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구독자님, 6년 전에 투자한 스타트업 창업자를 만났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창업자는 자율주행이라는 복잡한 기술 문제를 풀기 위해 5년간 코드를 쌓았어요. 고유한 비즈니스 모델도 있었고, 기술적 해자[1]도 단단했어요. 그런데 투자 라운드를 준비하면서 투자자 덱을 펼쳐보니,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어요.
최근에 저도 GP를 운용하시는 분들이나 엔젤 투자를 하는 분들 몇분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는데 완전 투자 검토를 다시 하시거나 스타트업 투자 트렌드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어요. 아예 다음 라운드에서 가망 없는 곳들은 회수 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AI 관련 기업에 재투자하겠다고 이미 LP들 동의까지 받아 놓은 펀드들도 존재한다는 말도 들었구요. 이건 제가 보고 들은 이야기 뿐 아니라 최근 린 스타트업[2]의 창시자 스티브 블랭크가 최근 블로그에서 공유한 실제 이야기예도 있어요. 그가 내린 결론은 냉정해요. "2년 이상 된 스타트업 대부분은 이미 사업 계획이 무효화됐다." 오늘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이야기해 볼게요.
🌊 VC의 돈이 AI로 몰리고 있어요
먼저 숫자부터 볼게요. OECD가 올해 2월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전 세계 벤처 캐피탈 투자의 61%인 2,587억 달러(약 370조 원)가 AI 기업에 집중됐어요. 2022년의 30%에서 불과 3년 만에 2배로 뛴 거예요. 더 놀라운 건 그 안에서의 쏠림이에요. 메가딜(1억 달러 이상 투자)이 전체 AI 투자 금액의 73%를 차지했고, 10억 달러 이상 딜만 모아도 전체의 절반에 가까워요. OpenAI의 400억 달러, Anthropic의 130억 달러 라운드 같은 거대 투자가 전체 수치를 끌어올리고 있는 거예요.
한국도 다르지 않아요. 더브이씨(The VC) 데이터 기준으로 국내 AI 투자 금액 비중은 2022년 9.4%에서 2025년 23.6%로 확대됐어요. 그리고 2026년 1분기에는 45%를 넘겼어요. 혁신의숲 데이터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요. 혁신의숲에 따르면 국내 스타트업 투자액 중 AI 분야 비중이 2024년 27.9%에서 2025년 8월 기준 31.7%로 상승했고, 투자 건수 기준으로도 AI/딥테크/블록체인이 거의 매월 1~2위를 차지하고 있어요. 2024년 연간 투자 총액은 1,416건에 약 6조 7,564억 원이었는데, 전체 건수가 줄어드는 와중에도 AI 쪽으로의 쏠림만 강해지는 구조예요. 투자 건수는 줄고 금액은 늘어난다는 건, 소수의 AI 기업에 자금이 몰리고 나머지는 더 힘들어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 숫자들이 말해주는 건 명확해요. AI와 관련 없는 스타트업은 점점 줄어드는 파이를 두고 경쟁해야 해요. 블랭크가 만난 'Chris'의 자율주행 드론 스타트업이 정확히 이 상황이에요. 5년 동안 고개를 숙이고 기술을 만드는 사이, 우크라이나 전쟁이 자율 드론 시장을 폭발시켰어요. PitchBook 데이터에 따르면 방위 테크 스타트업에 대한 VC 투자는 2025년에 491억 달러로 전년(272억 달러) 대비 거의 두 배가 됐어요. 2025년에만 10개의 신규 유니콘이 이 분야에서 탄생했고, Anduril은 기업 가치 305억 달러로 25억 달러를 추가 조달했어요.
Chris의 제품은 분쟁 지역 의료 후송이나 보급 수송에 완벽하게 맞는 솔루션이었지만, 정작 그는 이 기회가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어요. 블랭크의 말처럼, Chris가 만든 항공 플랫폼 통합 기술은 여전히 경쟁력이 있어요. 하지만 그 기술을 둘러싼 사업 모델은 완전히 다시 써야 하는 상황이에요.
스타트업이 '고개를 숙이고 집중하는 것'이 미덕이던 시대가 끝나고 있어요. 지금은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피는 것이 생존 조건이에요.
