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구독자님, 2011년 마크 앤드리슨이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한 문장이 있어요.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고 있다(Software is eating the world)." 이후 14년간 이 문장은 실리콘밸리의 사실상 공리였어요. 넷플릭스가 블록버스터를, 우버가 택시 산업을, 에어비앤비가 호텔업을 집어삼켰죠. 경쟁 우위는 물리적 자산이 아니라 코드에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 이코노미스트에 흥미로운 칼럼이 실렸어요. 도이치뱅크 전 감독이사회 의장 파울 아흘라이트너가 쓴 글인데, 핵심은 이거예요. AI가 소프트웨어를 범용재(commodity)[1]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경제 권력이 다시 하드웨어 — 에너지, 광물, 인프라, 제조 역량 —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 오늘은 이 주장이 과연 근거가 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따져볼게요.
소프트웨어는 왜 '희소한 자원'이 아니게 되었나
앤드리슨의 2011년 명제가 통했던 이유는 명확해요.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는 역량 자체가 희소했거든요. 유능한 개발자를 확보하고, 코드를 대규모로 배포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가진 기업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았어요.
AI가 이 구도를 뒤집고 있어요. 코드를 생성하고, 테스트하고, 최적화하는 비용이 사실상 제로에 수렴하기 시작했어요. 바이브 코딩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도 이 맥락이에요. 소프트웨어가 한때 석유처럼 '전략적 자산'이었다면, 이제는 전기처럼 '당연히 깔려 있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 거예요.
경제학의 기본 원리가 작동하는 셈이에요. 경제 권력은 가장 우아한 것이 아니라, 가장 희소한 것에 붙어요. 소프트웨어가 풍요로워진 만큼, 하드웨어의 제약이 다시 부각되고 있어요.
에너지: 디지털 세계의 물리적 발자국

이 전환이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곳이 에너지예요. 이제는 테라와트시(TWh)[2]가 기본 단위처럼 되고 있어요. IEA(국제에너지기구)의 2025년 4월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은 2024년 약 415TWh에서 2030년까지 945TWh로 두 배 이상 증가할 전망이에요. 이건 일본의 연간 전체 전력 소비량과 맞먹는 규모예요. 이 중 AI가 가장 큰 성장 동인이고, AI 최적화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는 같은 기간 4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요.
여기서 흥미로운 숫자가 하나 있어요. 미국에서는 2030년까지 데이터센터가 알루미늄·철강·시멘트·화학제품 등 모든 에너지 집약적 제조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전력을 쓰게 될 거예요.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쓰는 전기가 물건을 만드는 데 쓰는 전기를 넘어서는 거죠.
문제는 이걸 공급할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거예요. IEA는 계획 중인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의 약 20%가 전력망 연결 지연으로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어요. 송전선 하나를 새로 까는 데 선진국 기준 4~8년이 걸려요. 소프트웨어는 몇 달이면 리쇼어링[3]할 수 있지만, 발전소와 송전망은 그렇게 안 돼요.
구리: 전기화 시대의 진짜 병목
에너지 다음은 소재예요. 그 중에서도 구리가 핵심이에요.
S&P 글로벌이 2026년 1월 발표한 보고서 "Copper in the Age of AI"에 따르면, 전 세계 구리 수요는 현재 약 2,800만 톤에서 2040년까지 4,200만 톤으로 50% 증가할 전망이에요. 수요가 느는 건 그렇다 치고, 진짜 문제는 공급이에요. 기존 광산의 광석 품위[4]는 떨어지고 있고, 새 광산 하나를 발견에서 생산까지 가져가는 데 평균 17년이 걸려요. 보고서는 2040년까지 약 1,000만 톤의 공급 부족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어요.
구리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해요. 전기가 흐르는 모든 곳에 구리가 있어야 해요. 데이터센터, 전기차(내연기관차 대비 구리 사용량 2.9배), 태양광·풍력 발전소, 송배전망, 심지어 군사 장비까지. S&P 글로벌의 다니엘 예르긴 부회장은 이렇게 정리했어요. "구리는 전기화의 핵심 촉매인데, 전기화의 가속 자체가 구리에게는 도전이 되고 있다."
