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슴을 닮은 그녀
홍 군이 핸드폰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묻는다.
"이거 누구 닮은 것 같지 않아?"
지안이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한다.
"글쎄....?"
그는 다시 딸, 소은이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묻는다.
"이거 봐. 누구 닮은 것 같아?"
"음.... 엄마?"
홍 군은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이 푸하하 웃는다. 곁에 있던 지안이가 말을 덧붙인다.
"사실은 나도 엄마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말은 못 했어."
홍 씨 트리오의 태도와 대화가 영 달갑지 않다. 도대체 무슨 사진을 보고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평소에도 자주 날 두고 농담 따먹기를 하는 그들이다.
"우 씨, 또 뭔 사진을 가지고 그러는 거야?"
"잠깐만, 내가 카톡으로 보내줄게."
곧 카톡으로 "두 눈을 끔뻑거리며 멍을 때리고 있는 사슴 한 마리"가 전송되었다.
"아니, 이게 뭐야?"
"잘 봐. 자기가 멍 때릴 때랑 완전 똑같아. 이 사진 보자마자 딱 자기가 떠올랐다니까."
"아.... 그래...."
그나마 사슴이라서 다행인 건가?
나는 사슴의 멍~한 모습을 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먼 산을 바라보는 눈빛과 앙다문 입이 정말 나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착하게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진한 쌍꺼풀에 축 cj진 눈꼬리는 그야말로 "절대 나쁜 짓 할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풍겼다. 초등학교 시절엔 그런 어른들의 말이 좋았다. 착하다는 말은 최고의 칭찬이었고, 정말로 나는 착한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착하게 생겼다"는 말이 싫어지기 시작한 건 사춘기 때였다. 이름도 선량인데 생긴 것까지 착하게 생기다 보니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혼나는 게 무서워, 하기싫어도 억지로 시키는 일을 했고, 아빠에게 밉보이는 게 무서워서 불만이 있어도 꾸욱 참았다.
나보다 2살 많은 정이 언니 역시 진한 쌍꺼풀에 cj진 눈을 가졌다. (가족 내력이라서 진이 언니, 연이 언니, 정이 언니, 나, 그리고 동생 윤이까지 모두 진한 쌍꺼풀에 cj진 눈을 가졌다) 하지만 언니는 착하다는 말보다 "야무지고 똑 부러진다"는 말을 곧잘 들었다. 언니는 셋째 딸답게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고 했다. 할아버지에게도 곧잘 대들었고, 무섭기만 했던 아빠에게도 따박따박 말대답을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자주 혼났다.
한 번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늦게 들어온 언니를 향해 할아버지가 쓴 소리를 했다. 어디서 나쁜 짓 하다가 이제 들어왔냐며 가방 검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가방에 담배 같은 나쁜 것이 있는 것 아니냐며 언니를 의심했다. 억울했던 언니는 할아버지에게 큰소리로 대들며 싸웠다. 언니의 가방엔 책만 있었고, 머쓱해진 할아버지는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만약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줄줄 눈물이나 흘리고 있었겠지....
정이 언니가 옳은 소리, 바른 소리를 하면 할수록 어른들은 언니를 어려워했다. 지금도 아빠에게 잔소리를 하고, 엄마에게 잘 하라고 말하는 언니는 정이 언니다. 정이 언니는 불같은 아빠의 성격을 쏙 빼닮았다. 아빠는 그런 언니를 가장 어려워하면서도 가장 신뢰한다. 나는 어른들에게 할 말은 하는 정이 언니의 깡다구가 몹시 부러웠다.
요즘은 '착해 보인다'는 말이 '바보처럼 보인다'는 말로 종종 사용된다. 다른 말로 하면 '등쳐먹기 좋아 보인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여지기 싫어서 남편에게 눈꼬리를 위로 살짝만 올려주는 시술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 지금처럼 흐리멍텅하고 바보 같은 눈은 사라질 거라고. 그러면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래서 좋아한 건데~"
남편의 외모는 나와 정반대이다. 쌍꺼풀도 없고, 가늘고 날렵한 눈매는 강한 인상을 풍긴다. 무언가에 집중하느라 인상을 쓰고 앉아있으면 화가 나 보인다. 웃지 않으면 쉽게 다가가기 힘든 얼굴이다. 한마디로 착한 외모는 아니다.
그런 외모 때문인지 같은 회사의 상사들도 남편을 대하는 걸 조금 어려워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인상을 좀 펴! 자기는 가만히 있으면 무서워. 고객 만날 땐 일단 웃어! 안 웃으면 화나 보여!"
