸소라   제가 나중에, 인형 메이크업 하는 일을 하는데, 동료가 단편선 지인인 거예요. 그 분이 “저 단편선이랑 알아요” 그랬는데 저는 “어? 단편선이 저 욕했는데요” 이러고. (웃음) 나중에 홍대 아이유 이런 거 하고 다닐 때도 계속 그런 생각 했죠. “저 사람, 날 욕한 사람.” 

나는 그들의 '점차 성장해나가는 아이돌'이라는 컨셉이 실은 아주 현실적인 조건에 의거한 타협이지 않을까, 를 우려한다. 일종의 면죄부인 것이다. 물론 아직 라이브를 실제로 보지 못한 입장에서 단정하기는 어렵다만, 플레이걸의 그것이 아이돌의 '아우라'에 아직은 절대 미치지 못하다는 것은 아마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단편선. 「플레이걸 〈은밀한 버스〉」

🐮용성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어땠어요?
📸소라   벅스 같은데 댓글 보면 분위기가 되게 안 좋았거든요. 근데 방송 나간 후부터 좋아져요. “유희열이 좋아하는 거면 뭔가 있을 거다”라는 심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전까지는 플레이걸을 좋아하는 게 금기시 된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런 말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씨디를 샀는데 엄마가 보면 안 돼서 숨겨 놓았다.” “지하 창고에 넣었다.” 이런 게 되게 많았는데. 근데 저희가 방송을 탄 이후에, 저희를 좋아하는 거를 밝힐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좋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스케치북 나가고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했었어요. 근데 그때는 그게 일생의 기회일 거라는 생각을 못 했었어요. 원래는 방송국에서 노래 두 곡을 요청했어요. 근데 사장님이 “우리 애들이 준비가 안 됐다” 이러면서 거절하셨어요. (웃음) 사장님은 노래 못 한다고 저희들 욕먹을까 봐 걱정했던 것 같아요. 근데 유희열 씨가 한 곡이라도 해 달라고 요청하셔서.
🐮용성   진짜 적극적이었네요.
📸소라   네, 적극적이셨어요. 되게 고마운 거죠, 사실. 그리고 제가 스마일즈를 그만 둔 이후라 확실히 기억은 안 나는데, 스마일즈가 안테나 뮤직에서 하는 공연에 오프닝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전부터 관심을 갖고 계셨던 거죠.
🐮용성   스케치북 나갔던 게 언제예요?
📸소라   2009년일 거예요.
🐮용성   그럼 음반 내고 방송 나가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던 거죠?
📸소라   네, 거의 바로였어요.
🐮용성   그 때는 밴드랑 같이 다녔어요? 아니면 MR
📸소라   MR, 밴드랑 같이 다닐 돈이 없었어요. (웃음) 근데 그때 저희가 순진해서 노래를 깔지 않고.
🐮용성   노래를 싹 뺐구나.
📸소라   네, 그래서 더 욕먹었어요. 노래 좀 깔면 훨씬 나았을 텐데, 바보 같이. 노래 못한다고 욕만 먹고 위축되고. 저희가 루비살롱에서도 공연했었거든요? 그때 같이 했던 밴드 중에서는 저희 대놓고 무시하는 팀도 있었어요. 사진 촬영 할 때 옆에 서기도 싫다고 하고. 거의 쓰레기 취급하고. 그런 것 때문에 되게 의기소침해지고. 그리고 그런 인상이 되게 강했어요. “생각없는 애들.” 예쁘지도 않은 게 예쁜 척만 한다는 취급도 많이 받고.
🐮용성   컨셉이란 걸 이해를 해야 하는데.
📸소라   5년 뒤에 나왔으면 더 나았을 거라 생각해요. 컨셉으로 하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사람들이 부캐니 뭐니 하면서 컨셉을 즐기는데, 그때는 그게 이질적이고, 진정성 없어 보이고 그랬던 것 같아요. 거부반응이 좀 컸어요. 거부반응이 있어서 오히려 이목을 끌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근데 그때는, 어릴 때니까, 그런 생각까지는 못하고 그냥, 위축되었던 것 같아요. 저는 앨범 나오기 전부터 그 생각은 했거든요. “이건 무조건 욕먹는다.” 그래서 욕 먹는 것 자체는 크게 신경 안 쓰였는데, 자꾸 노래를 못한다고 하니까 신경쓰이고 부담이 됐죠.
🐮용성   그 마음은 제가 잘 알죠. (웃음)
📸소라   스마일즈 할 때 노래 못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으니까, 예민했거든요. 노이로제 걸릴 만큼. 근데 사실 신경 쓸수록 더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더 고생하고.
🐮용성   저는 노래 못해도 사람들이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더라고요. 근데, 누가 뭐라고 딱히 안 해도 뭔가 신경 쓰여. 그리고 아무도 기대를 하지 않는 것도 뭔가 비참하잖아요. (웃음)
📸소라   근데 잘 불러도 거슬리는 게 있고 못 불러도 거슬리지 않는 게 있는데, 거슬리지 않는 쪽이라서. (웃음)

출처 : 비트볼 뮤직 블로그 You Are BEATBALLIZED!!!
출처 : 비트볼 뮤직 블로그 You Are BEATBALLIZED!!!

🐮용성   유명해지고 겪은 고충 같은 것은 어떤 게 있었어요? 여성 음악가들 같은 경우는 성희롱 같은 것에도 많이 노출되어 있고. 플레이걸은 컨셉 상 그런 것에 더 취약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소라   예전에 플레이걸 활동할 때, 네이버 카페에 ‘플레이걸’을 치면 저희 가슴을 평가 한 글이 나왔어요. 저희 앨범 커버를 보고. 근데 그게 그런 평가를 할 여지가 없는 사진이거든요. 그래서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차라리 웃기다고 해야 하나, 어이없다고 해야 하나. 성희롱보다는 그런 게 많았어요. “얘네 뭔데 이러냐?” 저희 스케치북 나갔을 때 문샤이너스랑 같이 나갔거든요. 그랬더니 “왜 문샤이너스에 이런 애들 껴서 나오냐.” 그런 글도 올라오고. 나는 이 셋 중에 누가 좋다, 누가 내 타입이다, 그런 거는 많았고.

