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왔습니다. 김오늘입니다. 이달의 《오철 북리뷰》는 두 편에 걸쳐 리사 보르톨로티의 《비합리성》을 소개합니다.

책의 내용에 관해서는 다음 편으로 미루고, 오늘은 ‘책 자체’에 관해 이야기를 먼저 해보려 합니다. 크게 보자면 지난 8월 특집호(상편, 하편)와 이어지는 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철학계와 철학 독자 사이의 균열
어느 정도 공력(?)이 찬 철학도들과 대화를 나눠 보면, 이들이 한국어로 된 철학책을 꺼리는 경향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공부 목적으로 책을 읽는 경우 한국어 도서, 특히 번역서는 후순위로 밀립니다. 가능하면 원문을 읽는 것이 가장 좋고, 언어 능력이 부족한 경우 자신이 읽을 수 있는 다른 언어로 번역된 권위 있는 역본을 읽으라는 권유를 으레 받습니다. 한국어 도서를 구매하는 경우는 사실상의 표준 역본이 자리잡았거나 (가령 《정암고전총서》 시리즈나,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책세상의 비트겐슈타인 및 니체 전집), 어느 정도 ‘팬심’이 작용하는 매니악한 작품들로 한정되는 듯하고요.
상대적으로 ‘읽기 쉬운’ 역서들은 자연스레 눈 밖에 납니다. 아예 별다른 관심이 없거나, 관심이 생기는 책(가령, 챠머스의 《리얼리티+》)의 경우 원서를 읽는 쪽을 택합니다. ‘Introduction to …’로 시작하는 개론서들도 비슷한 신세입니다. 문제는 이 책들을 비전공자들과 학부생들은 역서로 접하는 경우가 통상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학부생들은 교과서를 영어로 읽기보다는 한국어로 읽고자 하는 것이 당연하고, 비전공자 독자들은 서점에 이 책들이 신간으로 세워져 있으니 소개가 흥미롭다 싶으면 찾아 읽을 법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학교에 있는 사람들이 학교 밖에 있는 사람들의 지식을 아우르고 이를 넘어서는 대신, 두 계층이 서로 다른 지적 배경을 가진 채로 분화하고 마는 것이죠.
이 균열이 원서의 성격에 따라 두 가지 양상을 함께 보인다는 점에 주목할 만합니다. 철학 서적을 ‘개론서’와 ‘연구서’로 거칠게 나눠보죠. 개론서의 경우, 담긴 내용 자체는 전공자와 비전공자가 모두 공유합니다. 그러나 역서에서 채택된 역어가 연구자들의 통례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 결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 전공자들과 비전공자들 간의 소통이 어려워집니다. 학부에서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과정에서는 역서를 통해 익숙해진 낱말들을 잊고 대학원에서 사용하는 낱말들을 새로 익혀야 하는 낭비가 생깁니다. 이미 한국어로 한 번 공부했던 책을 영어 또는 원어로 다시 읽어야 하는 수고는 덤입니다. 학교의 안팎에 불필요한 담장이 두 가지 형태로 생기는 셈입니다.
연구서의 경우, 담긴 내용이 전공자들에게는 비주류 주제 또는 입장을 다루는 경우가 (특히 최근의 역서들에서) 많이 보입니다. 전공자들은 자기 공부할 것도 이미 많으니, 아주 훌륭한 책이 아니라면 굳이 이 책을 찾아 읽을 이유를 갖지 못하고요. 나아가, 연구서의 경우 역자들 자신도 그 책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초벌 번역 단계에서 오역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그런 오역들이 출판 단계에서까지 교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곤 합니다. 그 결과, 전공자들은 찾아 읽는다 하더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나오니 다시 원서를 찾아 읽게 되고, ‘역시나 한국어 책은 별로야’ 하며 관심을 줄여 나갑니다. 비전공자들은 오역이 오역인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주제에 관한 잘못된 이해를 쌓아가고요.