가만히 있으면 맹~해 보이는 나와 가만히 있으면 화~나 보이는 그가 여전히 함께 잘살고 있으니, 겉으로 보이는 외모가 다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두 달 전쯤,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염색했다. 새치가 워낙 심해 두 달에 한번 염색을 하지 않으면 백발이 된다. (아.... 슬프다....)
진한 갈색, 연한 갈색, 아주 연한 갈색.... 그 사이로 미쳐 염색되지 않은 하얀색 머리카락까지. 다양한 색깔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염색 되어 햇빛에 비취면 휘황찬란한 갈색 머리카락이 된다. 갈색이 지겨워 검은색으로 염색을 하고 나타났다. 그 후부터 홍 군이 나를 이렇게 부른다.
"프란체스카!!"
홍 군은 날 놀리는 재미로 사는 게 분명한 것 같다. 날렵한 눈매 뒤에 숨어있는 그의 장난끼는 나와 아이들만 아는 사실이다.
조심해, 어느 날 도끼 들고 나타날지도 모르니.
이 글의 결론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이다.
2. 그가 놀란 이유
요즘 매일 1시간 이상 땀을 흘리며 걷고 있다. 너무 더워서 뛰지는 못한다. 물론 내 곁으로 숨을 헐떡이며 뛰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난 꿋꿋하게 파워 워킹으로 걷는다. 매일 만 보를 채우며 걷는 이유가 건강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정이 언니가 알려준 "뉴발란스 어플과 스트라바 어플을 연동시켜 운동을 하면 포인트가 적립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열심히 포인트를 적립시켜 내년 여름에 한국에 가면 뉴발란스 운동화를 살 계획이다. 마찬가지로 국민은행 어플에도 걷기 포인트가 있다. 국민은행 어플은 일주일 단위로 포인트 적립이 가능하다. 일주일에 3만 5천 걸음을 걸으면 50포인트가, 7만 걸음을 걸으면 100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지난 주에도 지지난 주에도 6985보에서 멈추는 바람에 100 포인트를 얻지 못한 게 너무 아깝다..... (그래봤자 50원, 100원인데 말이죠) 그리고 또 하나, 토스뱅크 어플에서도 걷기에 따라 포인트를 적립할 수 있다. 토스뱅크 어플에서는 만 보 걷기 말고도 다른 포인트를 적립할 수 있는 혜택이 있는데 2년 동안 열심히 모아서 내년 여름에 한국 가면 포인트를 쓸 계획이다. (1년 동안 겨우 3천 포인트 모았.....)
이런 사소한 포인트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우리 큰고모 때문이다.
큰고모는 알뜰살뜰한 분으로 서울 서강대 근처 아파트에 사신다. 약 50년 전 아무것도 없이 서울로 상경해서 힘들게 힘들게 사시다가 지금은 다섯 자식들 모두 결혼 장가보내고 고모부와 편하게 노후를 보내신다. 그런데 그 고모가 토스뱅크 포인트를 모아서 작년에 식탁을 바꿨다. 70이 다 된 나이에도 웃음치료사로 강의를 하고, 일이 끝나면 이대와 서강대 근처를 열심히 걸어 다니며 토스 포인트를 모으더니 그걸로 이런저런 살림살이를 바꾸는 것이 아닌가? 1포인트, 2포인트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는 큰 고모를 보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한국에 들어가지 않는 2년 동안 여기서 열심히 포인트를 모으리라!!
그날도 어김없이 땀을 흘리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뒤쪽에서 나에게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Good evening?"
그러더니 다짜고짜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Are you from china?"
뭐, 한두 번 들어본 말도 아니라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인도 또는 방글라데시 쪽의 사람처럼 보이는 남자가 역시 땀을 흘리며 걷고 있었다.
"No!"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약간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가 내 얼굴을 보더니,
"Oh, Sorry!"
하고 앞으로 막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뭐가 sorry 하다는 것일까? 말을 걸어서 미안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중국인이냐고 물어봐서 미안하다는 것일까?
저녁 9시가 다 되어 홍 군과 아이들이 공원으로 나왔다. (나는 저녁 7시 30분에 나와서 아직도 걷는 중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뒷모습 보고 말 걸었는데, 앞모습 보고 놀라서 미안하다고 한 걸까?"
내 말을 듣더니 아이들이 웃으며 말했다.
"엄마, 뒷모습이 20대 같긴 해."
아이들의 말에 홍 군이 말을 더했다.
"어디, 앞으로 가서 걸어 봐. 뒷모습 좀 보여줘 봐."
나는 팔을 앞뒤로 흔들며 열심히 앞으로 걸었다. 아이들과 남편이 내 뒷모습을 보며 깔깔 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 앞으로 와서 내 앞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닌가?