플레이걸 - 얘얘

🐮용성   (웃음) 화제가 되고, 방송도 탔는데, 활동을 길게 하지는 않았어요. 활동을 그만하게 된 이유는 어떤 거였어요?
📸소라   여러가지가 있어 가지고.(웃음) 전체적으로 흐지부지 되고 있었어요. 원동력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중에 단비는 유학을 가게 됐고, 은별이는 워킹홀리데이를 가게 됐고. 멤버를 새로 뽑아서 계속 하려고도 했었어요. 2집에 넣을 곡이 나와 있기도 했고 단비랑 은별이랑 신곡을 연습도 했었어요. 근데 흐지부지됐죠. 프로듀서와의 관계 때문에 그런 것도 있고. 플레이걸의 곡을 쓰는 게 어쨌든 진마와 보브였으니까. 둘과의 관계가 팀을 유지하는데 굉장히 중요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조금 바보 같은데, 어릴 때는 그런 것을 어떻게 핸들링 해야 될지 몰랐어요. 아무튼 여러 관계가 버거웠고.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프로젝트가 나한테 너무 중요하니까 견디고 했었어요.
🐮용성   비트볼에서는 개입은 안 했습니까? 팀이 해체되면 아쉬울 것 같은데.
📸소라   사장님도 처음에는 재밌게 했는데, 나중에는 좀 소극적으로 되셔서. 첫 멤버 뽑을 때도 사장님은 개입하지 않았었고. 보브는 일본 가고, 나중에 진마도 일본에 가고. 

“플레이걸의 주축 멤버인 김소라가 우리의 기획 의도를 잘 파악한 상태에서 안무도 직접 짜고 나름 준비도 많이 했다” 

 「"지난 10년은 이 순간을 위해 왔다"」.권석정 아카이브

“📸소라는 우리들의 브레인! 📸소라가 없으면 저흰 안돼요. 리더의 지휘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단비도 늘 “📸소라 참 말 잘하죠?” 그래요. 하하하.” 

「플레이걸 | My name is...」, 텐아시아

3. 플레이걸 이후, 사이드 포니테일

사이드 포니테일 - 우리끼리 손난로

🐮용성   플레이걸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해요.
📸소라   플레이걸이 11년에 끝났는데, 그러고 나서 1년을 아팠어요. 하루에 네 시간 정도만 깨어 있고 매일 잤어요. 구체관절 인형 메이크업하는 일을 했었는데, 하루 두세 시간, 그 일 하는 시간 제외하고는 계속 잤어요. 병원에 갔더니, 병이 있다고 말해주더라고요. 11년은 그렇게 아프게 보냈고, 12, 13년에는 휴·복학 반복해가면서 대학 졸업했어요. 14년에는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하는 소액다컴 사업에 지원해서 두내식당이란 프로젝트를 했어요. 모델 일도 간간히 하고. 16년에는 블랙야크 아트크루에 지원해서 오스트리아에 다녀왔어요. 작가의 삶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스트리아에 다녀오면서부터 다시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2018년 되면서 좋은 일이 많이 생기고 상태가 굉장히 좋아졌어요. 2011년에 진단 받은 후에 계속 약을 먹었는데 약을 먹으면 완전한 컨디션이 아니었거든요. 근데 2017년쯤 몸이 많이 좋아져서 약도 끊었고. 그때 미술 학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실적도 되게 좋았어요. 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가면 보너스를 받거든요. 그 보너스도 많이 받고. 그거 받으니까 병이 낫던데요?(웃음)
🐮용성   선생님 계속 할 걸 그랬다! (웃음)
📸소라   제가 돈 욕심이 없어 가지고. 그냥 벌리면 벌리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라서. 학원 차린 친구들은 정말 많이 벌었어요. 아무튼 2018년 그때 보너스 받고, 병이 좀 나았고(웃음) 학원 내에서 입지가 좋아지기도 했고, 음레코드* 에서 일을 하라고 연락도 오고, 전시도 잡히고, 연애도 시작하고. 뭔가 되게 잘 풀렸어요. (*용산구에 위치한 전시공간, 바이닐 펍.)

두내식당
블랙야크 아트크루 in Austria


🐮용성   그럼, 사이드 포니테일은 아픈 와중에도 틈틈이 했던 거예요? 
📸소라   2010년, 11년에 많이 아프고 2012년, 13년 되면서 좀, 생활이 가능해졌어요. ‘달콤한 비누’라는 팀을 하던 조용석이란 친구가 예전에 음원사이트에서 일을 했거든요. 제가 예전에 책(『낭만, 듣다』) 쓸 때 음원을 많이 구해줬었어요. 그때 얘기도 많이 하고 그러면서 친해졌어요. 나이도 같고. 같은 동네 출신이고 대화도 잘 통해서. 그 친구가 하는 밴드에 객원 보컬도 했었어요, 근데 그때 단비가 그러더라고요. “너 이런 게 더 잘어울리는 것 같아.” 멜로디언 불고, 남녀 듀엣.
🐮용성   소규모아카시아 밴드 같은?
📸소라   그것 보다 조금 어설픈 느낌(웃음) 그러다가 “둘이 뭐 해볼까?” 이렇게 얘기를 하게  된 거예요. 일본에 오냥코 클럽이라는, AKB의 원조 격인 그룹이 있었어요. 사람이 엄청 많은. 오냥코에서 잘 된 유닛 중에 동네가 같아서 유닛이 된 애들이 있거든요, '우시로유비사사레구미うしろゆびさされ組'라고. 그런 것처럼 우리도 같은 동네니까 같이 해보자. 그래 가지고, 작업을 시작했어요. 근데 우연찮게 첫 앨범이 잘 된 거예요. 그러니까 기대감을 가지고, 우리 이런 걸 또 해보자. 우리 활동은 안 하지만 이런 게 쏠쏠하다.
🐮용성   잘 됐다는 게, 어떤 거예요? 수익이 좀 났습니까?
📸소라   네, 돈이. 그 전에는, 스마일즈 때는 돈을 벌어본 적이 없고, 플레이걸 때는 ‘술탄 오브 더 디스코’ 오프닝 했을 때 돈을 받았었고. 그 외에는 돈을 받은 적이 없어요. 수익이 생기면 제작비 먼저 회수하는 방식이니까. 저희가 500장 찍어서 다 팔았거든요. 근데도 남은 것은 없고. 컨셉이 튀었으니까, 1000장 찍었어도 다 팔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비트볼이 조금 소극적이었어요. 사이드 포니테일은, 어느 날 용석이한테 연락이 왔대요. “너네 수익이 꽤 났다.” 비트볼에서 수익을 분배 받고, 그걸 둘이서 나눴죠. 그때 그런 걸 경험하니까. “돈이 벌린다.” “활동을 안 해도 돈이 벌린다.” 몇 번 더 만들었는데 그 뒤에는 그렇게 잘 되지 않았어요. 용석이가 NGO에서 일을 해서 외국에 나가 있었거든요. 녹음 할 때만 한국에 들어오곤 했는데,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작업이 진척이 잘 안 됐어요. 힘도 잘 안 나고. 나중에는 둘 다 하는 일이 바빠지면서 살짝 흐지부지 됐어요. 지금도 가끔 “다시 해볼까?” 그런 얘기를 하긴 하는데.

