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로부터 종종 육아 스트레스가 없는지 질문을 받습니다. 물론 아주 없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아기 얼굴 한 번 보면 다 풀리는 것 같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아기가 웃는 것을 한 번 보면 다 풀려버리고 맙니다.
저는 여기에 제가 아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낭만적인 원인 뿐만 아니라 어떤 생물학적 반응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조사해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아기를 보면 뇌의 보상회로가 활성화되어 도파민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 결과 화가 누그러지고 쾌락과 애착을 느끼게 된다고 하니 제가 아기 웃음 한 방에 스트레스가 풀렸던 데에는 다 생물학적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기를 볼 때 인간은 집중력이 높아지고 섬세해집니다. 한 실험에 따르면 손과 눈의 협응력을 테스트하는 게임을 시켜보았을 때, 귀여운 이미지를 본 사람들이 더 나은 성과를 보였다고 합니다. 이런 반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가진 개체는 자손을 더 잘 돌볼 수 있어 생존, 번식에 유리했을 테니 이런 유전자가 우리에게 있다는 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신체 반응을 유발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아기를 아기로 보게 만들까요? 1949년 콘라트 로렌츠는 '베이비 스키마'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큰 머리, 높은 이마, 큰 눈, 작은 코, 통통한 뺨 같은 특징들이 귀여움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해 보면 아기들의 신체적 특성에 귀여움을 느끼고, 그런 특성을 가진 존재를 잘 보살피는 특성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반대는 어떨까요? 성체가 되어도 베이비 스키마를 유지한다면 귀여움을 유발해 많은 보살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가축들은 그렇게 베이비 스키마를 갖는 쪽으로 진화했습니다. 이것을 '유형 성숙'이라 하는데, 성체가 되어서도 새끼 때의 특징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개를 늑대와 비교해 봅시다. 개와 늑대의 유전적 차이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유전적 차이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유전적 차이 때문에 개는 늑대보다 큰 눈과 짧은 주둥이, 높은 이마와 동그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늑대라면 새끼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을 개는 다 늙어서까지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개 뿐만 아니라 가축들은 대개 야생 동물들에 비해 새끼의 특징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혹시 인간도 스스로를 가축화한 건 아니었을까요? 리처드 랭엄 교수는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유인원 중 단연 납작한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에 비해 우리는 이마가 평평하며, 턱이 작습니다. 성체가 되기까지의 시간도 굉장히 긴 편입니다. 즉 현대 인간은 아기의 특징을 많이, 오래 유지합니다. 이것은 가축에게서 나타나는 특징과 일치합니다.
인간이 최상위 포식자로 살아남았던 것은 어쩌면 억세고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귀여웠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아기 같은 귀여움을 유지했기에 우리는 서로 덜 싸우고, 서로를 더 잘 돌보면서, 더 결속력 있는 무리를 꾸려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테토남', '테토녀' 스타일보다는 '에겐남', '에겐녀' 스타일을 유지해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는 쪽이 생존에 유리했습니다. 우리의 귀여움은 다 쓸모가 있는 귀여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귀여움을 위하여 건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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