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구독자, 저번 메일은 어땠어? 난 개인적으로 남의 영화 취향 듣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어. 메일을 기다리는 일 -- 참 낭만적이고 설레는 일이라는 걸 또 한 번 느낀 순간이야. 그렇게 들락날락 메일함 닳도록 열어보다 발견한 두 번째 메일. 시작해 볼게!

안녕 L, 안녕 N.
평소 일시정지의 두 분이 L과 N으로 부르며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듯 이야기를 들려줬기에 나도 이렇게 답을 주려고 해.
📧 일시정지와의 첫 만남이 궁금합니다. 일시정지를 언제, 어떻게 구독하게 되셨나요?
연준 첫 만남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찾아보니, 작년 8월 중순부터 처음 구독을 하게 됐더라. 이렇게 일 년 넘게 구독한 첫 뉴스레터가 처음이라 새롭기도 하고 또 함께하는 일 년은 또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 일시정지의 첫 시작도 뻔하지만 '인생영화'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연준 님에게 인생 영화란 무엇인가요?
연준 내가 생각하는 인생 영화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어쩌면 이제는 옅어져서 잘 보이지 않아도 마음 깊이 간직하는 영화인 거 같아. 그런 면에서 나에게 '빌리 엘리어트'는 너무나 소중한 인생 영화야. 일시정지에서 이 영화를 얘기했을 때 정말 반가웠어. L과 N 사이에 이 영화를 다뤄서이기도 하지만 나 또한 잠시 잊고 있던 영화를 다시금 떠올릴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정말 많이 돌려 본 영화인데도 볼 때마다 늘 설레고 따뜻하고 벅차올라. 또 이렇게 오랫동안 간직할 영화를 만날 수 있을까. 또 그런 영화가 생기더라도 가장 먼저 빌리 엘리어트가 생각나겠지. 마치 인생 영화 질문에 고민 없이 이 영화가 떠오른 것처럼 말이야. 이 영화를 처음 보고 한동안 프레드 아스테어의 Top Hat White Tie and Tails를 무한 반복해서 들었어. 영화 중간에 아주 짧게 나오는 트랙인데 한 번 들어보는 걸 추천해.
📧 일시정지에게 소개하고 싶은 영화가 있나요
연준 김미영 감독의 절해고도와 임정환 감독의 신생대의 삶을 소개하고 싶어.
예전에 '그래비티'에 출연한 산드라 블록이 영화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었어.
더 이상 노력할 이유가 없을 때 무엇 때문에 노력하는지가 주제이다.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조짐도 없고 터널 끝에 빛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혹시 한 걸음만 더 시도해 볼 가치가 있을까 봐. 발을 내딛게 하는 그 믿음이 여러분에게는 무엇인가요?
<그래비티> 산드라 블록
나는 '절해고도'와 '신생대의 삶'이 그런 영화라고 생각해. 우리는 예상과 다른 어른이 되었고 그래서 때로는 너무나 시시하고 지겨운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삶이 이어질 수 있는 건 오로지 스스로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 나 또한 그 사실을 종종 잊어버려서 괴로운 날이 이어지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나는 내가 있어서 나아갈 수 있어. 이 영화는 내게 그런 영화야.
절해고도는 현재 왓챠에 있고, 신생대의 삶은 영화제 이후로 아직 개봉되지 않았어. 절해고도는 가을과도 잘 어울리니 왓챠를 통해 꼭 봐주면 좋겠다. 외롭고 쓸쓸하지만 나아갈 수 있어, 정말이야.

📧 누군가 연준님에게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시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취향을 숨기는 편이라서요... 대외용 영화 취향이 따로 있으신지 궁금했습니다)
연준 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야. 그런데 그게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가 달라서 문제야. 이전에는 '복수는 나의 것'이었다면 지금은 미야케 쇼나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 따뜻한 이야기 속 사람들을 통해서 함께 살아가는 힘을 받는 기분이야.
N 100% 공감이야! 거의 23 아이덴티티 급 영화 취향이랄까? 앞뒤가 안 맞는 취향이란 건 없지만, 극과 극을 넘나들다 보니 말하기 망설여지더라고. 또! 얼마 전에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를 봤는데 마음이 복잡시러웠어.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고도 한참 고민에 빠져있었거든. 가슴이 막 답답하고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액션은 무엇일까? 떠올려 보며... 억지스러운 과잉 연출 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사회를 담아준 감독님께 경의를 표하게 돼.
📧 그렇다면 본인의 길티플레저 영화는 무엇인가요?
연준 큼큼.. 저의 길티는 2005년 개봉한 한국영화 예의없는 것들 입니다. 일시정지를 구독하시는 대부분이 이 영화를 못 봤을 거라고 예상해. 왜냐면 명작도 아닐뿐더러 어느 ott에서도 만나볼 수 없거든. 나는 DVD를 구매해서 봤었어. 간략한 줄거리를 알려주자면 혀가 짧아 슬픈 킬러인 '킬라'는 예의 없는 것들만 처리하는 신념 아닌 신념을 가진 주인공이야. 이야기는 혀 수술비를 위해 마지막 제안을 받으면서 전개돼.