사이드 포니테일 - 어쩌나 / 새벽산책
사이드 포니테일 - 어쩌나 / 새벽산책

🐮용성   사이드 포니테일 커버를 보면 계속 여성 두 분이 등장하는데.
📸소라   한 명은 제 친구예요. 저희 집 옥상에서 찍은 거거든요. 삼각대를 세워 놓고 제가 앵글을 잡고, 셔터는 용석이가 누르고.
🐮용성   지금 집 옥상?
📸소라   네
🐮용성   (웃음) 어디서 봤지 했는데 거기였구나.
📸소라   사람들이, 커버 때문에 그런지 여성 듀오라고 생각을 하더라구요. 근데 여자 두 명이 한다는 그 느낌이 곡하고도 잘 어울리고. 그래서 일부러 계속 여자 둘이 나오는 사진을 썼어요.
🐮용성   크레딧을 보면 소라 씨가 디자인에 참여했다고 쓰여있는데.
📸소라   〈우리끼리 손난로〉 때는 사진이랑 디자인을 하고, 〈어쩌나〉랑 〈여름옷〉 할때는 로고를 만들었어요. 사이이드 포니테일 로고.
🐮용성   그때 백 만원 넘게 나왔으면, 점점 줄었겠지만 그래도 수익이 꽤 누적 됐을 것 같은데. 계속 정산은 되고 있습니까.
📸소라   아뇨, 그 이후에는 없었어요. 아까 말한 첫 정산도 꽤 오래 걸렸고.
🐮용성   그럼 최근에 낸 PPS는 정산을 받았습니까. 
📸소라   아뇨, 아직. 돈이 안 들어왔을 수도 있고.
🐮용성   아이, 무슨 말씀이세요. 들어 왔죠. 한참 됐죠. 백번은 들어왔겠다. (웃음) 비트볼이 중간에 끼어 있으면, 무엇인가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그런 게 잘 없는 것 같아서 아쉽네요.
📸소라   처음에는 홍보를 해준다고도 말했었는데 막상 그런 것이 잘 안 됐어요. 잘 만들었는데 노출이 안 되니까 너무 아쉬워요. 정산을 해달라고 요청을 해야 하나. 근데 사장님이 그런 얘기도 했어요. 인디판에  “비트볼이 플레이걸에 돈을 너무 많이 써서 망했다” 하는 소문이 돈다고. 근데 그건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씬이랑 한참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듣고 놀랐어요.
🐮용성   (웃음) 제 생각에 비트볼의 한계는, 첫째는 ‘재현’에 너무 열중한 거고. 음반 리이슈 하듯이, 어느 지역의 어느 시기들을 재현해 내려는 팀을 만들곤 했잖아요. 근데 재현은 처음에는 재미있고 좋은데, 그것만 가지고 계속 가기는 정말 어렵거든요. 게다가 이제는 누구나 원본에 접근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미감이 컨템포러리 하지 않다는 점? 이번에 비트볼에서 나온 음반 살펴보면서 림지훈 씨의 《Organ Orgasm》 바이닐 소개글을 봤거든요. 근데 이런 문구가 있더라고요. “오르간이라는 악기는 말 그대로 ‘남자’의 영역. 거세된 수컷들이 활개치는 세상에 대해 일갈하는 듯한 중후함과 압력이 돋보이는 악기다.”, “첫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이름 모를 바를 배경으로 오르간 연주자와 그를 훑어 내려가는 농염한 숙녀의 습한 시선.” 이런 표현을 위트 있다고 느끼는 미감이 있는데, 그런 게 지금은 통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요. 좀 더 얘기할 게 많지만, 여기까지만(웃음)

  1980년대 걸 트리오의 목표는 ‘제2의 캔디스’였다. 수많은 소녀들은 제2의 캔디스를 표방하며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단발성으로 그쳤다. 캔디스와 핑크레이디가 각각 7년, 6년 동안 활동한 것에 비해―이것도 그리 긴 것은 아니지만 아이돌 그룹의 생명력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 파급력에 있어서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니었다― 80년대 활동한 팀들은 대부분 1~년, 길어야 3년이었다. 그들의 짧은 생명력에는 저마다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캔디스’의 재현에 매달렸다는 점이 아닐까? ―노래는 다들 좋다― 

김소라. 2010. 『낭만, 듣다』. 북앤컴패니. 205p

🐮용성   찾아보니까, 피처링도 많이 하셨더라고요. 근데 옛 음원들은 크레딧이 제대로 표기 안 된 경우가 많아서. 제가 찾아본 거는 일단, 기린의 〈히위고 나우〉
📸소라   기린이랑 예전에 전시를 같이 했었어요.
🐮용성   같은 대학을 나온 거예요?
📸소라   아뇨, 다른 학교. 2007년 쯤이었는데, 미술하는 친구의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 분 제자가 기린이었어요. 기린도 미술 전공했고. 그때 기린이 조그만 체스 말 같은 걸 만들었는데 가지라고 줬거든요.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근데 플레이걸 하고 나중에 연락이 온 거예요. 피처링으로 도와달라고. 그 친구도 옛날 음악을 좋아해서 플레이걸을 좋아했거든요. 그리고 그 친구가 나중에 비트볼에 들어왔어요. 근데 그 후로는 딱히 연락을 안 했어요.
🐮용성   비트볼 인터뷰에서는 소라씨랑 기린이랑 친구인 것처럼(웃음) 뭐라고 써있냐면, “기린은 비트볼뮤직의 기본적인 철학과 잘 맞아서 같이 하게 됐다. 기린은 플레이걸 📸소라와 아는 사이라서 우리에게 자신의 ‘플리즈 스테이’ 뮤직비디오를 보여줬다.”
📸소라   아니에요. 제가 비트볼에 소개한 적은 없고 그 친구가 알아서. (웃음) 기린이 연락하면서 저랑 아는 사이라고 말한 것 아닐까요. 아는 사이는 맞으니까. 기린한테 연락해보라는 얘기도 들었는데 그렇게 친하진 않아서(웃음) 사실 예전에 기린이 저한테 연락을 한 것처럼 저도 그런 식으로 연락을 해도 되기는 하겠죠. 근데 기린이 너무 유명하니까 연락하기 민망해요.
🐮용성   기린이 먼저 전화해서 “소라야, 피처링 안 필요해?” 이러면 좋겠다.
📸소라   저를 기억 못 할 수도 있어요.
🐮용성   에이, 그거는 아니다.
📸소라   그리고 제가 뭔가를 좀 해두었으면 괜찮은데, 좀 연락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됐으면 괜찮았을 텐데 너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있으니까.

