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가 공동체에서 토론이 벌어졌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 누군가 반박을 한 뒤였다. 그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에게까지 친절하고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없다고 말했다. 맞춰주기만 했던 해로운 관계는 모조리 정리했는데 단절 이후의 외로움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나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알기 위해 노력하라는 조언이 대부분이었다.
가슴에 구멍이 뚫려서 바람이 새는 것처럼 외로워하던 시기가 지나가서 그런지 그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었다. 나는 이미 모든 걸 경험해 봤고, 그것들로부터 초월했다는 감각을 사람들에게 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각종 SNS에서 접한 글을 언급했다. 인간관계를 식물에 비유한 글. 좋아한다고 물을 한꺼번에 많이 줘도 문제고, 주지 않아도 문제라는. 영어가 부족해 쉬운 비유를 들 수밖에 없었다.
득도한 사람처럼 연설을 시작했다.
(나) 우리는 각자 마음에 정원을 가지고 있어. 여기에 무엇이 심어져서 자라고, 어떻게 크게 될지는 알 수 없어. 대신 이따금 가서 물을 주고 얼마나 자라는지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비료도 줄 수 있겠지. 상대방도 물을 주러 올 거야. 바빠서 물을 못 주는 날에는 그가 줄 수도 있고, 우리 둘 다 적당히 줄 수도 있어. 혹은 한쪽이 더 많이 주는 날도 있을 거야.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어떤 식물인지에 따라서 제각기 다른 각자의 시간에 맞춰서 꽃이 필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혹은 하염없이 위로 자라는 키가 큰 나무가 될 수도 있어. 난 이렇게 생각한 뒤로 예전처럼 외롭지 않아졌어.
(그) 나만 주는 관계도 있잖아.
(나) 사랑은 1대 1로만 교환되는 것이 아니야. 내가 누군가에게 많이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돌려주지 않을 수도 있어. 그건 그 사람의 자유니까. 대신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사랑을 과분하게 받을 때도 있고, 돌려주지 못할 수도 있어. 대신 이 사랑은 돌고 돌아. 마음 안에 물그릇이 있다고 생각해 봐. 명상하고 알아차리면서 그 그릇을 키우면 주고받을 수 있는 양이 늘어.
(그) 완벽해도 잘 안되는 관계도 있잖아.
(나) 정원이잖아. 날씨가 중요하지. 완벽해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죽고 마는 식물들도 있고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이건 정말 순발력으로 만들어낸 말이다)
(그) 그렇다면 연인 관계는?
그의 영어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연인 관계에 관해 묻는 것 같다고 느꼈지만, 머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나서서 대화 전체를 종료시켰다. 상쾌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기류상 패배자는 나였다.
(나) 연인 관계에 관해 물은 게 맞아?
(그) 응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연인을 정원에 포함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원에 연인이 들어오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연애 경험이 없다는 약점이 토론의 주요 패배 원인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 주먹을 날렸다.
(나)다양한 층위의 친구들이 있으면 되지 않아?
침묵이 길었다.
(그) 아… 나는 연인을 원하는 건데. 연인처럼 가까운데 섹스만 안 하는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어. 아마 그런 친구가 없어서일지도.
그는 목소리에 거의 힘을 주지 않고 피곤한 듯 말했고,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패배감에 머리가 무거워졌다.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은 비유가 인상 깊었다며 한 마디씩 후기를 남겼다. 한국의 각종 지성인과 추세를 생산해 내는 천재들이 모인 각종 SNS에 감사함을 느끼기도 전에 마음 한편이 조여왔다. 나조차 모순투성이인 정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토론 상대의 정원보다 황폐해져 있을 수도 있다. 하물며 남들 다 있는 애인이라는 공통의 과제조차 시작해 본 적도 없다. 필요성은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으나 이것이 땅이 척박해 키우는 걸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침대에 쌓인 빨래를 정리하다가 지난달 보았던 실비의 텃밭이 떠올랐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였던 실비는 원룸 벽 한쪽만큼의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시멘트 담벼락 주위로 경계 없이 로즈마리 두 그루, 타임 세 그루, 바질 다섯 그루가 심겨 있었다. 프로방스에 살아서 일부로 허브를 심었느냐고 묻자, 그는 심지 않았다고 했다. 그저 어느 날부터 자라기 시작해, 허브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둔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이 정원을 차지한 로즈마리는 골반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실비는 허브를 종류별로 손가락 길이만큼 잘라 손에 쥐었다. 자른 허브를 한 손바닥에 올리고 반대쪽 손바닥으로 비볐다. 그리고 손을 떨어뜨려 향기를 맡았다. 그가 허브를 손에 비비는 순간 내게 단 내를 머금은 시원한 향기가 풍겨왔다.
벽 끝에는 한 명이 어깨를 약간 움츠려야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가 있었다. 통로를 지나면 시멘트벽으로 둘러싸인 아주 좁은 땅이 나왔고 주택 단지 사람들이 모두 분리수거를 하는 쓰레기장이 보였다. 벽 안쪽에는 방울토마토와 바질이 심겨 있었다. 토마토는 주황색이라 다 익지 않은 듯했지만, 실비는 그중 제일 큰 (금귤 같은) 네 알을 손에 쥐여주었다.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바질과 손가락 하나 정도로 큰 바질을 떼어줬다. 은은한 바질 향기와 뜨겁게 달구어진 분리수거장 냄새가 미묘하게 섞여왔다.
실비는 뒤뜰 관리 따위는 하지 않으며 물도 생각날 때만 준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의 좁은 정원에서는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들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실비는 그들이 자라고 있는지 얼마나 성장했는지 이따금 둘러보기만 했을 것이다. 그의 관심과 시간이 수 차례 닿았던 작은 토마토를 입에 넣었다.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단맛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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