소프트웨어에는 이런 병목이 없었어요. 코드를 복사하는 데 한계비용[5]이 사실상 없잖아요. 하지만 구리를 한 톤 더 캐려면 땅을 파야 하고, 정련해야 하고, 운반해야 해요. 물리적 자원에는 마진 비용이 존재한다는 사실, 이것이 소프트웨어 시대에 잊혀졌다가 다시 떠오르는 경제의 기본 원리예요.
가공(Processing): 주목할 포인트는 광산이 아니라 정련소
아흘라이트너의 칼럼에서 제가 가장 주목한 대목이 있어요. "채굴은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다. 가공이 진정한 초크포인트[6]이며, 공급망에서 가장 지리적으로 집중된 부분이다."
희토류[7]를 보면 이게 선명하게 드러나요.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의 채굴에서 약 60~70%를 차지하는데, 정련·가공에서는 약 90%를 차지해요. 영구자석 제조까지 가면 그 비율이 94%까지 올라가요. IEA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전략적으로 중요한 20개 광물 중 19개에서 중국이 최대 정련국이고, 평균 시장 점유율이 70%에 달해요.
2025년에 중국은 실제로 이 카드를 꺼내 들었어요. 4월에 7개 중희토류 원소에 대한 수출 통제를 시작했고, 10월에는 이를 정련 기술·장비·부품까지 확대했어요. 심지어 중국 기술로 해외에서 생산된 제품에도 수출 허가를 요구하는 역외 관할권(extraterritorial jurisdiction)[8]까지 도입했어요.
이건 단순한 무역 분쟁이 아니에요. 가공 역량이 곧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것을 중국은 수십 년 전부터 이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소프트웨어는 오픈소스로 공유할 수 있지만, 정련 노하우와 공급망은 복사가 안 돼요.
오스왈드의 시선
솔직히 말하면, 이 칼럼을 처음 읽었을 때 "또 하드웨어 르네상스 이야기인가" 싶었어요. 이런 류의 주장은 반도체 부족 때도, 코로나 공급망 위기 때도 나왔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라요. AI가 소프트웨어의 희소성을 구조적으로 해체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거든요. 이전의 "하드웨어 중요론"이 일시적 공급 충격에 대한 반응이었다면, 지금의 논의는 경제 권력의 무게중심 이동에 대한 이야기예요.
제가 알고 있는 한 가지 패턴이 있어요. 기술 기업들이 "우리는 소프트웨어 회사"라고 정체성을 정의하는 순간, 물리적 제약을 과소평가하게 돼요. 클라우드라고 부르지만 실체는 땅 위의 서버 팜이고, AI라고 부르지만 실체는 전기를 먹는 GPU 클러스터예요. "무게 없는 디지털 경제"라는 표현은 처음부터 오해에 가까웠어요.
다만 균형을 맞출 필요는 있어요. 소프트웨어가 범용재가 되었다고 해서 소프트웨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에요. 전기가 범용재지만 전기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는 것처럼요. 소프트웨어의 역할이 '차별화 요소'에서 '필수 인프라'로 바뀌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거예요. 그리고 경쟁의 축이 "누가 더 좋은 코드를 쓰는가"에서 "누가 더 안정적인 물리적 시스템을 구축·확보할 수 있는가"로 옮겨가고 있는 거죠.
한국의 맥락에서 보면, 이 전환은 기회이기도 해요. 한국과 대만, 일본은 반도체 제조라는 물리적 역량에서 글로벌 우위를 갖고 있어요. 이 역량은 수십 년간 축적된 엔지니어링 노하우에 기반한 것이고, 소프트웨어처럼 몇 달 만에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문제는 이 우위를 소재·에너지·가공까지 확장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마치며
정리하면 이래요. 첫째, AI가 소프트웨어를 풍요롭게 만들면서, 경제적 희소성의 축이 디지털에서 물리적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어요. 둘째, 에너지·소재·가공 역량이 앞으로 10년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셋째, 이 전환에서 유리한 쪽은 빠른 확장성이 아니라 장기 자본, 엔지니어링 깊이, 공급망 회복력을 가진 쪽이에요.
다음에 "AI 시대"라는 말을 들을 때, 코드가 아니라 그 코드가 돌아가는 물리적 기반을 한번 떠올려 보시면 좋겠어요. 구리선이 깔리지 않으면 AI도 전기도 흐르지 않으니까요.