기린과 함께 했던 전시, '사적인 게임'
기린과 함께 했던 전시, '사적인 게임'
기린 - 히위고 나우

🐮용성   또 어떤 곡이 있죠?
📸소라   몬구 〈눈물의 루비〉. 플레이걸이랑 컨셉이 맞아서 하게 됐어요. 근데 준비를 충분히 못해서 조금 아쉬운 게 있어요.
🐮용성   비트볼에서 나온 굴소년단 앨범에도.
📸소라   〈참치〉라는 노래에 플레이걸이 피처링을 했어요. 그 다음에 황현우 씨가 프로듀싱 한 조길상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 노래에도 피처링을 했어요. 제가 예전에, 와이낫에서 건반 연주하시던 유지훈 씨한테 피아노 레슨을 받았었거든요. 근데 하루는 수업 끝나고 녹음실에 가신대요. 별 생각 없이 따라 갔다가 우연히 코러스를 하게 됐어요. 이거 좀 불러보라고 해서(웃음) 〈좋아해 널 좋아해〉라는 노래예요.
🐮용성   모델일도 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소라   플레이걸 이후에 그런 요청이 되게 많았어요. GQ도 찍었고.
🐮용성   플레이걸이 아니라 김소라로.
📸소라   네, 혼자. 그때는 그런 게 좀 있었거든요. 재미있어 보이는 사람 찾아서 인터뷰하고 사진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리거나 홈페이지에 올리고 하는. 그걸 한번 하게 됐어요. 근데 그 작가 분 작업이 규모가 좀 커지고 나중에 잡지 데뷔를 하게 됐는데 그때 저를 모델로 쓰겠다고 해서 같이 했어요. GQ에서 하는 아트 컨셉의 사진 촬영이었는데. 아무튼 여러 사람의 연락이 진짜 많았어요.
🐮용성   수작부리는 놈들도 있고.
📸소라   수작부리는 놈들도 되게 많고, 작업을 빌미로 수작부리는 애들도 많고.
🐮용성   작업을 빌미로 수작 부리는 건 어떤 식인 거예요?
📸소라   사진 찍자 했는데, 나중에 고백하고. “이거 해줘”해서 했는데 나중에 고백하고. 그리고 작업 얘기하자고 해서 나갔는데 작업 얘기 안 하고 밥 먹고 헤어지거나. 이런 게 자꾸 반복되니까 너무 지치고 싫은 거예요. 나는 진짜, “아, 나는 작업을 할 거야.” “작업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이런 생각인데, 작업에 관심 있고, 작업을 좋아하는 척 하다가 막상 나가면 그게 아니니까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그때 GQ도 어쨌든 찍기는 찍었는데 그거를 찍고 나서, “아, 이게 뭔가.” 그런 마음이 되게 쎄게 왔어요. 사람들이 나한테 원하는 건 이쁜 척하는 것 밖에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머리를 숏컷으로 짤랐어요. 근데 자르고 나서 후회했죠. (웃음) 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나, 싶어 가지고. (웃음) 이상하게 그런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어요. “나의 뮤즈” 이런 거.

4. 대학시절

  나는 5살 때부터 미술교육을 받았다. 어린 시절 내게는 미술은 밥 먹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자연스럽게 예술 중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유받았고, 그렇게 ‘입시미술’이라는 걸 시작했다.
  하지만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입시미술은 모든 자유를 빼앗기는 것과 같았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의상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때마침 운 좋게도 방과후 활동으로 의상재단반이 생겼다. 나는 거기서 옷을 만드는 것을 배웠고, 발표회도 했다. 상도 탔다. 즐거웠다. 그렇게 2년을 보낸 나는 의상디자이너가 되지 않기로 했다.
  미대에 진학하기까지도 나는 여러차례 미술을 했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그만둘 대 나는 언제나 확신에 찬 말투로 “이것은 저의 길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돌이켜 보니 정말 ‘맹랑맹랑한 꼬맹이’였다. ―그리고 결국에는 미대에 진학했다―