케이스 스터디
서평을 위해 《비합리성》의 서론부터 읽어 나가는데, 상기한 문제들을 포함한 다양한 번역 상의 문제들이 보였습니다. 마침 지금 손에 잡힌 책이니까요, 책을 읽을 분들께 참고시켜드릴 겸 차례대로 짚어보겠습니다. 한 가지 밝혀두자면, 아래에서도 말하겠지만 이것이 《비합리성》이라는 책 한 권의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앞서 여러 북리뷰들에서 지적했던 문제들이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고,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하나 꺼내 펴 보면 비슷한 문제들을 역시나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여하간, 사례 연구를 진행해 봅시다.
원문의 임의 수정
《비합리성》의 오역 사례를 살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첫 장을 넘기자마자였습니다. 각주가 길게 달려 있어 각주를 읽었는데, 전혀 예상 못한 말이 나와 있던 것이지요:

“저자는 비인간 행위자에 비인간 동물만 언급했으나, 역자가 ‘인공 지능 행위자’를 추가했다” — 이 말이 1번 각주에 들어가 있습니다. 일단 문제는, 이 1번 각주가 역주라는 점입니다. 원문과의 구분을 위해, 역주에는 통상 대거 부호(†)나 별표(*)를 사용합니다. 《비합리성》의 경우 별도의 각주가 없기는 하지만, 독자들이 각주를 저자주로 혼동하지 않게 하는 편집 단계에서의 고려는 있었어야 합니다.
각주의 부호 처리를 눈감아준다 하더라도, 이 각주가 달린 이유 자체가 납득이 어렵습니다. 각주의 말대로면, 역자는 원서의 내용에 없는 내용을 추가했다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그렇다면 이 판본은 한국 독자들을 위해 별도로 증보된 ‘한국특별판’ 같은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렇다고 표기를 해 두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에 관한 언급은 여기저기를 뒤져봐도 없고, 원저자의 허락을 받아 변형한 것이라면 그 점이라도 쓰여 있었어야 할 텐데 그러한 언급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오역의 사례에 불과해집니다.
괄호의 역할 혼동과 전문 용어 오처리
원서를 함께 펴놓고 몇 장 더 넘겨봅니다. 각 장의 개요를 소개하는 부분인데, 원문을 아무리 보아도 찾을 수 없는 문장이 처음부터 등장합니다.

찾아보니, 첫 문장은 원래 다음과 같더군요:
Unlike clouds, rocks and plants, human agents have mental states with content (intentional states), and their intentional states drive their actions.
일단 전문 용어에 대한 비표준적 번역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의도 상태’로 번역된 것은 원문의 ‘intentional states’인데, 이는 지향성(intentionality)을 함축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지향적 상태’로 옮겨지는 것이 표준적인 낱말입니다. 지향성은 현상학의 핵심 개념이고, 바로 이 개념으로부터 ‘intentional states’가 해석되어야 하므로 ‘의도 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원문을 쉽게 이해시켜주지도, 공부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는 엉뚱한 번역입니다. 그런데 이 ‘의도 상태’라는 것이 한 두 번 등장하는 것이 아닌, 책의 핵심 개념어거든요. 이 책을 쭉 읽고 나면 자신이 현상학 개념에 관한 설명을 들었음에도 그랬는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죠.
만약 역자가 의도를 갖고 이렇게 번역한 것이라고 선해하자면, 적어도 괄호 안에 ‘intentional states’라고 병기해 두었어야 자연스럽습니다. 또, 각주 1번을 길게 부연했듯, 여기에서도 자신이 왜 ‘지향적 상태’가 아닌 ‘의도 상태’라는 역어를 취했는지 부연했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역자가 책임을 충분히 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원문의 ‘(intentional states)’라는 괄호의 기능을 오인한 것도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괄호는 앞말의 사례로서 어떤 일상적 예를 (가령 이 괄호에서처럼) 드는 기능을 하지 않습니다. 앞 표현에 대응되는 전문 용어가 무엇인지 소개하고, 이후 앞 표현 대신 이 전문 용어를 쓰겠다고 하는 선언 (용어 정의) (← 바로 이 괄호의 용례!) 용도로 괄호를 쓰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 부분의 올바른 번역은 다음과 같았어야 합니다:
구름이나 바위, 식물과 달리 인간 행위자들은 내용을 갖는 심적 상태(지향적 상태)를 가지며, 그들의 지향적 상태는 그들의 행위를 일으킨다.