⚡ 소프트웨어의 비용 공식이 통째로 바뀌었어요
블랭크가 지적하는 두 번째 변화는 소프트웨어 개발의 경제학 자체가 무너진 거예요.
2025년 초 안드레이 카파시가 던진 '바이브 코딩'[3]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자연어로 의도를 설명하면 AI가 코드를 생성하는 방식인데, 콜린스 사전이 2025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할 만큼 파급력이 컸어요. 이게 이제 실험이 아니라 실무 방법론이 됐어요. Y Combinator 2025년 겨울 배치의 25%가 코드베이스의 95% 이상을 AI로 생성했고, Cursor라는 AI 코드 에디터는 2026년 초 기준 연간 매출 20억 달러를 돌파했어요. 전 세계 개발자의 92%가 AI 코딩 도구를 월 1회 이상 사용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어요.
이전에는 MVP[4]를 만드는 데 몇 개월이 걸렸어요. 지금은 며칠, 때로는 몇 시간이면 돼요. 프로토타이핑 속도가 3~5배 빨라졌다는 보고가 일반적이고, 단순한 CRUD 앱[5]의 경우 10배 이상 빨라졌다는 사례도 있어요. 블랭크가 날카롭게 짚는 지점이 있어요. "MVP가 더 이상 팀의 역량을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다." 누구나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건 애자일[6] 개발 방법론에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요. 블랭크는 애자일이 본질적으로 순차적(serial) 프로세스였다고 지적해요. 한 번에 하나의 가설을 테스트하고, 결과를 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방식이었죠. 그런데 AI 에이전트를 활용하면 다섯 가지 가격 모델, 열 가지 메시지, 스무 가지 UX 플로우를 동시에 테스트할 수 있어요. 순차 개발이 병렬 개발로 바뀌는 거예요. 블랭크의 표현을 빌리면, "만들고 보낼 여력이 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테스트할지 아느냐"가 병목이에요. 엔지니어링이 아니라 판단력, 고객 인사이트, 유통이 핵심 역량이 된다는 뜻이에요.
예전에 개발팀 10명이 필요했던 일을 이제 2~3명, 심지어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개발 비용이 떨어지면 진입 장벽도 떨어져요. 그러면 2년 전에 세운 기술 스택, 팀 규모, 로드맵이 전부 과잉 투자가 돼요.
🤖 AI 에이전트가 '소프트웨어의 정의'를 바꿔요
세 번째 변화는 더 근본적이에요. 블랭크는 이렇게 정리해요. 지금까지 소프트웨어는 사용자에게 정보를 보여주는 도구였어요. 대시보드, 알림, 워크플로우 — 전부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고객이 소프트웨어를 사는 이유는 대시보드를 보려는 게 아니라 일을 끝내려는 거잖아요.
AI 에이전트[7]는 그 "다음 단계"를 직접 실행해요. 고객 문의를 해결하고, 미팅을 잡고, 리드를 검증하고, 재고를 발주해요. 블랭크의 표현이 인상적인데, 다음 세대의 앱은 화면에 정보를 올리는 게 아니라 직원처럼 행동한다고 해요. 서포트 티켓을 해결하고, 미팅을 예약하고, 리드를 심사하고, 재고를 재주문해요.
이렇게 되면 가격 구조도 바뀌어요. '시트(seat) 당 과금'에서 '결과당 과금'으로요. 해결된 티켓 하나에 얼마, 성사된 미팅 하나에 얼마. 소프트웨어가 '인터페이스'에서 '성과'로 전환되면, 고객이 지불하는 기준도 '접속 권한'에서 '달성된 결과'로 바뀌는 거예요.

블랭크는 이걸 한마디로 요약해요. Product/Market Fit의 시대가 끝나고, AI Agent/Customer Outcome Fit의 시대가 온다. MVP(최소 기능 제품)는 MPO(최소 생산적 성과)[8]로 바뀌어요. 당신의 제품이 "다음에 이걸 하세요"라고 화면에 띄우는 동안, 경쟁자의 제품이 그걸 알아서 해버린다면, 당신의 제품은 더 이상 경쟁 제품이 아니에요.