참고자료 & 더 읽기
핵심 출처
- Paul Achleitner, "Economic power is returning to the physical realm", The Economist, 2025. : 오늘 뉴스레터의 출발점이 된 칼럼이에요.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를 먹고 있다"는 테제를 체계적으로 전개하고 있어요.
- IEA, Energy and AI (Special Report), 2025년 4월. :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전망의 가장 포괄적인 글로벌 분석이에요. 945TWh라는 2030년 전망치의 원출처예요.
- S&P Global, Copper in the Age of AI: The Challenges of Electrification, 2026년 1월. : 구리 수요 50% 증가 및 1,000만 톤 공급 부족 전망의 원출처예요. 다니엘 예르긴이 공동 의장으로 참여한 보고서예요.
배경 지식
- Marc Andreessen, "Why Software Is Eating the World", The Wall Street Journal, 2011년 8월 20일. : 오늘 뉴스레터가 '반박'하고 있는 원래 주장이에요. 14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으면 당시의 맹점이 보여요
- IEA, Global Critical Minerals Outlook 2025. : 중국의 핵심 광물 정련 집중도(20개 전략 광물 중 19개에서 1위, 평균 점유율 70%)에 대한 데이터가 정리되어 있어요.
- CSIS, "Developing Rare Earth Processing Hubs: An Analytical Approach", 2025년 7월. : 미국·호주·사우디·캐나다의 희토류 가공 허브 잠재력을 분석한 보고서예요. 중국 의존도 탈피가 왜 어려운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돼요.
관련 영상
각주
- [1] 누가 만들어도 품질 차이가 거의 없어서, 가격으로만 경쟁하게 되는 재화를 뜻해요. 밀, 원유가 대표적인 범용재인데, 소프트웨어도 AI 덕분에 이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게 이 칼럼의 핵심 주장이에요.
- [2] 전력 소비량의 단위예요. 1TWh는 100만 가구가 약 1년간 쓸 수 있는 전력량이에요. 945TWh면 한국 전체 연간 전력 소비량(약 600TWh)의 1.5배가 넘는 규모예요.
- [3] 리쇼어링(Reshoring): 해외로 이전했던 생산시설이나 사업 기능을 다시 자국으로 가져오는 것이에요. 소프트웨어는 원격으로 빠르게 가능하지만, 제조업 리쇼어링은 수년이 걸려요.
- [4] 광석 품위(Ore Grade): 캐낸 광석에서 실제 추출할 수 있는 금속의 비율이에요. 품위가 높을수록 같은 양의 흙에서 더 많은 금속을 얻을 수 있어요. 전 세계적으로 구리 광산의 평균 품위가 점점 낮아지고 있어서, 같은 양의 구리를 얻는 데 더 많은 비용과 에너지가 드는 추세예요.
- [5] 한계비용(Marginal Cost): 제품이나 서비스를 한 단위 더 생산할 때 드는 추가 비용이에요. 소프트웨어 복사는 한계비용이 거의 0이지만, 구리를 1톤 더 캐려면 채굴·정련·운송 비용이 추가로 들어요.
- [6] 초크포인트(Choke Point): 공급망에서 흐름이 좁아지는 병목 지점이에요. 원래는 호르무즈 해협 같은 지정학적 요충지를 가리키는 군사 용어인데, 여기서는 특정 국가에 집중된 가공·정련 능력을 비유하고 있어요.
- [7] 희토류(Rare Earth Elements): 란타넘, 네오디뮴 등 17개 원소를 통칭해요. 전기차 모터, 풍력 터빈, 정밀 유도 무기 등에 필수적인 소재인데, 채굴보다 정련·가공이 훨씬 더 집중되어 있어 전략적 중요성이 커요.
- [8] 역외 관할권(Extraterritorial Jurisdiction): 자국 영토 밖에서 일어나는 활동에까지 법적 규제를 적용하는 것이에요. 중국이 2025년에 도입한 규정은, 중국 기술로 해외에서 만든 희토류 제품에도 수출 허가를 요구하는 내용이에요. 자국 기술의 해외 사용까지 통제하겠다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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