김소라. 2010. 『낭만, 듣다』. 북앤컴패니. 112P

🐮용성   한예종 조형예술과를 졸업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소라   저는 원래 디자인과로 입학했어요. 미술원 안에 과가 네 개인데, 미술이론과, 건축과, 조형예술과, 디자인과 이렇게. 저는 입시때부터 디자인과 갈지 조형예술과 갈지 고민이 많았어요. 1학년 때 미술원 안에 네 개 과가 같은 파운데이션 수업을 듣는데, 그 수업을 듣고 전과를 결심을 했죠. 파운데이션 수업이 조형예술과 기반의 수업이에요. 그때 예술병에 심하게 걸려서, 파인 아트가 너무 좋은 거예요. 저는 잘 몰랐어요. 작가가 된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작가들이 누가 있는지도 자세히는 모르고, 제가 미술학원을 재수를 하면서 한예종 학원을 가게 됐는데.
🐮용성   한예종 학원? 한예종 입시가 많이 달라요?
📸소라   완전 달라요. 다른 데 입시는 석고 소묘, 수채화 이런 것을 시험 봤고 한예종은 주제를 주고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이에요. 입시 때부터 자기 개인 작업을 해야 해요. 너무 새롭고 재미있었죠. 작가 공부도 많이 하고, 전시도 많이 보고, 미술관도 많이 가고. 그때 저는 영화 보는 거를 좋아했어서 하루에 세네 편씩 보고 그랬어요. 중학교 때는 의상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는데 너무 고돼서 그만두었어요. 옷 만들 때도 저는 컨셉을 짜는 걸 좋아했어요. 옷 네 개를 세트로 만든다든지 근데 이제 파인 아트를 하다보니까, 제가 생각한 대로 컨셉 잡고 기획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거야” 하는 확신이 들었죠. 그래서 전과를 했어요. 근데 지금은 돌아돌아 디자인을 하고 있으니까(웃음) 근데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조형예술을 전공하면 디자인을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거는 남는 장사다.(웃음) 가서 이것저것 되게 많이 배우고 재미있었어요. 근데 제가 배운 것들이 먹고 사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은 한참 나중에야 알았어요. 저는 서른까지, 먹고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몰랐어요.
🐮용성   (웃음) 조형예술과에서는 어떤 걸 해요? 다른 데는 조소과가 있고, 서양화과가 있고 그렇잖아요. 
📸소라   옛날에는 그런 구분이 있었는데 현대 미술이 되면서 매체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어요. 내가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영상을 찍을 수도 있고. 과가 그렇게 나뉘어진 대학이 있기는 한데 이제 서양화과에서도 이걸 하고 조소과에서도 이걸 하죠. 그냥 파인 아트, 현대미술과라고 보면 돼요.
🐮용성   그러면 조형예술과에는 그림 그리는 사람도 있고, 조각 하는 사람도 있고.
📸소라   네, 스튜디오가 나뉘어 있는데, 원하는 곳을 찾아 가는 식이에요.
🐮용성   스튜디오에 들어간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소라   그 교수 밑에서 배우는 거죠. 교수는 작업에 대해 코멘트 해주고, 방향을 잡아주고, 다 같이 모여서 토의 하고, 자기 작업 발표하고, 그런 게 스튜디오에서 하는 거예요. 스튜디오는 1주일에 한 번 가요. 이삼학년 때는 기술 위주로 수업을 들어요. 사진 수업, 도자 수업, 목공, 철공, 판화, 이런 식으로. 근데 판화과, 조소과가 아니니까, 좀 하다 마는 느낌이 있긴 하죠. 뭔가 하기는 많이 하는데 기술적으로 전문가 수준은 못 되는(웃음)
🐮용성   소라 씨는 어떤 거를 좋아하셨어요?
📸소라   저는 학교 다닐 때 설치하거나 입체 만들거나 그런 쪽으로 열중을 했어요. 도자 수업도 열심히 들었고. 주변에서 도자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도 하셨었어요.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웃음) 제가 미술하는 사람 중에서도 손기술이 있는 편이거든요. 그림은 잘 그려도 만들기는 못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저는 만들기를 어릴 때부터 잘했어요. 최근엔 그런 생각도 좀 했어요. “도자를 계속했으면 어땠을까.” 사람이 잘 하는 걸 해야 하잖아요. 만들기가 제 재능이란 걸 최근에 알아챘어요. 예전에는 도자 하라는 제안이 싫었어요. 그때는 도자를 하라는 말이 “너는 기술만 좋아” 이렇게 들리는 거예요. 분명 그런 뜻이 아니었을 텐데 “기술 좋은 거는 의미가 없어” 이런 생각에. 예술병이 사람을 망쳤어.(웃음) 그때 그런 제안들을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다른 사람이 됐을 텐데. 그때는 물건 찌그려 뜨려 놓고 제목 멋있게 짓고 이런 것만 좋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학교 분위기도 그런 게 없지 않았고. 왼손으로 그린 것 같은 그림을 더 좋아하는 분위기. 

자격증을 취득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에 컴퓨터 그래픽 자격증을 공부했다. 하지만 가고 싶은 학교는 자격증으로 갈 수 없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 입시미술을 했지만 재수를 하게 되었다. 다시 석고상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입시 미술을 하지 않아도 갈 수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지원했다. 전공의 매체 구분이 없는 학교에서 목공, 도자, 유리, 판화, 사진,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접할 수 있었다.

「[INTERVIEW] 데이터로 출력된 아버지의 존재, 프린트 숍 PPS 김소라

🐮용성   사진이랑 디자인은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셨어요?
📸소라   이전에 사이드 포니테일 때도 하고, MDS라는 팀의 비주얼 디렉팅도 했었어요. 황푸하 것은 황푸하가 제 사진을 마음에 들어해서 그렇게 시작하게 됐어요. 황푸하 하면서 저도 많이 일 감각이 생겼어요. 황푸하가 다른 곳에 추천도 해주고. 사진은, 간간히 찍기는 했는데 본격적으로 찍은 건 얼마 안 됐어요. 주변에서 권유를 하기는 했었는데 그때는 사진이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안 했어요.그러다 18년, 19년쯤? 황푸하를 찍기 전후로 사진을 좀 많이 찍기 시작했어요. 친한 언니가 사진을 본격적으로 해보라고 계속 권유해서. 사진을 찍어서 액자로 만드는 일도 하고. 그러다 사진 쪽으로 지원 사업을 썼는데 된 거예요. 그래서 사진 쪽으로 완전히 틀었죠. 
🐮용성   언니가 소라 씨 재능을 알아봤네요.
📸소라   그 언니는 지금 커텐 회사를 운영해요. 최근에는 같이 패브릭 포스터를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제가 찍은 여행 사진, 풍경 사진 같은 것 넣어서. 근데 최근에 언니가 약력을 달라고 해서 프로필 정리하다보니까, 디자인, 사진 쪽 약력이 사이드 포니테일, 사이드포니테일, 사이드포니테일, 황푸하, 황푸하, 황푸하, 천용성, 황푸하, 천용성, PPS 이렇게 되던데요.(웃음) 

