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에서 이어집니다:
제대로 된 철학책 ⊆ 제대로 된 책
출판사 이야기를 한 김에 살짝 선을 넘어(?) 보겠습니다. 특히 신간을 보는 일이 많아지며 강해진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말인즉...
‘제대로 된 책’을 만들려고 하는 철학 도서 발행인들이 충분히 다수인 것이 맞나?
철학 도서의 주제 폭이나 홍보량, 표지 디자인의 심미성 따위를 척도로 삼는다면, 제가 인지하는 시기 (기껏해야 십 수 년 정도이긴 합니다만) 안에서 비교할 때 지금의 수준이 아주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철학 도서는 아무래도 ‘도서’의 한 범주이고, 도서 시장이나 개별 도서의 내재적 가치를 책의 가짓수나 마케팅 및 시각 디자인에서의 ‘감도’로 따지기에는 어려운 것 같아서, 철학 도서 시장의 수준이 또한 높아졌느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확언이 어렵다고 느낍니다.
‘도서’라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입니다. 거기에 연계된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있습니다. 양면 인쇄 도서는 쪽매김을 바깥쪽에 위치시키고, 양장본 내지는 하드커버 제본을 하는 경우 가름끈을 부착하고 또한 겉표지를 별쇄하는 식의, 겉표지와 속표지 사이에는 색지를 별지로 부착하고 속표지는 단편인쇄하며, 표지와 같은 방향의 첫 쪽을 1면으로 인쇄를 하는 식의 관행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은연중에 ‘아, 이런 게 책이 생겨먹은 꼴이구나’라는 생각을 품게 되고, 이에 따라 ‘만듦새 좋은 책’의 기준을 또한 형성합니다.
‘학술 도서’라는 보다 세부적인 주제로 가면 또 다른 관행이 부가됩니다. 번역서의 경우 판권면에 원서의 서지 정보가 병기됩니다. (이 부분은 실제로는 법적 문제와 관련있을 텐데, 종종 기재하지 않는 출판사가 있어 아이러니합니다.) 편집 상의 변화가 생길 경우 판이 갱신됩니다. 각 장 말미 또는 부록으로는 언급된 문헌들의 서지 정보가 나열됩니다. 주요 용어들의 경우 그 용례가 등장하는 쪽수들이 부록에 포함된 색인란에 정리되어 실립니다. 문헌들을 대하는 현대적인 학계 관행은 이러한 문화에 바탕해 있습니다.
다행히도, 훈련 받은 편집자들은 이러한 부분에서 나름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학술서를 전문으로 다루지 않은 편집자라 하더라도 이러저러한 관행이 있다는 것에 관한 대략의 이해는 있습니다. 그래서 다행히도, 그러한 이들을 고용해 운영되는 다수의 주류 출판사들은 나름대로 괜찮은 꼴의 책을 내고 있습니다. 이따금 전통적인 관행에 부합하면서도 도전적이고, 심미적으로도 훌륭한 디자인으로 책을 발행해 놀라움을 줄 때도 있고요.
그런데… 책 내기가 너무 쉬워진 탓일까요, 자금력으로 밀어붙이겠노라는 도전이 많아진 것일까요? 도서 편집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어 보이는 책들이 또한 나오고 있습니다. 교양/시사 서적을 주로 다루는 대형 출판사에서 이런 식으로 책을 찍어낼 때는 차라리 ‘교양 서적이니 문제 없지’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전문 학술 서적으로 간주됨 직한 외서들마저도 수준 낮은 번역과 저질의 편집 상태로 출간되는 경우들이 있어 당황스럽습니다.
이를테면 ‘제대로 된 철학책’의 여하를 떠나 ‘제대로 된 책’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책들이 철학 도서 시장에 너무 많아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옳게 된 책이 철학 도서 시장에 없다고 한다면 그냥 한국어로 된 철학책을 안 읽으면 그만입니다. 외국어, 가령 영어로 된 문헌을 읽을 수 있다면 영어로 된 책이나 논문, 전자 자료를 통해 철학 공부를 하면 됩니다. 한국어 외에는 익숙한 언어가 없다 하더라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LLM 챗봇은 단기간에 수많은 정보를 건네주니까요.
철학 도서 소비자로서 우리의 할 일
그래도...

