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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옥수수 밭에서 시작된 이론이 지금도 통하는 이유

기술의 속도는 바뀌었지만, 사람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구조는 바뀌지 않았어요.

2026.04.12 |
from.
Kwangseob

들어가며

구독자님, 하나 재밌는 질문을 던져볼게요. 1940년대 미국 아이오와주 옥수수 농부들과 2026년 AI를 도입하려는 기업 임원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둘 다 "이게 좋은 건 알겠는데, 나는 좀 더 지켜보겠다"고 말했어요.

지난주 딜로이트가 발표한 2026 State of AI in the Enterprise 보고서를 보면, 기업의 88%가 AI를 하나 이상의 업무에 사용하고 있다고 답했어요. 그런데 같은 보고서에서, 실제로 파일럿 단계를 넘어 조직 전체로 확장한 기업은 40% 미만이에요. PwC의 2026 글로벌 CEO 서베이에서는 더 솔직한 숫자가 나와요. CEO의 56%가 AI 투자에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고 답했거든요.

기술은 넘쳐나는데, 확산은 멈춰 있는 이 현상. 1991년에 나온 한 권의 책이 이걸 정확히 설명하고 있어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게요.

옥수수 밭에서 태어난 확산 이론

캐즘(chasm)이라는 단어는 원래 지질학 용어예요. 땅이나 얼음이 갈라져 생긴 깊은 균열을 뜻하죠. 이 단어가 경영학과 마케팅의 핵심 개념이 되기까지는, 의외의 출발점이 있어요. 옥수수 밭이에요.

1941년,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의 사회학자 브라이스 라이언(Bryce Ryan)과 대학원생 닐 그로스(Neal C. Gross)는 흥미로운 연구를 시작해요. 당시 아이오와주에는 기존 품종보다 수확량이 약 20% 높고, 가뭄에도 강한 개량 옥수수 종자(하이브리드 종자)가 보급되고 있었어요. 1928년에 개발된 이 종자는 객관적으로 우월했지만, 농부들의 수용 속도는 생각보다 느렸어요.

라이언과 그로스는 아이오와주 두 개 농촌 커뮤니티의 농부 257명을 직접 인터뷰해요. 그리고 놀라운 패턴을 발견하죠. 새 종자에 대한 정보를 들은 시점은 농부들 사이에서 크게 차이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실제로 채택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최대 7년 차이가 났어요. 초기에는 종자 회사 영업사원의 설명이 주요 정보 경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웃 농부의 경험담이 결정적 역할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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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943년 논문[1]​은 이후 사회학의 판도를 바꿔놓아요. 1962년, 오하이오 주립대의 사회학자 에버릿 로저스(Everett Rogers)가 이 연구에서 영감을 받아 Diffusion of Innovations(혁신의 확산)을 출간하거든요. 로저스는 사회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술이 퍼져나가는 과정을 다섯 그룹으로 나눴어요.

  • 혁신가(Innovators): 전체의 2.5%. 기술 그 자체에 매료되는 사람들
  • 선각수용자(Early Adopters): 13.5%. 기술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보는 비전가
  • 전기다수(Early Majority): 34%. 검증된 제품을 원하는 실용주의자
  • 후기다수(Late Majority): 34%. 주류가 된 후에야 움직이는 보수적 사용자
  • 지각수용자(Laggards): 16%. 변화를 마지막까지 거부하는 그룹

이 모델은 라디오, TV, 전화 등 20세기 주요 기술의 확산을 잘 설명했어요. 수용자 그룹이 순차적으로 넘어가면서 S자 곡선을 그리며 시장이 포화에 도달하는 패턴이었죠. 수십 년간 이 모델은 거의 공식처럼 통했어요.

그런데 1980년대, 이상한 일이 벌어져요. 컴퓨터, 소프트웨어 같은 정보기술 제품들이 선각수용자에서 전기다수로 넘어가는 구간에서 갑자기 수요가 뚝 떨어지는 현상이 반복된 거예요.