김소라의 사진으로 제작한 액자
김소라의 사진으로 제작한 액자

🐮용성   카메라는 어떤 것을 쓰세요?
📸소라   지금 제가 쓰는 카메라는, 엄마가 혼수로 해오신 거예요. 어릴 때 수학여행 갔을 때부터 썼어요. 처음에는 엄마가 롤을 감아 줬어요. 어릴 때는 어려우니까 실수도 되게 많이 했어요. 고등학교 때도 계속 그 카메라만 썼어요. 한 5~6년 전부터 필름 카메라 붐이 불었는데, 저는 원래 그거밖에 안 찍었으니까 좋았죠. (웃음) 지금도 디지털 카메라는 잘 못 다뤄요.
🐮용성    최근에 자기소개는 어떻게 하세요? 음악가? 디자이너? 사진 작가?
📸소라
    이것저것 한다? (웃음) 음악한다는 얘기는 안 한지 좀 됐어요. PPS하기 전까지는 계속 안 했으니까. 보통은 "미술한다" 아니면 "가르친다." 묻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요. 사진이 필요한 사람이면 “사진한다.” 디자인이 필요한 사람이면 “디자인 한다.” 전시, 파인 아트 쪽 사람이면 “작업한다.” (웃음) 인터뷰 같은 거 할 때 매체의 특성이 있잖아요. 최근에 'YCK' 인터뷰 했는데 그때는 작가 느낌으로 했고. '월간사진'도 작가 느낌으로. 옛날에는 음악가 느낌으로. 그때는 공식적으로 음악가였으니까. 근데 소개할 때 여전히 좀, 애매한 기분이 많이 들어요. 나도 모르겠는 거 있죠? 뭐라고 해야 될지. 제가 해온 작업이 잘 정리도 안 되고. 카테고리가 너무 많으니까.

황푸하의 《우리집》 커버
황푸하의 《우리집》 커버

5. PPS

“출력소와 프린트 숍 중에서 고민했다.” 프린트 프린트 숍(Print Print Shop)의 약자인 ‘PPS’는 김소라의 음악 활동 명이자 사진을 토대로 한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INTERVIEW] 데이터로 출력된 아버지의 존재, 프린트 숍 PPS 김소라

🐮용성   PPS 프로듀서를 맡은 지완 씨와 만나는 과정을 이야기해 주세요.
📸소라   A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플레이걸 활동할 때 우연히 알게 된 친구예요. 친한 건 아니었는데, 저한테 꾸준히 연락을 하는 친구. 플레이걸 할 때는 주목을 받았으니까, 저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근데 플레이걸을 그만두고 활동을 그만두니까 사람들이 연락을 안 하는 거예요. 근데 그때도 꾸준히 연락해준 사람이 음레코드 대표님하고 A였어요. 그래서 저는 그 두 사람을 되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A가 초대를 해줘서 공연을 보러 갔어요. 2012년에, 아트선재에서 있던 ‘북조선 펑크록커 리성웅.’ 그 때 악어들도 공연을 했어요. 거기서 지완이를 봤죠.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고, 오르간 위에 올라 가고, 엉덩이로 치고, 약간 미친놈처럼 굴었는데 그게 되게 멋있는 거예요.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근데 처음 본 거는 그 전에 ‘대공분실’에서. 학교 안에 재미있는 곳이 있다고 해서 갔거든요. 근데 이렇게 문을 열었더니 너무 그들만의 세상인 거예요. 그래서 쫌만 있다가 나왔죠. 그때도 악어들이 있었어요. 아무튼 리성웅 때 보고 너무 멋있어서 페이스북으로 친구 신청도 하고 지켜봤죠.

악어들 - 물고기였으면 @북조선 펑크록커 리성웅

🐮용성   (웃음)
📸소라   그 후에 완전히 잊고 있다가, 2018년에 생기 스튜디오에 친구를 만나러 갔었는데 지완이가 있는 거예요. 사석에서 본 건 처음이었는데, 공연 때랑 다르더라고요. 되게 샌님 같은 느낌? 나중에 물어봤더니 공연 때만 미친놈 같고 평소에는 안 그렇다고. (웃음) 그러고 나서 한 달쯤 있다가 메시지가 왔어요. 지완이 공연을 보러 가고 싶었는데 저는 주말에 일하니까 가기가 어려웠거든요. 근데 마침 연락이 온 거예요. 커피 한 잔 하자고. 근데 제가 그때 커피를 안 마실 때라, “커피 말고 차를 한잔 하자.” 4월이었고, 합정역에서 봤어요.
🐮용성   PPS는 어떻게 만들게 된 거예요?
📸소라   저희가 코로나 터지기 전에 코인노래방을 되게 많이 갔어요. 여행 다니면서 음악도 많이 듣고. 그러면서 계속 그 얘기를 했어요. 내는 게 좋지 않겠냐. 어차피 노래방 가서 노래를 많이 하니까. 
🐮용성   둘 다 노래방 자주 안 갈 것 같은 이미지인데(웃음)
📸소라   지완이가 “나쁘지 않다”, “특색이 있다”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지원사업 기획서를 쓸 때, 음악이랑 전시를 같이 하는 거로 기획서를 냈거든요. 그래서 하게 된 거예요. 처음 컨셉은, 가상의 밴드를 만들어서 그 밴드의 이미지로 작업을 하고 실제 앨범도 내자, 이런 거였어요. 근데 이미지 작업을 하다보니까 아버지 사진 쪽으로 가게 된 거예요. 아무튼 그래서 PPS를 하게 됐죠. 본격적으로 활동하려는 생각이 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유통도 별 생각 않아고 비트볼에 맡겼던 건데. 근데 앨범이 기대했던 것보다 잘 나와서, 조금 생각이 바뀌었어요.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올해도 싱글을 하나 내자고 얘기는 하고 있어요. 사진과 음악을 잇는 컨셉은 계속 가져가면서. 이번에는 제가 관여를 많이 안 했어요. 전시를 같이 하다보니까, 저는 시각화 쪽에 더 신경을 썼고 음악은 지완이가 주도적으로 했는데, 앞으로는 음악에서도 저의 비중을 좀 더 늘리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근데 지원사업이 돼야죠. 그래야 동기부여가. (웃음) 예전에 졸업 작품 할 때 만든 곡도 있는데 그걸 손봐서 다시 낼까, 하는 생각도 있고.