철학책 사랑하시죠?^^*
우리가 마냥 ‘시장에 있는 철학책은 다 별로야. 그냥 철학책 안 읽고 살래’라고 하면, 아무래도 시장이란 수요와 공급이 만드는 균형으로써 형성되니까요, 괜찮은 출판사들은 씨가 마르고 ‘딸깍’ 신공으로 철학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 지적 허영만 자극해주는 출판사가 내놓은 저질 도서들로 시장이 가득 차고 말지 않을까요? 그건 아무래도 제가 원하는 미래는 아니고, 구독자 님이 원하시는 미래도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를 것은 거르고, 고를 것은 고르며 철학 도서 시장의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가 드리는 당부입니다. ‘나는 잘 모르니 그럴듯한 문구로 홍보하는 책으로 대충 골라 읽을래’와 ‘나는 이 시장이 너무 싫으니 책은 한 권도 안 사고 가끔 내 선생님들이 번역해서 내셨다는 책이나 한 권 사서 싸인받을래’의 양분된 성향은 밝은 미래를 담보하지 못합니다. 전자의 독자들은 더 좋은 책을 골라 읽을 수 있도록 공부를 해야 하고, 후자의 독자들은 무엇이, 왜 더 좋은 책인지 알려주는 지도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도서 편집 관행이나 학계의 번역 관행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실천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행들을 공부하며 좋은 책에 관한 나름의 기준을 마련하고, 이에 미달하는 도서는 칼같이 구매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죠. 반대로, 훌륭한 편집 상태의 책이 나오면 나의 흥미와 약간의 괴리가 있더라도 과감히 구매해 보고요. 한 줌이긴 합니다만, 우리만이라도 이런 실천에 참여한다면 도서 시장에 나름의 경고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철학 도서 시장이 아주 큰 것도 아니니 피차 한 줌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과정에서 ‘어떤 책을 응원하고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는 것은 대단히 피로한 일입니다. 그런 피로감을 모두가 겪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오늘의 철학 뉴스레터》가 있는 것이고요. 철학 책 읽는 사람들이 고생하지 않고 철학 책 고를 수 있게 하기 위한 알림판. 그것을 목적으로 매달 〈이달의 철학〉이나 〈오철 북리뷰〉 등을 만들어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세상 모든 철학 연구를 아는 것이 아니고 모든 철학책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유사한 큐레이터들이 더 많아져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를 위한 동료도 생기겠지요?
철학 도서 발행인들께
끝으로… 보고 있으실지 모를 (철학) 도서 발행인들께 몇 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 책 먼저 고르고 역자를 고르지 마십시오. 업체 카탈로그에 실린 외서 신간 소개를 보고 주제가 흥미로워 책을 고른 뒤 해당 언어에 능통한 번역가를 프리랜서로 섭외해 역서를 발행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번역가는 해당 도서의 주제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다보니 도서를 번역하는 것이 옳은 결정인지에 관한 아무 기준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해당 분야에 정통하지 않은 편집자께서 카탈로그에 딸려온 개요와 도서 샘플을 보는 것으로는 이를 번역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일지, 아니면 쇄당 50부 정도 인쇄해 초판 2쇄로 절판될 책일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 유의미한 소비층은 전공자이거나 전공자의 친구들입니다. 전공자들의 선호를 살피는 경우에도, ‘그것은 대중적 주제가 아니다’라며 쉽사리 발행을 결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공자이거나, 전공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이거나, 전공자의 친구인 것이 아니고서야 철학책을 살 사람 자체가 많지 않습니다. 전공자들이 책을 안 산다고는 하지만, … 책을 안 사는 것은 정가 28,000원의 수준 낮은 책을 살 여유가 없어서이지, 철학책을 애초에 안 사는 사람들인 탓이 아닙니다. 밥 두 끼 먹을 돈으로 질 떨어지는 역서를 사느니 해적판 원서를 구해 아이패드로 보는 식인 것이고, 해적판이 없는 원서의 경우 78불을 주고 책을 직구하는 것이 전공자들입니다.
- 프리랜서 번역가를 쓰겠다면 적어도 전공자에게 1회 검수는 맡기십시오. 전공자들은 밥먹고 하는 일이 논문이랑 책 번역해서 발제문 만드는 겁니다. 프리랜서 번역가들의 작업물은 언뜻 봐서는 더 수려한 한국어 번역 같지만, 출판되고서 보면 원문을 대조하지 않고서는 이해 자체가 안되는 경우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래서는 전공자들 자신도 그 책을 읽지 않고, 누구에게 감히 추천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아무도 안 읽는 책이니 사는 사람도 없고, 각 도서관에 납품된 100여 권의 책 외에는 수요가 없어 절판에 이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전공자들이 큰 돈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몇 십 만원이라도 주고 최종 검수본이라도 한 번 읽어보게 하십시오.