또는
구름이나 바위, 식물과 달리 인간 행위자들은 지향적 상태(내용을 갖는 심적 상태)를 가지며, 그들의 지향적 상태는 그들의 행위를 일으킨다.
망가진 인용 표기
바로 같은 쪽에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더니 또 이상한 표기가 나옵니다:

구분점의 사용에 있어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내주의 일반적인 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 연도, 쪽수)
한 저자의 여러 문헌을 인용할 때는,
(저자, 연도; 연도)
그런데 우리 책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던 것이죠:
(보르톨로티, 2005a, 「합리성 없는 지향성」)
일단 이 표기에 두 문제가 있습니다. 내주에서 저자 부분에는 참고문헌 목록(bibliography)에 기재된 성(surname)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보르톨로티의 2005a 문헌에는 성이 로마자로 ‘Bortolotti’라고 되어 있어요. 이걸 한글로 옮겨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내주 방식은 저자명과 연도로 문헌을 가리키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위의 세번째 항에 논문 제목을 넣어서는 안되고, 심지어 그것을 국역해서 넣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혹시나 원서에서 이미 이 문제가 있던 것이 아닐까 싶어 원서를 찾아보았는데요,
(Bortolotti 2005a, 2005b)
역서에 없던 2005b가 등장합니다. 아하. 2005년의 두 저작을 함께 인용하고 있는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번역 단계에서 2005b를 날려버리고, 2005a와 그 표제의 번역된 표현을 채워놓았던 것이죠.
인용 표기가 망가진 채로 책이 유통되는 것은 단순히 역자의 평판이나 독자의 곤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글을 읽고 쓰는 문화 자체를 오염시킵니다. 글쓰기 강사들이 과제로 자기 전공 분야의 책을 한 권씩 가져오라고 했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그런 뒤, 그 책의 인용 방식을 연구해서 각 학제별 인용 방식에 관해 발표를 하라고 했다고 하죠. 이때 《비합리성》을 들고 간 안타까운 철학과 학생은 철학계의 인용 관행을 잘못 이해한 채 잘못된 이해를 교실에 전파할 겁니다. 철학 지식뿐 아니라 글쓰기 방법에서조차 균열이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유감스럽습니다.
직역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직역
이렇듯 다양한 원문의 변경이 있었습니다만, 다소 의아한 직역도 있습니다:

‘대합조개’ — 갑자기 아주 특정한 조개의 종류가 나와서 뭔가 엄청난 사실이 숨겨져있나 했습니다. 그런데 원문은 그냥 ‘clam’입니다. 우리가 ‘조개’라고 통칭하는 것을 영어로는 ‘clam’과 ’scallop’(가리비)으로 나눈다고는 합니다만, ‘clam’이 ‘대합’에 대응되는 낱말은 아닙니다. ‘clam’에 정확히 대응되는 낱말이 없을 뿐이니 ‘조개’ 정도로 간단히 옮겼으면 되었을 일입니다.
지시어의 기능 혼동
끝으로 4장의 개관에 나오는 한 가지 오역 내지는 아쉬운 번역을 짚고 가겠습니다.