하드웨어 스타트업도 예외가 아니에요. 블랭크는 물리적 프로토타입을 만들기 전에 AI로 더 많은 설계 변형을 시뮬레이션하고, 디지털 트윈[9]을 만들고, 가정을 더 일찍, 더 싸게 스트레스 테스트할 수 있다고 지적해요. 그리고 AI가 하드웨어의 백엔드에 탑재되면, 카메라가 감시 시스템이 되고, 진동 센서가 기계 고장 예측 시스템이 되고, 로봇이 공장 노동자가 돼요. 해자는 더 이상 하드웨어 자체가 아니라, 하드웨어가 감지하는 것과 AI가 그 데이터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의 조합이에요.
🧱 매몰비용이라는 덫
여기서 가장 힘든 부분이에요. 블랭크가 말하는 'Chris'처럼, 수년간 쌓아온 코드, 팀, 로드맵이 있어요. 이걸 버리기 어려운 이유는 많아요. "VC가 이 아이디어에 투자했는데", "고객이 아직 UI를 원하는데", "팀이 이 로드맵을 믿는데." 그리고 블랭크가 짚는 핵심이 있어요 — 이 모든 것이 피벗하지 않을 이유가 된다는 거예요.
블랭크는 매몰비용을 두 가지로 나눠요.
여전히 자산인 것: 깊은 도메인 지식, 고객 관계, 독점 데이터, 어렵게 얻은 규제 승인, 물리적 통합이에요. Chris의 경우 항공 플랫폼과의 시스템 통합이 이에 해당해요. 이런 건 AI가 하루아침에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에요.
이미 부채가 된 것: 느린 개발 주기에 맞춰 구성된 대형 엔지니어링 팀, 시트 기반 가격 모델, 기능 중심의 제품 로드맵이에요. 블랭크는 이걸 '테이블 위의 죽은 사슴(Dead Moose on the table)'이라고 불러요. 너무 명백하게 잘못된 건데 아무도 지적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에요.
블랭크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이거예요. "오늘의 도구로, 오늘의 시장에서, 이 회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무엇을 만들 것인가?" 이미 투자를 받은 테제가 있을 때 이 질문은 불편해요. 하지만 다음 라운드에서 투자자가 "더 이상 펀딩 안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덜 불편하다고 블랭크는 경고해요.
오스왈드의 시선
솔직히 말하면, 블랭크의 글을 읽으면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가 떠올랐어요.
저는 GTM 전략을 다뤄왔는데, 한국 시장에서 유독 자주 보는 패턴이 있어요. 기술을 만든 뒤에 시장을 찾는 순서예요. "우리 기술이 이렇게 좋은데 어디에 팔 수 있을까"가 아니라, "이 고객의 결과(outcome)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에서 출발해야 하거든요. 블랭크가 Product/Market Fit에서 Agent/Customer Outcome Fit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건, 이 순서를 근본적으로 뒤집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 더요. 더브이씨와 혁신의숲 데이터를 같이 보면 국내에서도 AI 투자 쏠림이 뚜렷해요. 더브이씨 기준 2026년 1분기 투자 건수는 17% 줄었는데 금액은 55% 늘었고, 혁신의숲 월별 결산에서도 AI/딥테크/블록체인이 투자 건수 1위를 놓치지 않고 있어요. 소수의 메가딜에 자금이 집중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건 블랭크가 말하는 글로벌 패턴과 정확히 같아요. AI가 아닌 스타트업이라면, "AI 네이티브 경쟁자가 왜 우리를 대체하지 못하는가"에 지금 당장 답할 수 있어야 해요.
제가 특히 주목하는 건 블랭크가 '여전히 자산인 매몰비용' 목록에 올린 것들이에요. 도메인 지식, 고객 관계, 규제 승인 — 이건 한국 기업이 전통적으로 강한 영역이에요. 반도체, 조선, 자동차 산업에서 축적한 도메인 전문성에 AI를 결합하는 것, 이게 블랭크가 말하는 '방어 가능한 해자'예요. 코드를 많이 쌓는 것이 아니라, 코드가 대체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느냐가 관건이에요.
마치며
블랭크의 메시지를 세 가지로 압축하면 이래요.
첫째, 2024년 이전의 플레이북은 2026년에 작동하지 않아요. 자금 조달, 기술 스택, 비즈니스 모델 — 전부 바뀌었어요. 둘째, 방어 가능한 해자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종류가 달라졌어요. 독점 데이터, 고객 결과에 대한 깊은 이해, 규제 장벽 같은 것들이에요. 코드 몇 만 줄은 더 이상 해자가 아니에요. 셋째, "오늘 다시 시작한다면?"이라는 질문을 매 분기 스스로에게 던져야 해요.
