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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지_2026

26년 3월호

다시 보고 싶은 공간과 없어도 불러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2026.03.31 | 조회 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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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동, 시간이동 기술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아직 개발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만들어지기 어려울 수 있지만 우리의 상상 속에서는 언제나 벌어지고 있죠. 지난주에 먹었던 마라샹궈를 다시 먹고 싶을 수도 있고, 처음 봤던 영화나 책의 감동을 다시 느껴보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죠.

 

지금 당장 내가 상상하는 공간이 바로 앞에 펼쳐진다면 어떨까요?

이 공간은 24시간 동안만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해 줄 거예요.

이미 없어진 공간도, 그리고 부르고 싶은 어떤 사람까지도요!

 

이번 호에서는 그런 공간과 사람들,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공간에 담긴 이야기를 잘 따라와 주세요!


1

뜨개방의 규칙 : 다 뜨면 가차없이 내보내진다.

 

여기는 동대문 종합상가 옆에 있는 어떤 5성급 호텔입니다. 아늑한 침대와 맛있는 간식, 그리고 좋은 음악이 저를 기다리고 있죠. 저는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뜨개실을 샀습니다. 아주 많이요! 소재와 색상이 다양한 뜨개실을 제 몸만 한 바구니에 담아서 들고 왔어요.

 

이 호텔방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어요. 바로 호스트인 저를 제외한 손님들은 오직 제가 뜨개질을 하는 동안만 이 방에 머무를 수 있어요. 뜨개질할 작품은 손님들에게 선물할 것들이랍니다. 그러니 선물이 다 완성되면 가차 없이 이 방에서 나가야 해요! 그럼, 지금부터 손님과 각자에게 어울리게 만들어줄 작품을 소개해 드릴게요.

 

먼저 초대할 친구는 저와 함께 밴드를 보러 다니는 친구예요. 지금은 각자 바빠서 많이 보지는 못하지만, 몇 달에 한 번이라도 꼭 만나고 있어요. 주로 ‘제비다방’이라는 카페 겸 공연장에서 만나고, 서로 할 일을 하는 ‘각할모’를 하기도 해요. 봄의 연두색과 분홍빛이 잘 어울리는 이 친구에게는 모티브(조각)를 이어 만든 가방을 선물해 주고 싶어요. 흰색과 연분홍색의 프릴을 가방 테두리에 달고, 모티브는 별이나 하트를 떠서 만들어볼 거예요. 진한 분홍색으로는 벚꽃을, 흰색으로는 장미꽃을 만들어서 장식해줄 거예요.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친구인 만큼, 사랑스러운 가방을 만들어주고 싶네요. 이 친구는 제가 사는 지역과는 멀리 있는 곳에 살고 있어서, 언젠가 제가 그 친구가 사는 지역에 놀러 간다면 가게 될 여행 계획을 같이 이야기해볼 거요.

 

가방은 7시간이면 뜨겠죠? 그럼, 친구의 손에 가방을 들려주고 보냅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손님은 영원과 다윤입니다. 영원은 서울에 살고 있고, 다윤은 지난 25년도 11월에 하늘의 별로 돌아간 사람이에요. 저는 다윤을 딱 한 번 봤지만, 영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용감하고 따뜻한, 그리고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해요. 두 사람은 서로 통하는 게 많았다고 해요. 다윤이 한국을 떠난 후에도 서로 자주 연락했다고, 영원은 말했어요. 

 

남은 실은 분홍색과 하늘색, 그리고 흰색이네요. 마침, 3/31일이 트렌스젠더 가시화의 날이니 이 색들을 조합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봐도 좋겠어요. 음… 무적의 트랜스젠더 미소년 전투복! 어떤가요? 한 사람은 하늘색, 한 사람은 연분홍색을 테마로 한 망토를 만들어줘야겠어요. 각 망토에는 흰색 실로 각자의 이름을 자수로 놔줄 거예요. 그리고 흰색의 실로 하나하나 디테일이 살아있는 하트모양 마법봉까지 만들어주면 어디에든 어울리는 전투복이 완성! 두 사람이 함께 있다면 무적의 트랜스젠더가 될 거예요 (실제로 둘 다 젠더변환이임). 대사는 ‘이 세계의 혐오를 막기 위해, 이 세계의 차별을 막기 위해…’ 정도가 좋겠네요. 이 사람들이 온다면 같이 상황극을 할 것 같아요. 재미있는 퀴어-토크가 되겠네요. 

 

15시간 정도면 망토와 마법봉 모두 뜰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두 사람에게 망토를 잘 입혀 보내고, 손에 마법봉을 들려준 뒤, 저는 남은 시간을 온전히 제 뜨개 작품을 만들기 위한 시간으로 쓰겠어요. 무엇이 탄생할지는 모르지만, 뭐라도 나오면 된 거 아닐까요?