이 영화가 왜 길티이냐면 전체적인 구성이 갖는 그 시절 남성 중심 내러티브로 인해 눈살이 찌푸려지고, 전개에 있어 각 장면의 비중이 알 수가 없다는 점에 있어. 그리고 코미디, 드라마, 그리고 철학적인 측면이 동반하면서 잘 만든 영화라고 볼 수가 없어. 그럼에도 좋았던 건 신체적 문제로 말을 할 수 없는 인물이 열심히 달리고 달려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해. 특유의 B급 감성도 좋았고 말이야. 이제는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잖아. 아무도 실험하지 않는 세상에서 과거의 망한 실험을 보는 재미가 또 있는 거 같아.
아무튼 가장 좋아하는 내레이션을 남기며 이 질문은 마무리할게.
자전거를 타고 달려와 돌아보면 , 왜 그리 길이 굽어있는지. 분명 반듯하게만 달려왔는데
📧 영화 한 편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연준 응 너무나도. 우연히 들어간 미술관에 마음이 빼앗겨서 평생의 꿈을 미술로 삼기도 하고, 긴 비행시간이 지루해서 평생 눌러보지 않았을 영화에 마음이 뺏기기도 하며, 잘 모르는 장르의 영화에 놀라 그 영화 감독에게 같이 작업하고 싶다고 제안할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는걸. 순간이 인생을 만들기에 영화 한 편 속 수많은 씬들이 모두 길이 된다고 생각해. 그게 그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 아니더라도 말아. (어쩌면 중요하지 않기에 더 마음이 가는 걸 수도 있지)
📧 저는 요새 영화에 마음 붙이기 어려운, 일명 노잼 시기를 겪고 있는데요.
연준 님은 요즘 영화에 대한 감정이 어떠신가요?
연준 나도 노잼 시기를 겪는 중인데.. 그런데 우리 모두 노잼 시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문제가 아닌 거 같지?ㅎ 요즘 영화는 너무 잘 만들어진 “플라스틱 케이크" 같아. 예쁘고 잘 만들어졌는데 맛이 없어. 맛이라는 게 없어. 그래서 과거 영화를 보게 돼. 재미없어도 화가 날 만큼 재미없는 영화가 더 좋거든. 나를 열 받게 해도 말할 영화가 있다는 게 좋은 건데 이제는 그런 마음이 없어진 느낌이야. 그냥 손을 놓게 돼. 그치만 아직 더 많은 영화를 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마음을 열고 장르를 열고 장면을 열어보자. 우리 같이.
📧 100년 뒤에도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있을까요?
연준 응. 어디선가 영화는 사랑으로 만들어진 분과라고 하더라.* 그런 점 때문에 가끔 영화가 힘들기도 하지만 사랑으로 이어진 역사이기에 계속 남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그때도 그때의 영화를 사랑하고 나눌 사람들이 일시정지의 글을 읽으며 과거 영화를 탐험하기를 바라.
*마테리알 글 <윤원화, 언제나 밝은 방에서 여러 개의 창을 틀어놓고>

📧 일시정지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있으신가요?
연준 일시정지를 써 내려가는 마음이 궁금해. 글이라는 건 한 줄 한 줄 적으면서 하나, 하나의 고민이 쌓이잖아. 어떤 고민이 있는지. 지속적인 글쓰기가 이전에는 어땠고 지금은 또 어떤 마음으로 변했는지 궁금해.
N 사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어. 말 그대로 친구와 메일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하니 시답잖은 고민도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겠더라고. 어쩌면 익명 뒤에 숨어 음침하게 (농담이야) 취향과 고민을 공유했달까. 나는 놀랍게도! 남에게 내 이야기 하는 걸 꺼리는 사람인데 일시정지 메일만 쓰고 나면 말이 많아져. 한편으로 개운하기도 하고 도파민이 도는 느낌. 가끔은 '내가 이것까지 말해도 되는 걸까' 싶어서 고민한 적도 있지만, 최대한 가감 없이 쓰게 되는 것 같아.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구독자 맘 구석구석 닿길 바라며...
여전히 마감은 어렵지만 어떻게 하면 좀 더 읽고 싶은, 생생한 글을 쓸 수 있을지 골몰하게 돼. 아무 생각 없이 보던 영화/드라마도 일시정지 글감으로 적합하다 싶으면 눈에 힘주고 집중하거든. 트렌드도 특이함도 보편적 주제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은근히 욕심 그득하게 쓰고 만들고 있어. 우리의 메일이 기다려지길 바라며!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연준 늘 우리에게 편지를 나눠주었던 L과 N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햇수로 3년을 쌓아온 편지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쌓여가길 바랍니다. 무더위에 지치기도 하고, 몰아치는 비바람에 몸을 사리기도 하며, 알 수 없는 추위에 마음마저 굳어가는 시기에도 일시정지가 주던 편지에 새로운 이야기를 배워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어쩌면 가족/친구들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독자님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 N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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