"맞네! 뒷모습 보고 말 걸었는데 앞모습 보고 놀랐네!"
그러고 보니 검게 염색한 머리 아래로 하얀 새치가 올라오는 중이었다. 뒤에선 보이지 않지만, 앞에선 훤히 보였다.
"아, 내가 잘 못 했네. 내 잘못이네!!"
역시, 홍 군과 아이들은 날 놀리는 재미로 사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날 이 만 보를 걸었다.....
늦은 밤, 선선하게 부는 밤바람이 땀을 식혔다. 봉긋이 떠오른 보름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공기 사이로 모기떼가 몰려들었다. 온몸을 벅벅 긁으며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말했다.
"다시는 밤에 운동 안 할 거야!!!!"
3. 선량한 사람들
오늘의 계획은 노트북을 들고 스타벅스에 가서 여유롭게 글을 쓰고 밀라노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집 근처에도 카페가 있긴 하지만, 죽치고 앉아서 글을 쓰기엔 눈치가 보이거든요. 오랜만에 글도 쓰고, 사진도 찍고, 친구도 만날 겸, 겸사겸사 시내로 나들이를 나갔습니다.
밀라노 리저브 스타벅스는 밀라노에서 가장 큰 매장이에요. 이곳에서 로스팅 한 커피는 유럽 전 지역으로 보내진다고 해요. 이곳 매장에는 엄청나게 큰 로스팅 기계가 있습니다. 그걸 보는 재미도 쏠쏠해서 여행객들의 성지가 되었지요. 리저브 매장에서 파는 굿즈도 꽤 인기가 있는데요, 밀라노가 새겨진 텀블러나 컵은 여행객들의 손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갈 때마다 사람이 넘쳐납니다. 더욱이 더운 여름에 시원한 커피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니, 이른 오전 시간부터 사람이 붐빌 수밖에 없지요.
오늘도 마찬가지였어요. 10시에 스타벅스에 갔는데 이미 매장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달달하고 시원한 커피를 시켜서 한쪽에 앉아 홀짝였어요. 밀라노에 20년 넘게 살고 있는 선생님을 만나 수다도 떨었지요. 노트북을 가슴에 꼭 껴안고 말이죠.
2시간 동안 수다를 떠니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스타벅스 리저브에서 두오모 광장까지는 걸어서 단 5분 거리에요. 걸어서 두오모 광장을 지나 선생님이 안내해 준 식당으로 갔습니다. 사실, 두오모 광장 근처에서 밥을 먹는 건 모험이에요. 가격도 비싸고, 그리 맛있지 않거든요. 하지만 이곳에 20년 넘게 산 언니는 맛있는 식당을 잘 알고 있었지요.
식당에 가서 메뉴를 달라고 했어요. 역시나 피자도, 파스타도 다른 식당보다 비싸더군요. 그런데 저희에게 준 메뉴판과 다른 이탈리아 사람에게 준 메뉴판이 달랐습니다. 그걸 눈치챈 선생님이 직원을 불러 물었어요.
"점심 메뉴(Pranzo menu) 있어?"
그제서야 새로운 메뉴판을 주었습니다. 거기엔 오늘의 점심메뉴가 있었는데요, 세상에나, 가격이 절반 가격이었어요. 거기에 커피와 물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아침(Colazione), Pranzo(점심), Aperitivo(식전), Cena(저녁) 메뉴가 있어요. 식당마다 다르지만, 점심 메뉴는 조금 더 저렴한 가격으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있지요. 현지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방법이지요. 저희 두 사람을 보고 여행객으로 알았던 식당 직원은 일반 메뉴판을 주었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저희는 그 차이를 눈치챌 수 있었지요.
선생님과 맛난 점심을 먹고, 시원한 크레마 알 카페까지 먹고, 두오모 광장에 가서 여행객처럼 사진도 찍었습니다. 날은 몹시 더웠지만, 기분은 정말 상쾌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무겁게 들고 온 노트북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뭐, 어쩌겠어요? 오늘은 글을 쓰는 대신 재미있는 대화와 맛있는 음식, 좋은 시간을 남겼으니 이 또한 제 일상의 패턴에 새로운 무늬를 남긴 것이겠지요.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른 무늬가 있지요. 그걸 발견할 때 내 삶이 조금 더 흥미로워지는 것 같아요.
다음 주는 벌써 7월의 마지막 주입니다.
7월 한 달 동안 더위와 폭우로 힘드셨을 텐대데,
그 시간을 잘 이겨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다시 만나요!!
Da, Mil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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