 


2

온종일

 

내 세월이 겹겹의 주름처럼 쌓인 공간에 너를 데리고 와. 이제는 가게 앞 작은 간판을 지나치지도 않고 네게 자랑스럽게 안내를 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네가 좋아하는 우주처럼 신비로운 음악이 작은 공간을 가득 메워. 처음 왔을 때 생각보다 작은 공간에 당황했던 기억이 나. 창가 자리에 짐을 둔 우리는 몇 발자국 앞의 카운터로 걸어가. 나는 레몬파이와 계절의 이름을 가진 커피를 주문해. 커피를 잘 못 마시는 너는 고민을 하다 카페인이 없는 다른 음료를 시켜. 사장님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주문을 받고는 자리로 갖다 주겠다고 이야기해. 얕게 지으신 미소가 그리웠어. 자리로 돌아가 우린 잠시 바깥을 바라봐. 반투명 천이 있어 밖과 안이 분리된 느낌이야. 쌩쌩 달리는 차들의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려. 풍경이랄 게 없는 곳이지만 나는 이것도 나쁘지 않아. 너를 이곳에 데리고 올 수 있어 기뻐. 있잖아, 나는 여기서 종종 책을 읽곤 해. 전에 두 시간 거리인 집까지 걸어간 적이 있어. 하늘이 파랗고 나비가 꽃 주위를 힘차게 날아다니던 날이었어. 그러다 폰이 방전돼 길을 잃었다? 그날은 바나나 푸딩을 먹었어. 겨울에만 파는 보니밤을 꼭 먹어보고 싶어. 겨울에 다시 오자. 자연스레 같이 간 독립서점에서 구매한 책을 한 권씩 꺼내들어. 네가 고른 책을 나도 읽고 싶었어. 언젠가 바꿔 읽자 약속해. 사장님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 멈춰. 마들렌은 서비스예요. 우린 레몬파이와 마들렌을 조각내어 한차례 나눠먹고는 한참을 책 읽는 데에만 몰두해. 정적이란 단어는 쓸쓸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 고요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겠다. 남은 반절은 아껴 읽고 싶어졌어. 책을 덮고 너를 흘끗 바라봐. 너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책은 너를 고요하게 할 수 있을까. 책 앞면에 끼워둔 엽서를 꺼내. 네게 엽서를 써야겠다. 조금은 진부하게 네 안부를 물어. 안녕, 오늘 하루는 어땠어? 

 


3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햇빛은 기분 좋을 정도로 따사롭게 내리쬐고 거기다 머리칼을 살랑이는 바람까지. 인적 없는 고요한 돌담길을 당신과 걸으니 무언가 설레는 시작입니다. 각자의 보폭대로 걷다 상대가 버거워하는 것을 인지할 때면 넌지시 말을 건넵니다. “제가 좀 빠른가요?” 그때 상대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표정 변화를 알아채곤 속도를 늦춰 둘의 호흡을 비슷하게 만들어 봅니다.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묻어나는 발걸음은 언제나 따스합니다. 속도를 맞추려는, 어쩌면 수고스러운, 이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이 나와 잘 맞을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돌담 너머 보이는 바다는 잔잔하게 파도가 칩니다. 멀리서 보고 있기에 부드럽게 물살이 넘실거린다고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가까이 다가가면 물방울이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사투를 매 순간 하고 있을 겁니다. 비단 나와 다르지 않음을 느낍니다. 속에서 하고픈 말이 들끓습니다. 상대와 속도를 맞추려 간간이 질문했던 때 말곤 고요함이 가득했던 둘 사이. 이제는 편안했던 적막감을 깨고 말을 꺼내 봅니다. “제가 최근에 또 한 번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데요, 이전엔 스스로 길을 찾아갔었는데 이번에는 도통 그 길을 모르겠어서요. 먼저 겪어본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 싶었어요. 당신은 살아있음을 느끼시나요?”

 

“살아있음이라…저는 우선 저답게 살고 있을 때 살아있다고 느껴요. 그리고 그런 면에서 저는 다행히도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목소리는 단단합니다. 언뜻 산뜻했던 것도 같습니다. 대꾸하고 싶은 말이 입안을 가득 맴돕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어째서요? 어떻게 그렇게 되셨나요? 얼마나 걸리던가요? 힘겨울 때는 없으셨나요? 그럴 땐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개중에 말을 고릅니다. 아니, 고르려고 했습니다. 평소의 나라면 으레 그랬을 터입니다.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아뿔싸, 이미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마음에 걸릴 거 없는 말이니 놀랐던 마음을 조금 추스른 채 상대의 답을 기다립니다.

 

“.......”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묻혀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나에겐 입 모양을 읽을 기회가 있으니까요. 아, 어떡하죠. 입 모양을 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함께 걷는 순간이 따스해서 정처 없이 발이 닿는 대로 걸었더니 바다에 다다른 걸 미처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모래사장에 발은 푹푹 빠지고, 귓가엔 파도 소리가 가득하니 상대의 말이나 입에 집중할 겨를이 없습니다. 뭐라고 말했을까 궁금하지만 일단 내 몸 하나 넘어지지 않게 집중해야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물어야겠다 다짐하면서 앞으로 성큼 발을 떼봅니다. 왠지 이전보다 모래가 폭신해진 것 같다 느끼며 또 하염없이 걷습니다.

 

 상대와 나누는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벌써 달이 떴습니다. 이제 집에 가야겠습니다.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맞닿게 꼭 껴안아 인사하고는 각자의 방향으로 돌아섭니다. 떠오른 달 한 번, 남은 길 한 번, 주변에 피어난 꽃 한 번 번갈아 보며 느긋이 걸어갑니다. 이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오늘 나눈 이야기를 언젠가 잉크에게도 들려줄 날이 오면 좋겠다 생각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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