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구독자님, 한 가지 질문을 드릴게요. AI를 업무에 쓰기 시작한 뒤, 정말로 퇴근이 빨라지셨나요?
저도 AI를 꽤 적극적으로 쓰고 있어요. 글도 쓰고, 리서치도 하고, 이것저것 정리도 하고요. 작업 하나하나는 확실히 빨라졌어요. 예전 같으면 한 시간 걸릴 일을 15분이면 끝내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퇴근 시간은 그대로예요. 오히려 좀 더 늦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저만 이런 건가 싶었는데, 올해 2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에 실린 연구 하나가 이 의문에 정면으로 답을 던졌어요. UC 버클리 하스 경영대학원의 아루나 랑가나탄 부교수와 싱치 매기 예 박사과정 연구자가 8개월 동안 미국의 한 기술기업을 추적 관찰한 결과인데요. 결론이 소름 돋아요. AI를 가장 열성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장 먼저 번아웃에 빠지고 있다는 거예요.
오늘은 이 연구와 160년 된 경제학 이론을 교차시켜, AI가 왜 우리를 더 바쁘게 만드는지, 그리고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 볼게요.
160년 전 석탄이 알려주는 것
이걸 이해하려면 먼저 1865년 영국으로 가야 해요.
당시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가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해요.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석탄 효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는데, 상식대로라면 석탄 소비가 줄어야 하잖아요. 같은 양으로 더 많은 일을 하니까요.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어요. 효율이 좋아지니까 석탄 사용 비용이 내려갔고, 비용이 내려가니까 공장을 더 짓고, 기차를 더 굴리고, 새로운 용도를 찾아냈어요. 석탄 소비는 오히려 폭증했죠.
이게 바로 '제번스 역설'[^1]이에요. 쉽게 말하면 고속도로를 넓히면 차가 줄어들 줄 알았는데, 더 많은 차가 몰려들어서 다시 막히는 것과 같은 원리예요. LED 조명이 보급되면서 오히려 조명 사용량이 늘어난 것도, 인터넷이 소통을 효율화했더니 커뮤니케이션 총량이 폭발한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그리고 이 160년 된 역설이 지금 다시 작동하고 있어요. 2025년 1월 DeepSeek 사태가 터졌을 때 마이크로소프트 CEO 사티아 나델라가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썼어요. "제번스 역설이 다시 작동하고 있다! AI가 더 효율적이고 접근 가능해질수록, 사용량이 치솟을 것이다." 석탄이 AI로 바뀌었을 뿐, 구조는 똑같아요.
그런데 제가 주목하는 건 나델라가 말한 '사용량'이 단순히 API 호출 횟수 같은 게 아니라는 점이에요. AI 사용량이 폭증한다는 건, 곧 우리가 하는 일의 양과 밀도도 함께 폭증한다는 뜻이거든요. UC 버클리 연구가 정확히 이걸 포착했어요.
8개월간 관찰한 'AI 파워유저'의 일상
이 연구의 설계부터 짚어볼게요. 2025년 4월부터 12월까지, 200명 규모의 미국 기술기업에 연구진이 주 2일씩 직접 들어갔어요. 내부 슬랙 같은 커뮤니케이션도 추적하고, 엔지니어링·프로덕트·디자인·리서치·운영 등 다양한 직군에 걸쳐 40건 이상의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중요한 건 이 회사가 AI 사용을 강제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엔터프라이즈 구독만 제공하고, 쓰고 싶으면 쓰라는 식이었어요. 그런데도 연구진이 발견한 패턴은 명확했어요. 직원들이 더 빠르게, 더 다양하게, 더 밀도 높게 일하고 있었고,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렇게 하고 있었어요.
연구진은 이 현상을 '업무 강화(Work Intensification)'[^2]라고 불렀어요. 업무 '시간'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업무 '밀도'가 올라가는 거예요. 같은 8시간을 일하는데 체감 피로도는 12시간급인 상태. 그리고 이 강화가 세 가지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났어요.
세 가지 강화 패턴: 할 수 있으니까, 멈출 수 없으니까, 관리해야 하니까
첫째, 업무 범위가 자발적으로 넓어져요.
PM이 AI를 써서 코드를 짜기 시작해요. 디자이너가 데이터 분석을 하고, 리서처가 엔지니어링 업무를 해요. 예전 같으면 다른 팀에 요청하거나 외주를 줬을 일을, AI 도움을 받아 직접 해버리는 거예요. 연구진은 이걸 AI가 제공하는 '인지적 부스트' 때문이라고 봤어요. 이전에는 넘지 못했던 지식의 빈틈을 AI가 채워주니까, '나도 할 수 있겠는데?' 하는 감각이 생기는 거죠.
문제는 이게 연쇄적으로 퍼진다는 거예요. PM이 AI로 짠 코드를 누가 검토하겠어요? 엔지니어에게 가요. 그런데 공식적인 업무 요청이 아니라 슬랙 스레드로, 자리로 직접 와서 비공식적으로 리뷰를 부탁하는 거예요. 이른바 'Vibe Coding'[^3] — AI에게 대충 방향만 주고 감으로 수정하는 방식 — 의 결과물을 진짜 엔지니어가 떠안는 구조가 되는 거죠. 한 사람의 능력이 넓어지면, 팀 전체의 업무 총량이 오히려 늘어나는 역설이에요.
