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이세계 재벌

아들따라 시작한 게임 룬스케이프에서 유례 없는 사업체를 건설한 Larryr의 이야기

2025.08.30 | 조회 1.22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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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끼리 같은 취미를 즐긴다는 건 멋진 일이죠. 저도 딸이 자라면 저와 함께 어떤 걸 같이 즐길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2002년, 한 소년도 본인이 좋아하던 '룬스케이프(RuneScape)'라는 게임을 엄마와 함께 즐기고 싶었습니다. 엄마도 아들의 권유를 흔쾌히 받아들여 가족 구성원의 이름을 딴 'Larryr'이라는 이름의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Larryr은 룬스케이프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아들과의 가벼운 취미 생활이었습니다. 평범하게 퀘스트를 하고 스킬을 올렸습니다. 그러다 2004년, '룬크래프트(Runecraft)'라는 새로운 스킬이 게임에 추가되면서, Larryr의 전설이 시작됩니다.

이 게임에서의 '룬'은 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부족한 물건이었습니다. 룬크래프트는 그런 룬을 유저가 직접 만들 수 있는 스킬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이런 물건을 쉽게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우선 룬을 제작할 재료를 모으는 게 꽤나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보다 좋은 룬을 제작하려면 룬크래프트의 레벨이 높아야 하는데, 어렵게 룬을 제작해도 경험치는 조금만 올라서 숙련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돈 냄새는 나는데, 그 돈을 벌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Larryr은 사업적 감각을 발휘합니다. 그녀는 '러너(Runner)'라고 하는 일자리를 창출했습니다. 사람들을 고용해서 돈을 주고 룬을 만들 재료들을 모아오게 하고 본인은 룬 제작에만 힘쓴 것입니다. 재료 모을 시간을 절약하고 제작에만 집중하니 그녀의 룬크래프트 레벨은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높아졌습니다. 질 좋은 룬을 압도적인 양으로 생산하는 Larryr을 찾는 손님들은 날로 많아졌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번 돈을 다시 사업을 확장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Larryr의 비즈니스 모델은 혁명적이었고 그녀의 사업 감각은 대단했습니다. 그녀의 기업은 게임 내에서 전례 없는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이제 그녀의 직원들은 러너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러너를 고용하는 채용 담당자, 러너들을 훈련시키는 트레이너, 직원들을 관리하는 매니저, 사칭범이나 새치기하는 유저를 잡아내는 보안 담당자, 심지어는 CEO까지, 그녀는 적재적소에 사람들을 배치하며 조직을 꾸려 나갔습니다. 러너 지원자들에게는 20-30분에 걸친 교육과 사전 면접을 진행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러너를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모여 전사 회의도 진행했습니다.

첨부 이미지

Larryr의 사업은 룬스케이프 전체의 경제를 쥐락펴락할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Larryr 본인은 별로 돈을 벌지도 않았습니다. 수익을 흔쾌히 직원들과 나눴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러너들에게 지급하는 급여는 뉴비에겐 적지 않은 돈이어서 그들이 게임을 접지 않고 성장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관리직들에겐 서로를 알아보게 하고 소속감도 들게 하기 위해 하얀 파티 모자 아이템을 지급했습니다. 다른 유저들이 쉽게 살 수 없는 아이템이어야 단체 옷으로 의미가 있겠죠? 하얀 파티 모자의 가격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원들이 일을 하다 예기치 못한 사고를 입었을 때에도 Larryr이 손해를 메꿔주었고(4대 보험?), 틈틈이 이벤트를 벌여 그동안 번 돈을 사회에 환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멋진 건 Larryr의 은퇴입니다. 2006년, 아들이 룬스케이프에서 에버퀘스트2라는 게임으로 관심이 옮겨가자 Larryr도 쿨하게 아들을 따라 룬스케이프를 떠났습니다. Larryr은 게임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가지고 있던 하얀 파티 모자를 모두 팔아 그 돈을 모두 뉴비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효율적인 시스템 덕분에 그녀는 룬크래프트 경험치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2위와는 무려 5배나 차이가 났습니다. 그녀가 은퇴하고 나서도 3년이나 더 지난 2009년에서야 다른 유저가 1위 자리를 차지합니다. MMORPG를 한 번이라도 해보신 분이라면 누군가가 압도적인 1위 자리를 장기간 유지한다는것이 얼마나 보기 힘든 일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녀의 은퇴 후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자리를 대신하려 했지만 그녀만큼 사업체를 잘 굴리는 유저는 없었습니다. 그녀가 단순히 좋은 타이밍에 좋은 아이템으로 성공한 게 아니라 정말 역량 있는 사업가였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저는 Larryr의 일화에서 허생전이 떠올랐습니다. 이 세계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던 사람이 한 번 이 세계에 뛰어들자 판을 뒤집어버릴 만큼 큰 돈을 벌어들이고, 막상 본인은 그 돈에 별 미련을 두지 않고 필요한 데에 나눠준 뒤 스윽 사라져 버리는 전개가 허생전과 거의 동일해 보입니다.

참고로 이 룬스케이프라는 게임은 몇 년 전, 베네수엘라인들의 주요 직장으로도 유명해졌습니다.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파탄나면서, 이 게임을 열심히 해서 벌 수 있는 월 100달러 남짓한 돈이 평범한 베네수엘라 대졸자가 버는 임금보다도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게임 내의 멋진 기업체 이야기로 유명한 게임이 동시에 경제가 막장으로 치달은 국가 국민들의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면서도 한켠 씁쓸합니다.


더 알아보기

RuneScape Players Wiki, Larryr
RuneScape Players Wiki, Larryr's Runecrafting business
청원이, 혼자서 미친 짓을 벌여 단신으로 온라인 게임의 내용을 바꿔버린 유저들
나무위키, 허생전
Polygon, How RuneScape is helping Venezuelans surv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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