- ‘다 싫다. 돈 써서 뭐하냐.’ — 그런 생각이 들면, 판권이라도 사지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 감당도 못 할 책을 돈 될 것 같다며 판권을 사서 엉터리 번역을 해 출간하는 책들을 보는 데에 모두가 지쳐 있습니다. 책을 분별할 능력도 없고, 다른 이에게 분별을 위탁할 돈 쓸 의지도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더 좋은 발행인에게 기회를 넘길 양심은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초면의 연구자가 대뜸 그 책을 들고 와 번역 출간을 기획해보지 않겠냐고 묻는다면, 그때가 비로소 적절한 시기이 것이겠죠. 그 적기를 기다리는 것에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적기랄 이유가 전혀 없는 중에도 일단 밀어붙여 엉터리 책을 만들고, 그렇게 책 시장을 아무도 안 살 종이 더미로 채우지는 말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당부입니다:
- 책을 제대로 만들어 주세요. 맞춤법 교정이나 윤문도 중요하지만, 조판과 색인, 제본과 같은 요소들도 ‘제대로 된 책’을 분류하기 위한 중요한 참고 사항입니다. 하나 하나가 다 돈이라지만 학술 서적조차도 제대로 된 꼴로 제작되지 않는다는 점은 꽤나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면서 정가는 또 36,000 원이고요.) ‘이럴 거면 한국어로 된 책 뭐하러 사냐’ 하는 생각의 확산은 언젠가 철학 연구서를 재쇄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시장을 작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책값은 지금도 비쌉니다. 제값을 한다면 아깝지 않으니, 가격을 올려서라도 제대로 된 책을 한 쇄라도 찍어주십시오.
- 훌륭한 학술 도서를 애들 동화책처럼 편집하지 마십시오. 간혹 서체의 사용이나 디테일한 디자인 요소 배치에 있어, ‘이런 책에 왜 이런 외관을 넣었지?’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책들이 있습니다. 역서의 경우가 더 빈번했던 듯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책을 ‘덜 딱딱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전략은… 누구한테 통하길 의도하는 것인지 사실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나가며
출판계의 비대칭에 관해 자주 생각합니다. 많은 소비자들은, 출판계 종사자들이 자신이 내는 책에 관해 꽤나 전문성이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데, 시장 자체가 작은지라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반면 영세 출판사들은, 존재하는지도 불분명한 ‘대중 철학 독자층’ 같은 것을 상정하며 그들의 입맛에 맞추는 것이 회사가 잡을 수 있는 동아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출판사들의 재무제표를 볼 수는 없습니다만, 이것이 그만큼 설득력 있는 기대인지 모르겠습니다. 철학과 안에서도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이 소수인데, 대체 대중 철학 독자층의 규모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 것일까요?
소비자와 공급자가 피차 제한된 정보만을 가진 상황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탓일까요? 가치 있는 철학 신간 도서를 발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도서 분류 상으로는 철학 도서이지만, 실제로는 철학과 학생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고, 옆 동네 문학과 학생들에게나 나름 인지도가 있는 작가의 책이 나오는 경우가 너무 잦습니다. 철학이니 인문학이니 이름을 단 채로 중학생 일기장 같은 정도의 책을 유명인이 나와 홍보하는 경우도 잦고요. 단기간을 고려할 때 이런 전략이 소비자와 공급자에게 모두 이득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아서는, ‘철학 공부합니다’라고 말하면 ‘이름 짓는 분이세요?’ 하고 묻는 구태한 문화와 유사한 대중적 이해를 퍼트리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월말마다 철학책 고르는 생활을 한 것이 어느새 다섯 해입니다. ‘철학책을 어떻게 골라야 할까?’ — 그간의 경험이 나름 알려준 것이 있었고, 두 편의 특집을 통해 이를 나눠보았습니다. 한편으로 우리 독자들의 몫이 있습니다. 철학을 어느 정도 알아야 옥석을 가릴 수가 있을 테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쩌면 더 중요하게는, 발행인들의 책임이 크게 있습니다. 독자들이 아무리 잘 준비되어 있어도, 좋은 책이 출간되지 않는다면 책들은 전부 ‘거를’ 대상이 될 뿐입니다. 하지만 철학 도서 출판업자들 모두에게 철학 전문가가 되도록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러니 당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꺼이 분업에 참여하라고 말입니다. 전공자들에게 충분한 권한을 위탁하고, 출판업계에서는 자신이 잘 하는 것을 하고. 그러고 나면 철학책 고르는 일도 한결 수월해지리라 기대합니다.
북리뷰를 대신해 보내드리려고 한 두 자 적기 시작했던 것인데 말이 길어졌습니다. 돌아오는 수요일, 8월의 철학 신간 도서들을 가지고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김오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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