둘째, 일과 삶의 경계가 무너져요.
AI의 대화형 인터페이스가 일을 시작하는 마찰을 극도로 낮춰버렸어요. 예전에는 작업을 하려면 프로그램을 켜고, 환경을 세팅하고, 자료를 찾는 준비 과정이 있었잖아요. 이게 사실 자연스러운 브레이크 역할을 했던 거예요.
그런데 AI는 프롬프트 하나면 돼요. 점심시간에 '이것만 물어보자', 회의 중에 '이것만 확인하자', 퇴근 직전에 '마지막으로 이것만'. 연구에서는 이 퇴근 전 '라스트 프롬프트'가 습관화되는 패턴이 빈번하게 관찰됐어요. AI에게 채팅하듯 프롬프트를 보내는 행위가 본인 입장에서는 '일'이 아니라 '대화'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경계 인식이 둔화돼요. 참여자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어요. 돌이켜보니 휴식 중 프롬프팅이 습관이 되면서, 쉬는 시간이 더 이상 회복감을 주지 않았다고요.
스마트폰이 '항상 연결된 상태'를 만들었다면, AI는 '항상 일하는 상태'를 만들고 있어요. 스마트폰 때는 메일 확인하고 답장 보내는 정도였다면, AI 시대에는 프롬프트 하나로 실제 작업을 진행시킬 수 있으니까요.
셋째, 관리해야 할 '열린 작업'이 쌓여요.
사람들이 AI를 '파트너'로 인식하면서 여러 작업을 동시에 돌리기 시작해요. 수동으로 코딩하면서 동시에 AI에게 대안 코드를 생성시키고, 백그라운드에서 또 다른 AI 에이전트를 돌리고, 예전에 미뤄뒀던 태스크까지 부활시키고. 결과는 끊임없는 컨텍스트 스위칭[^4]이에요.
연구 참여 엔지니어의 말이 핵심을 찌릅니다. AI로 생산적이 되면 시간을 아끼고 덜 일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같은 양 또는 그 이상을 일하게 됐다고요. 더 생산적이라고 느꼈지만, 덜 바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AI가 '비서'가 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결과물을 내놓는 신입사원이 된 셈이고, 당신은 그 신입의 관리자가 된 거예요.
자기강화 순환: 6개월 뒤의 함정
이 세 가지는 따로 작동하지 않아요. 하나의 순환 구조를 만들어요.
AI가 특정 작업을 가속시키면 → 속도에 대한 기대치가 올라가고 → AI 의존도가 증가하고 → 업무 범위가 확장되고 → 업무 밀도와 양이 동시에 늘어나고 → 늘어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다시 AI를 더 쓰게 돼요. 연구진이 이걸 '자기강화 순환'이라고 불렀어요.
처음엔 신나서 더 해요. "AI 덕분에 나 이렇게까지 할 수 있어!" 그런데 6개월 뒤에는 그게 기본이 되어 있어요. 업무량이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늘어나는 'Workload Creep'[^5] 현상이에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일이 '기본값'이 되어버리는 거죠. 그리고 이게 자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더 무서워요. 회사가 시킨 게 아니에요. 그래서 조직도, 개인도, 이게 과부하라는 걸 인식하지 못해요.
이건 UC 버클리 연구만의 발견이 아니에요. 다른 대규모 조사들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요.
Upwork Research Institute가 2024년에 미국·영국·호주·캐나다의 2,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AI를 사용하는 직원의 77%가 오히려 업무량이 늘었다고 답했어요. DHR Global의 2026 Workforce Trends Report에서는 직장인의 83%가 번아웃을 경험하고 있었고, 이 중 48%가 과도한 업무량을 원인으로 꼽았어요. 그리고 METR의 2025년 실험 연구에서는 숙련 개발자가 AI 도구를 사용했을 때 실제로는 작업 시간이 19% 더 오래 걸렸는데, 본인은 20% 빨라졌다고 인식했어요. '생산성 착시'가 측정으로 확인된 거예요.
한 가지 짚어둘게요. UC 버클리 연구는 200명 규모의 단일 기술기업 관찰이라서, 이걸 모든 산업에 바로 일반화하기는 조심스러워요. 연구진도 이게 아직 진행 중인 연구이고, 최종 학술지에 게재된 게 아니라 HBR 기고문 단계라는 점을 밝히고 있어요. 하지만 Upwork, DHR Global, METR 같은 독립적인 대규모 조사들이 전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패턴이 상당히 보편적일 가능성은 높아요.
그리고 한국은요. 솔직히 이게 더 심할 수 있어요. OECD 내에서도 장시간 노동 상위권이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인 조직 문화가 강하잖아요. AI가 '더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주는데, 그 감각이 한국의 노동 문화와 만나면 자발적으로 더 하게 되는 구조가 만들어지기 쉬워요.