김소라 개인전 '사진동굴'

🐮용성   여러 곡이 있어요?
📸소라   완료된 것은 한 곡이에요. 직접 쓰고, 미디도 직접 하고. 근데 다시 해보려니까 막막해요. 그때도, 맥북을 사놓고 노트북이 무서워서 열지도 못하고 있다가 일주일 뒤에 열었어요. 친구한테 로직을 구해서 깔고 한두 달 방에 틀어박혀서 로직만 했어요. 건반도 사고 제네렉 스피커도 사고. 작사는 스마일즈 때부터 되게 많이 했거든요? 근데, 곡을 쓰는 거는 자신이 좀 없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걸 계속 하려면, 내가 해야된다는 생각도 있고. 오소리웍스에 부탁을 해볼까 이런 생각도 있고. (웃음)
🐮용성   PPS로 공연 계획도 있으세요?
📸소라   공연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있었는데, 공연을 하려면 돈이 드니까. 그리고 코로나 터지고, 공연을 한다는 게 좀 더 무의미해진 느낌이 있어요. 그런 비용을 불사하면서 까지.
🐮용성   그러면 나중에, 저랑, 푸하 씨랑 같이. (웃음)(*PPS의 음반에 참여한 한인집(드럼), 정수민(베이스)은 천용성의 음반에도 참여하였다.)   
📸소라   황푸하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웃음) 근데 제가 공연을 안 한지도 오래된 데다가 노래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용성   다시, 미술학원으로 돌아갈 일은 없는 거예요, 이제?
📸소라   안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더라도, 미술학원 일을 하더라도 제 거를 차리거나 조그마한 클래스를 하거나, 이런 쪽을 생각을 하고. 저도, 나이도 있고 하다 보니까 다시 취직을 한다고 해도 조건을 더 올릴 수는 없어요. 어차피 결국엔 차려야 하거든요. 어차피 차릴 거면,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규모로 하는 게 낫지 않나 싶고. 근데 그렇게 클래스를 잘 하려면 내 커리어가 좀 있어야 하기가 쉬우니까. 이제 이런 작업들 하고 하는 거를 활발히 해놓아야 차려도 낫겠다는 생각?

PPS - Alaska

🐮용성   PPS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은 거예요?
📸소라   처음에는 프레이밍 애프터눈Framing Afternoon 이라는 이름을 만들었어요. 근데 프레이밍 애프터눈은 너무 길고, 줄여 말하기도 어렵고, 조금 소녀적인 느낌이 있어서, 바꿨어요.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가상의 밴드를 만들려고 했는데 그 밴드 이름을 처음에는 출력소로 하려고 했거든요? 근데 거칠고 을지로 느낌이 나서.(웃음) 프린트샵은 어떠냐 했더니, 너무 프린트샵만 검색되니까 하나 더 붙여서.
🐮용성   (웃음) 근데 아직도 인쇄소만 검색 돼요. 영어로 Print Print Shop 쳐도 그렇고, 한국어로 프린트 샵 쳐도 그렇고.
📸소라   그래서 지금도 고민이에요. “아, 이거 또 바꿔야 되나.” 근데 이미 PPS로 인터뷰한 게 있으니까. 제 이름을 바꾸는 것도 생각했어요. 김소라라는 작가 분이 있거든요. ‘현대 미술하는 김소라’하면 누구나 그 분을 떠올려요. 동명이인도 많고. 너무 여성스러운 느낌도 있고. 근데 제가 이미 했던 활동들이 김소라로 검색되니까 지금 바꾸는 게 의미가 있나 싶다가도, 뭐 한 게 없으니까 그냥 바꿀까 하는 생각도 들고.
🐮용성   바꾸지 마요.
📸소라   성을 바꿀까도 생각했어요. 제 친구 중 한 명이 성을 바꿨더라고요. 아니면 성을 뺄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아니면 사진-음악 작업은 ‘사진동굴’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디자인 같은 일은 PPS로 하고. 근데 저도 사실 정리가 안 돼요.
🐮용성   이름 바꿀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요.
📸소라   이름은 아무리 처음에 구려도, 내가 열심히 하면 그 이름이 멋있어지는 거니까. 그래 가지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이름에 대해서는 아직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6. 에필로그

  개인적으로 홍대 신을 바라보는 오해와 편견들에 대해서는 걱정이 많았어요. 음악 뿐 아니라 미술도 좀 더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편견에 스스로 갇혀버리는 것 같았거든요. 저희가 메이저가 아닌 인디에서 데뷔하는 건 그 신 안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장을 연다는 의미가 있어요. 자유롭지 않으면 고립될 수 있는 법이니까요.

「플레이걸 | My name is...」, 텐아시아

  플레이걸의 등장은 그런 맥락에서 ‘한국 인디 씬 전체’에 어떤 질문을 던진다. 인디는 일종의 농담, 아닌가. 나로선 이 질문이 꽤 의미심장하다고 본다.

차우진. 「플레이걸과 ‘인디’ 진정성」

🐮용성   그간의 활동들에 대해서는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세요? 잘했던 것, 아쉬웠던 것. 
📸소라   기획과 컨셉 잡는 걸 잘했다고 생각해요. 가사 쓰기도. 가사도 컨셉에 맞춰서 써야 하는 거니까. 〈은밀한 버스〉 가사가 좋다는 얘기를 되게 많이 들었어요. 컨셉에 되게 충실한 가사였죠. 이번에 나온 〈경주〉 가사도 마음에 들어요. 가사를 계속 쓰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여담이지만 저작권료의 8할이 은밀한 버스에서 들어와요. (웃음) 음악적으로는 한 게 많이 없다고 생각해요. 간단한 화성을 짜는 것은 많이 했어요. 그렇지만 노래나 악기, 이런 거를 잘한 것은 아니었고. 다 짧았다는 게 제일 아쉬워요.
🐮용성   맞아요. 다 너무 짧았어요.
📸소라   네. 지속을 안 했기 때문에, 내가 이거를 열심히 했다고 하기에는 뭔가 좀 창피한 것도 있어요. 앞서 말했지만 어릴 때는 관계를 어떻게 핸들링 해야 될지 잘 몰랐는데, 그런 것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죠. 그래서 나중에 병이 더 심하게 온 것 같기도 하고. 플레이걸은 프로젝트처럼 한 번 더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하기는 해요. 그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곡을 받아서 컴필레이션 처럼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기회가 되면 테이프나 LP를 찍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웃음) 저희가 비트볼에서 스케치북에 나갔던 유일한 팀이었거든요. 그래서 사장님이 아쉬워하는 게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좀 더 잘해볼걸 하는.
🐮용성   붐을 끌고 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소라   양가적인 감정이 있는 거죠. 구렸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고, 물 들어올 때 노를 젓지 못했다 생각하는 것도 있고.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해요. 근데 잘 모르겠어요. 플레이걸 같은 것을 다시 하는 게 지금 나의 경력에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도 들고. 지금 플레이걸을 누가 기억하나, 아무도 기억 못 하는데 다시 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근데 또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것 중에 이게 제일 유명하니까. 플레이걸 컨셉을 현대미술로 끌고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제 영상을 복제해서 춤을 추는 거예요.(웃음)
🐮용성   좋을 것 같아요(웃음)
📸소라   제가 춤추고 노래하는 것에 관심을 끊은지 오래되어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창피할 것 같아요. 근데 한편으론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웃음) 왔다 갔다 해요. 근데 지금은, 당장 해야 하는 게 너무 바쁘니까. 올해 상반기는 거의 천용성에 올인 했고, 그래도 뭔가 하기는 했어요. 어린이 책 만들고, 촬영도 하고. ‘이른 열대야’ 촬영 끝나고 7월쯤 되면은,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어요. 지금까지 모든 걸 다 흐지부지 한 게 아쉬워요. 지속을 좀 못 했고. 깔짝깔짝하다 끝난 느낌? 그게 제일 아쉬워요