영문학 박사가 발견한 균열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제프리 무어(Geoffrey A. Moore)예요. 그런데 무어의 이력은 좀 의외예요. 스탠퍼드에서 미국문학을 전공하고, 워싱턴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거든요. 4년간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다가, 실리콘밸리로 건너와 기술 기업의 영업·마케팅 현장에 뛰어들었어요. 이후 실리콘밸리의 전설적인 마케팅 컨설팅 회사 레지스 매케나(Regis McKenna Inc.)에서 파트너로 일하면서 수많은 하이테크 기업의 시장 진입 전략을 수립하게 돼요.

무어가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목격한 장면이 있었어요. 신제품을 만든 개발팀은 기술의 우수성에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대다수 직원은 그게 뭔지조차 모르는 상황. 더 흥미로운 건, 소비자가 느끼는 제품의 장점과 개발팀이 생각하는 장점이 전혀 달랐다는 거예요.

무어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91년 Crossing the Chasm(캐즘을 넘어서)을 출간해요. 처음에 출판사는 5,000부 정도 팔릴 거라 예상했는데, 누적 판매량 100만 부를 돌파하며 하이테크 마케팅의 바이블이 됐어요.

무어의 핵심 발견은 이거예요. 로저스의 매끈한 종 모양 곡선 사이에는 균열(crack)이 여러 개 있는데, 그중 선각수용자와 전기다수 사이의 균열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것. 이걸 캐즘이라 불렀어요.

왜 이 지점에서 균열이 생길까요? 선각수용자(얼리어답터)와 전기다수의 구매 심리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에요.

선각수용자는 비전가예요. 기술이 아직 불완전해도 그 가능성에 베팅하고, 직접 부딪히며 맞춰갈 의향이 있어요. 반면 전기다수는 실용주의자예요. "이미 검증된 사례가 있는가?", "나와 비슷한 업종에서 쓰고 있는가?", "완성된 제품인가?"를 따져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선각수용자의 추천을 실용주의자는 참고하지 않아요. 비전가의 성공담은 실용주의자에게 "저건 특수한 경우"로 읽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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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즘을 건너는 네 가지 방법

무어는 이 깊은 균열을 건너는 전략을 네 가지로 정리했어요. 33년이 지난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이에요.

첫째, 볼링핀 전략(Bowling Alley Strategy). 주류 시장 전체를 한꺼번에 공략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좁은 틈새시장을 골라서 그곳에서 완전한 제품(whole product)[2]​을 만들어 지배하는 거예요. 볼링에서 첫 번째 핀을 정확히 쓰러뜨리면 나머지 핀도 연쇄적으로 넘어가듯이, 하나의 성공 사례가 인접 시장으로 확산되는 전략이에요. 테슬라가 2012년 고급 세단 시장(모델 S)에서 시작해 대중 시장(모델 3, Y)으로 확장한 경로가 대표적인 사례예요.

둘째, 인프라와 보완재 확충. 혁신 제품은 그것만으로는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실용주의자는 완성된 생태계를 원하거든요. 테슬라가 전기차를 팔면서 동시에 슈퍼차저 충전소 네트워크를 직접 구축한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2016년 한국 진출 당시 수십 개였던 충전소가 지금은 수백 개를 넘겼죠.

셋째, 사실상 표준(de facto standard)의 확보. 실용주의자는 시장점유율이 높은 제품을 선호해요. 미래에도 업그레이드가 보장될 거라는 안심이 필요하거든요. 테슬라가 2014년 전기차 관련 특허를 전면 공개한 것은 기술적 이타심이 아니라, 전기차 생태계 자체를 키워서 자사 표준의 영향력을 넓히려는 전략이었어요.

넷째, 브릿지 제품 활용. 기존 제품에서 혁신 제품으로 넘어가는 중간 다리를 놓는 거예요. 소비자의 거부감을 줄이고 학습 효과를 제공하죠. 저사양·저가격 모델이 이 역할을 할 수 있어요. 테슬라의 모델 3가 모델 S 대비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출시되어 전기차 진입 장벽을 낮춘 것이 이 전략에 해당해요.

오스왈드의 시선

캐즘 이론의 진짜 가치는 "균열이 있다"는 발견보다 "왜 선각수용자의 성공이 주류 시장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가"를 구조적으로 설명한 데 있어요.