첫 문단의 두번째 문단에는 이런 구문이 나옵니다:
여기서 증거를 신뢰함은 […]
이는 마치 앞 문장에 ‘증거를 신뢰함’ 내지는 동등한 의미의 어구가 나오고 있고, 이를 이하에서 설명함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은 증거의 신뢰에 관한 부연 설명이라기보다, 증거의 신뢰에 관한 새로운 서술입니다. 다시 멈칫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원문을 보면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The rational agent forms beliefs, reconstructs memories and develops narratives that are constrained by evidence and free from motivational influences. This reliance on evidence underlies two enterprises that have been regarded as distinctive of human agency as the capacity to control emotions: […]
아하, ‘this reliance on evidence’를 옮긴 것이었네요. 원문을 보니 취지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합리적 행위자에게 증거 의존적 성향이 있는데, 이러한 증거 의존적 성향의 기저에는 인간의 두 가지 소양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제가 아주 당황스러웠던 것은, 역자께서는 제게도 많은 도움이 된 책들을 여럿 번역해 온, 믿을 만한 철학 전문가시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번역 상의 문제들을 역자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출판사의 문제인가? 그렇게 보기에도, 연암서가 역시 오랫동안 다양한 교양 철학 서적을 출간하며 잔뼈가 굵은 출판사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두 가지 문제가 있었겠다고 추측해봅니다. 한편으로, 철학에 전문적인 검수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담당 편집자가 재고, 삼고, … 수많은 퇴고를 거치기는 한다지만, 편집자의 눈만으로 ‘이 문장이 철학자가 했을 말 같지 않은데?’ 같은 생각에 이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지향적 태도나 ‘this reliance’의 번역 등의 문제는 이미 언어철학, 감정의 철학, 인식론 등에 충분히 익숙해야 보였을 문제이고, 철학에 전문성이 있는 검수자가 없었더라면 어떤 편집자가 붙어도 잡히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편집자가 인문학 학술 도서의 편집 관행에 관해서는 익숙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원문의 임의 수정이나 각주 부호화 방식, 내주 표기법 따위에서의 문제는 학제에 특이하게 적용되는 것이어서, ‘올라운드 편집자’ 한 명으로는 문제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얇은 책이고, 애초에 철학 전반에 관한 입문 시리즈에 속하는 한 권을 번역한 것이니 이른바 ‘인문교양’ 서적 스타일로 편집하고 넘길 만합니다. 하지만 해외의 그러한 시리즈 서적들이 으레 그렇기도 하고, 책의 내용을 보더라도 개론서, 개념 소개서보다는 연구서의 성격이 강합니다. 이런 책을 이렇게 편집해서는 안 되었을 일입니다.
궁극적으로 무엇이 문제였을까 생각해 보면, 철학 연구 경험이 있는 검수자가 편집 단계에 있지 않았던 것이 원인입니다. 물론 역자가 철학 전문가이기는 하지요. 하지만 명망 있는 대학 교수님들도 자기 연구논문을 익명의 심사자들을 통해 평가받습니다. 달리는 선수는 자기 폼을 모릅니다. 자기가 어떻게 뛰고 있는지를 제3자의 눈에서 평가할 사람들이 선수에게도 필요합니다.
그 평가자들이 바로 담당 편집자라면 아주 좋았을 것입니다. 해외의 대학 출판사나 그 외 명망 있는 학술 도서 발행처의 편집자들은 실제로 자신이 담당하는 원고에 대해 학술적인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철학 석사, 박사들을 편집자로 고용하는 것은 출판사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편집자 교육은 새로 다 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교육시킨 뒤에 초임 편집자 월급을 주겠다고 하면 이 사람들 그만두고 논술 학원으로, 아니면 유학 준비하러 도망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편집자는 아니더라도, 학술도서만큼은 저서와 역서를 가리지 않고 프리랜서 심사자들에게 검수를 의뢰하는 것도 답이 아닐까요? 통상 학술서의 감수란 교수들에게 맡기곤 하니, 권위도 마땅히 없는 심사자들에게 검수를 맡기는 게 언뜻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감수가 책에 면 세우기 위해 하는 겉치레로 끝날 것도 아니고, 철학 도서들에서는 자꾸만 이상한 오류들이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까. 뭔가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이렇게 말했는데 이미 연구자들 검수를 받은 책이라면 상당히 당황스러운 일이겠습니다마는….
쉼표
뭔가 열내는 소리를 너무 많이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서평 시리즈는 보르톨로티의 2015년 책에 대한 것이 아닌, 2026년 8월의 서상복 역, 연암서가 발행의 역서에 대한 것이니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편에서는 내용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나눠보지요. 그때도 오역들이 있다면, 필요할 경우 원문을 대조하며 설명하겠습니다. 그럼 남은 9월의 반절도 평안하세요.
김오늘 드림.
도서 정보
《비합리성》
리사 보르톨로티 저・서상복 역.
연암서가, 2026년.
20,000 원.
오류 정정
앞선 판에 있던 3장 개관 관련 내용에 오류가 있어 이를 삭제했습니다. (2026. 9. 1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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