김소라의 졸업 작품 '뉴턴의 사과'
김소라의 졸업 작품 '뉴턴의 사과'
김소라 - 뉴턴의 사과

🐮용성   무거운 이야기를 많이 했으니까, 끝은 좀 가볍게.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는?
📸소라   어렵다. 마고 거리안, 아라이 유미, 슈가 베이브
🐮용성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소라   어렵다. 왜 생각이 안 나지. 좋아하는 작가가 있거든요? 근데 이름이 생각이 안 나요. 제가 한때 너무 꽂혀가지고 뉴욕에 가서 화집도 사고 했는데. 콜라주 작업하는 옛날 사람인데. 생각났다. 로버트 리히텐슈타인. 최근에 쿠사마 야요이 영화가 개봉을 했는데 논란이 있었어도 지속해서 결국 국민작가가 된 점이 굉장히 존경스러웠어요. 지속한다는 게 결국 이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네트 메사제와 크리스티앙 볼탄스키, 테드 창도 좋아해요.
🐮용성   취미 생활은 어떤 것들이 있어요? 컵 수집? 전에 집에 갔을 때 예쁜 컵들 많이 보여주셨잖아요.
📸소라   저 원래 수집하는 것 좋아해서 장난감이니 뭐니 엄청 모았는데, 모으다 보니까 먼지가 쌓이고 너무 부산해져서 수집을 포기했어요. 딱히 취미라 할 게 없었는데, 제가 하는 일이 취미인 느낌이라. 뜨개질. 뜨개질이나 만들고 하는 것들? 
🐮용성   어떤 것을 주로 뜨세요?
📸소라   목도리, 가방. 되게 많이 떴어요. 잘 떠요 (웃음) 한때는 엄청 빠져있었어요. 모자랑 가방세트 다 떠서 친구한테 선물하기도 하고. 뜨개질이 되게 지루하고 오래 걸리고 하니까 누구한테 선물 하면 조금 부담스러워 하는 느낌이 있거든요? 근데 저는 하루 이틀이면 뜨니까 그렇게 고생스럽지 않아요. 근데 요새는, 몸이, 어깨가 너무 아파서 안 뜬 지 좀 됐어요. 한번 뜨면 멈출 수 없으니까. 〈중학생〉 뮤직비디오 찍을 때, 그 파란 목도리도 제가 직접 뜬 거예요. 중학교 때 제가 제일 잘하는 게 뭐였냐면, 장갑에 이렇게 이니셜을 넣는 거예요. 양쪽에. 이름이 “용성”이면 왼손등에 'Y', 오른손등에 'S' 이렇게. 중학교 때 학교에 일본 교환학생이 왔었거든요. 그 친구들을 만날 한국 학생들을 뽑았는데 제가 안 뽑힌 거예요. 근데 그게 너무 해보고 싶어서. 뽑힌 친구한테, 내가 장갑 떠줄 테니까 바꿔 달라고 하고. 결국 바꿨어요.(웃음) 예전에 아플 때도 뜨개질 많이 했어요. 그때는 누워서 영화 보는 거랑 인형 메이크업이랑 뜨개질 세 개 밖에 안했어요. 

뜨개옷을 입은 얘 
뜨개옷을 입은 얘 

🐮용성   뜨개질 말고 즐겨 하시는 것은
📸소라   뜨개질 말고는, 정리벽이 조금 있어요. 청소랑은 다른 자료 정리. 분류, 카테고리. 카테고리화가 안 되어 있으면 너무 힘들어요. 사진이 몇 만 장이 되거든요.
🐮용성   그 정도면 분류를 해놓아도 찾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웃음) 
📸소라   제가 기억력이 좋은 편이에요. 무슨 사진이 딱 떠오르면, 이거는 몇 년도 어디에서 찍은 거지, 하고 찾아내고 그래요. 저는 어릴 때부터 그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너는 과거에 집착해”
🐮용성   (웃음)  
📸소라   이 얘기를 진짜 많이 들었거든요. 과거 일들을 곱씹는 것을 되게 많이 하고. 저보다 어린 학생들은 저한테 할머니네 집에서 할머니가 얘기해주는 걸 듣는 기분이라고. 어렸을 때는 “내가 과거에 너무 집착하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최근에 작업하는 방식도 과거 집착형으로 가고 있고, 음악 스타일도 옛날 음악 좋아하고. 근데 지금은 약간 받아들였어요. 과거에 집착하는 게 제 내러티브다. 나의 개성이다. 사진 잘 찾는 것은 나의 장기다.
🐮용성   장기 맞는 것 같아요.
📸소라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죠, 지금은. 그게 약간 취미… 취미에서 약간 강박으로 넘어간달까.
🐮용성   (웃음) 알겠습니다. 인터뷰는 여기까지.

얘는 '야'입니다.
얘는 '야'입니다.
얘는 '얘'입니다.
얘는 '얘'입니다.
'얘'랑'야'입니다.
'얘'랑'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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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용성


📺오소리뉴스📺

🐮천용성 @yongsung000

[음반] 5. 26(수) - 6. 16(수), 천용성 2집 《수몰》 발매 후원 텀블벅

[공연] 6. 26(토) / 6. 27(일), 상상마당(홍대), 천용성 2집 《수몰》 쇼케이스

🐚전복들 @cosmic_abalone

[공연] 6. 26(토), 클럽 헤비(대구), 조제해시 EP 발매 기념 공연 ― 그밤그밤그밤

😙후하 @hoohaa.seoul

[공연] 6. 19(토) / 6. 20(일), 채널1969(연남), 《Spring》 쇼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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