오스왈드의 시선
솔직히 이야기하면, 저는 이 연구 결과가 놀랍지 않았어요. 오히려 "드디어 누군가 이걸 측정했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GTM 전략을 수립하면서 수없이 봐왔던 패턴이 있어요. 새로운 도구가 도입되면 '이걸로 뭘 더 할 수 있지?'가 먼저 나와요. '이걸로 뭘 안 해도 되지?'는 나중에야 나오고, 대부분 나오지도 않아요. AI도 똑같아요.
제가 특히 우려하는 건 '생산성 착시'예요. METR 연구에서 개발자들이 19% 느려졌는데 20% 빨라졌다고 느낀 것. 이건 개인 차원의 착각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의사결정을 왜곡할 수 있는 구조적 문제예요. 리더들이 AI 도입 효과를 '체감'으로 측정하면, 실제로는 팀이 과부하 상태인데도 "잘 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거든요.
지금까지 AI 도입 논의는 대부분 "어떻게 하면 더 잘 쓸까"에 집중되어 있었어요.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도구 선택, 워크플로우 설계. 이건 다 필요한 논의예요. 하지만 이 연구가 말하는 건 한 가지 빠진 질문이 있다는 거예요. "언제 멈출 것인가."
마치며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세 가지예요. AI는 업무를 줄이는 게 아니라 강화해요 — 속도도, 범위도, 밀도도 전부 올라가요. 이 강화가 자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조직도 개인도 과부하를 인식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조직 차원에서 AI 사용 규범(AI Practice)[^6]을 설계해야 해요.
연구진이 제안하는 AI Practice는 세 가지 축이에요. 중요한 결정 전 의도적으로 멈추는 Intentional Pauses, AI 알림을 배치 처리하고 집중 시간을 보호하는 Sequencing, AI 단독 작업 사이에 사람 간 대화를 확보하는 Human Grounding. 이건 개인의 루틴 이야기가 아니에요. 조직이 시스템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이번 주에 한 가지만 실험해 보시면 어떨까요. 하루 중 프롬프트를 보내지 않는 시간대를 하나 정해보세요. 점심시간이든, 퇴근 전 30분이든. 그 시간에 느끼는 감각이 — 불안한지, 해방감인지 — 자체가 하나의 진단이 될 거예요.
📎 참고자료 & 더 읽기
핵심 출처
- Ranganathan, A. & Ye, X.M. (2026), "AI Doesn't Reduce Work—It Intensifies It", Harvard Business Review. : 오늘 뉴스레터의 핵심 근거예요. 세 가지 강화 패턴과 AI Practice 개념이 여기서 나왔어요.
- METR (2025), "Measuring the Impact of Early-2025 AI on Experienced Open-Source Developer Productivity". : 숙련 개발자의 '생산성 착시'를 실험으로 증명한 연구예요. 19% 느려졌는데 20% 빨라졌다고 느낀 결과가 인상적이에요.
- Upwork Research Institute (2024), "AI-Enhanced Work Models: From Burnout to Balance" : AI 사용 직원 77%의 업무량 증가 데이터가 여기서 나왔어요.
- DHR Global (2025), "Workforce Trends Report 2026" : 직장인 83% 번아웃, 52% 몰입도 하락 등 대규모 서베이 데이터예요.
배경 지식
- Jevons, W.S. (1865), The Coal Question: An Inquiry Concerning the Progress of the Nation. — 제번스 역설의 원전이에요. 160년 전 석탄 이야기가 지금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고 싶다면 추천해요.
- NPR Planet Money (2025.02), "Why the AI world is suddenly obsessed with Jevons paradox". : 제번스 역설의 역사와 AI 연결을 가장 알기 쉽게 풀어놓은 글이에요.
관련 영상
📝 용어 설명
[^1]: 제번스 역설 (Jevons Paradox): 자원 사용 효율이 올라가면 소비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는 현상이에요. 고속도로를 넓히면 차가 줄어들 줄 알았는데, 더 많은 차가 몰려드는 것과 같은 원리예요.
[^2]: 업무 강화 (Work Intensification): 업무 시간이 아닌 업무 '밀도'가 올라가는 현상이에요. 같은 8시간인데 체감 피로도가 12시간급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3]: Vibe Coding: AI에게 대략적인 방향만 알려주고 코드를 생성시킨 뒤, 결과물을 감으로 판단하며 수정하는 코딩 방식이에요. 정확한 이해 없이 AI 출력에 의존하는 거죠.
[^4]: 컨텍스트 스위칭 (Context Switching): 서로 다른 작업 사이를 오가며 주의를 전환하는 것이에요. 인지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전환할 때마다 집중력 회복에 평균 23분이 걸린다고 해요.
[^5]: Workload Creep: 업무량이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늘어나는 현상이에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일이 '기본값'이 되어버리는 거죠.
[^6]: AI Practice: UC 버클리 연구진이 제안한 개념으로, AI를 언제·어떻게 쓰고·언제 멈출 것인지에 대한 조직 차원의 규범과 루틴이에요. 개인의 자기 조절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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