지금 AI 시장이 정확히 이 지점에 있다고 저는 봐요. 2025년 글로벌 기업의 생성형 AI 지출은 370억 달러에 달했어요. 전년 대비 3.2배 성장이에요(Menlo Ventures, 2025). 그런데 MIT의 GenAI Divide 보고서에 따르면, 생성형 AI 파일럿 프로젝트의 95%가 실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돈은 쏟아붓고 있는데, 다수의 조직에서 실질적 성과로 전환되지 않는 거예요.

이건 전형적인 캐즘이에요. AI에 열광하는 혁신가·선각수용자 계층(개발팀, CTO, AI 전담 조직)은 이미 움직이고 있지만, 전기다수에 해당하는 현업 부서, 중간관리자, 실무 조직은 "검증된 사례"와 "완전한 제품"을 요구하며 관망하고 있어요.

무어의 프레임워크를 AI에 대입해보면 이런 그림이 나와요.

  • 볼링핀 전략: AI를 조직 전체에 뿌리지 말고, 하나의 구체적 업무(예: 코드 리뷰, 고객 문의 분류)에서 완전한 성과를 만든 뒤 확산하는 것
  • 보완재 확충: AI 모델만 도입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 파이프라인·거버넌스·교육 프로그램이라는 생태계를 함께 구축하는 것
  • 사실상 표준: 사내 AI 활용의 공통 언어와 평가 기준을 먼저 만드는 것
  • 브릿지 제품: 처음부터 에이전트형 AI가 아니라, 기존 워크플로우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AI 보조 도구(코파일럿형)로 진입 장벽을 낮추는 것

1943년 아이오와 농부들이 이웃의 밭에서 하이브리드 옥수수가 실제로 잘 자라는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종자를 바꾼 것처럼, AI의 캐즘을 넘기 위해서도 필요한 건 더 뛰어난 모델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이게 실제로 작동했다"는 검증된 레퍼런스예요.

33년 전 이론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간단해요. 기술의 속도는 극적으로 빨라졌지만, 사람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심리적 구조는 1943년이나 2026년이나 같기 때문이에요.

마치며

캐즘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와 신뢰의 문제예요. 선각수용자는 가능성에 베팅하고, 실용주의자는 증거를 요구해요. 이 간극을 메우는 건 더 나은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완벽한 성공 사례예요.

AI를 도입하는 조직이든, 새로운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팀이든, "모두에게 좋은 제품"을 만들려는 유혹을 이겨내고 단 하나의 핀을 정확히 쓰러뜨리는 것. 1991년에 나온 이 조언은 2026년에도 여전히 가장 실용적인 전략이에요.

참고자료 & 더 읽기

핵심 출처

배경 지식

 

 

각주

  1. [1] Ryan & Gross (1943) 논문: 아이오와주 농부 257명을 대상으로 하이브리드 옥수수 종자의 수용 과정을 연구한 논문이에요. 혁신 확산 연구의 기원으로 평가받아요. 에버릿 로저스가 이 논문에서 영감을 받아 혁신의 확산 이론을 체계화했어요.
  2. [2] 완전 완비 제품(Whole Product): 고객이 제품을 구매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한 상태를 말해요. 예를 들어 전기차라면 차량 자체뿐 아니라 충전 인프라, 정비 네트워크, 보험 상품까지 포함된 패키지를 의미해요. 제프리 무어는 캐즘을 넘기 위해서는 이 완전 완비 제품이 필수라고 강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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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안광섭은 세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이자 OBF(Oswarld Boutique Consulting Firm) 리드 컨설턴트이다. 대학에서 경영데이터 관리, 비즈니스 애널리틱스 등 데이터 분석을 가르치는 한편, 현장에서는 GTM 전략과 인공지능 전략 컨설팅을 이끌며 기술과 비즈니스의 접점을 설계하고 있다. AI 대화 시스템의 기억 아키텍처(HEMA) 연구로 학술 논문을 발표했으며, 매일 글로벌 AI 논문을 큐레이션하는 Daily Arxiv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KBMA와 기술경영전문대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지은 책으로 《생각을 맡기는 사람들: 호모 브레인리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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