블랭크의 글이 특히 무겁게 다가오는 건, 그가 린 스타트업이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 방법론조차 이제 업데이트가 필요하다고 본인이 말하고 있는 거니까요.
참고자료 & 더 읽기
핵심 출처
- Steve Blank, "Your Startup Is Probably Dead On Arrival",steveblank.com, 2026. 블랭크 특유의 사례 기반 분석이 날카로운 분석이 돋보이는 글이에요.
- OECD, "Venture Capital Investments in Artificial Intelligence through 2025", 2026. : VC 자금의 AI 쏠림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보고서예요.
- PitchBook / Defense News, "Defense tech startups had their best funding year ever in 2025", 2026. : 방위 테크 투자가 얼마나 급격히 성장했는지 데이터로 보여줘요.
배경 지식
- 더브이씨, "2025 한국 스타트업 투자 통계", 2026. : 국내 AI 투자 비중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어요.
- 더브이씨, "2026 Q1 한국 스타트업 투자 통계", 2026. : 최신 분기 데이터로, 메가딜 집중 현상이 두드러져요.
- 혁신의숲, "런칭 4주년 리포트 — AI 적용된 혁신의숲 2.0", 테크42, 2025. : 국내 AI 투자 비중이 2024년 27.9%에서 2025년 31.7%로 상승한 근거가 여기 있어요.
- Wikipedia, "Vibe coding", 2026. : 바이브 코딩의 개념과 현황을 중립적으로 정리해놨어요.
각주
- [1] 해자(Moat): 경쟁자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사업적 방어벽이에요. 원래는 성을 둘러싼 물길을 뜻하는데, 투자 세계에서는 워런 버핏이 즐겨 쓰는 표현이에요. 특허, 독점 데이터, 네트워크 효과 같은 것들이 해자가 될 수 있어요.
- [2] 린 스타트업(Lean Startup): 스티브 블랭크와 에릭 리스가 체계화한 창업 방법론이에요. 완벽한 제품을 만든 뒤 출시하는 대신, 최소 기능 제품(MVP)을 빠르게 만들어 고객 반응을 테스트하고, 가설을 검증하며 반복 개선하는 방식이에요.
- [3] 바이브 코딩(Vibe Coding): OpenAI 공동 창업자 안드레이 카르파시가 2025년 초에 제안한 개념이에요. 코드를 직접 작성하는 대신 자연어로 의도를 설명하면 AI가 코드를 생성해주는 방식이에요. 콜린스 사전이 2025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기도 했어요.
- [4] MVP(Minimum Viable Product, 최소 기능 제품): 핵심 기능만 갖춘 최소 버전의 제품이에요. 완벽한 제품을 만들기 전에 시장 반응을 먼저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요.
- [5] CRUD 앱은 데이터베이스의 핵심 기능인 Create(생성), Read(읽기), Update(수정), Delete(삭제)를 수행하는 기본적인 애플리케이션을 뜻해요,
- [6] 애자일(Agile): 소프트웨어를 한 번에 완성하지 않고, 짧은 주기(보통 2주)로 나눠서 조금씩 만들고 피드백을 반영하는 개발 방식이에요. 폭포수(Waterfall) 모델의 대안으로 2000년대 초반부터 널리 퍼졌어요.
- [7] AI 에이전트(AI Agent): 사람의 지시를 받아 스스로 판단하고 작업을 수행하는 AI 시스템이에요. 기존 AI가 "이런 결과가 나왔어요"라고 보여주는 데 그쳤다면, 에이전트는 "결과를 보고 다음 단계까지 실행했어요"라고 말하는 수준이에요.
- [8] MPO(Minimum Productive Outcome, 최소 생산적 성과): 블랭크가 이 글에서 새롭게 제안한 개념이에요. MVP가 '최소한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MPO는 '최소한의 고객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AI 에이전트 시대에 맞는 새로운 검증 기준이에요.
- [9]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물리적 제품이나 시스템을 가상 공간에 똑같이 복제해 놓은 것이에요. 실제 제품을 만들기 전에 가상으로 테스트하거나, 운영 중인 시스템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데 쓰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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