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06] 🍄 사실 전 못난 사람이 아니에요.

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6월의 첫날 인사드리는 로이입니다. 서울에 거주하시는 구독자분들은 어제 많이 놀라셨죠? 아마 다른 지역 구독자분들도 뉴스를 통해 들으셨겠지만, 갑작스러운 사이렌 소리와 긴급 대피 문자로 한바탕 대소동이 있었습니다. 요즘 게으른 늦잠이 습관이던 저도 사이렌 소리에 잠에서 깼죠. 겨우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부랴부랴 짐을 싸고 집을 나서려고 했습니다. 저는 정말 실제 상황인 줄 알았거든요.

다행히 오발령이라는 이야기와 경보 해제 소식이 이어졌지만,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이렇게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오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거울 속 제 모습을 보았어요. 씻지도 않고 그저 청바지에 티셔츠, 후드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이었습니다. 정신없이 가방에 노트북과 충전기, 이어폰, 물 한 병과 우산, 수건 한 장을 챙겼고 주머니에는 휴대폰과 지갑, 그리고 자동차 키가 있더군요. 이것들이 전쟁, 혹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제가 챙기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 중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또 쓸모없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심지어 연인과 가족과 함께 찍었던 사진 한 장도 챙길 정신도 없었습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제가 챙긴 물건들이 어쩌면 제 삶을 표현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웃긴 것은 그 사이에도 음악을 듣겠다며 이어폰을 챙겼다는 것입니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부분인 요즘, 아마 전쟁으로 인터넷이 차단된다면 음악을 들을 수도 없겠죠? 어찌 되었든 공포스러웠던 아침은 지나가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습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이어폰을 끼고 이번 주 소개할 노래를 들으며 출근길에 올랐습니다. 출근길 지하철은 전쟁 따위는 먼 나라 이야기인 것처럼 평범했습니다. 이따금 피부에 살짝 섬찟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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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 SSERAFIM -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르세라핌(LE SSERAFIM)은 레드벨벳과 뉴진스에 이어 요즘 가장 많이 듣고 있는 아이돌이다. 심지어 최근 발매한 정규 1집 [UNFORGIVEN] 전 트랙을 정주행하면서 듣고 있다. 르세라핌이야 데뷔 때부터 큰 화제를 모았고 미니앨범 수록곡 <FEARLESS>, <ANTIFRAGILE>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어 달리 설명이 필요 없을 테다. 

재미있는 건 르세라핌은 그룹명에서부터 발매하는 곡들까지 꾸준히 자신만의 서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 서사와 컨셉이 전혀 다른 멀티버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와 꽤 밀접하다는 것.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간다"는 큰 주제가 멤버 개인의 서사와 결부되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오늘 소개하는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에서는 르세라핌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더욱 노골적으로 전하는 곡이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딴 이브(하와), 지나친 호기심으로 금기를 깬 프시케, 그리고 지하실 문을 연 푸른 수염의 아내까지. 다양한 신화와 구전 속 인물들을 통해 금지된 것에 대한 갈증을 드러낸다. 그룹의 주제나 컨셉과는 별개로 음악적으로나 퍼포먼스적으로도 매력 있는데, 특히 도입부의 시퀀스는 저지 클럽 비트와 반복되는 가사, 그리고 춤까지 어우러져 매우 중독적이다. 중간의 Boom Boom 부분은 너무 틱톡스러워서 아쉽다. 또, 금기라는 주제를 조금 더 강조해서 어둡게 풀어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 Rad Museum - Forever (feat. So!YoON!)

다양한 음악 페스티벌들이 연이어 개최되고 있는 가운데, 올해 꼭 가야 할 단 하나의 페스티벌로 <펜타포트 페스티벌>을 뽑겠다. 이번 라인업에는 PRIIISM에서도 소개한 여러 아티스트들이 이름을 올렸는데, 그중에 이번 기회를 통해 꼭 라이브로 만나고 싶은 아티스트가 있었으니, 바로 Rad Museum이다. 2017년부터 싱글로 활동하던 Rad Museum은 2022년 마침내 정규 앨범 [RAD]를 발표했다. 해당 앨범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아 온음에서는 2022년의 R&B/소울 앨범으로, 한국 힙합 어워드에서는 2023년의 R&B 앨범으로 뽑혔다.

이 중 가장 좋았던 곡은 마지막 트랙인 <Forever>다. 아니 이 앨범에서만 좋은 것이 아니라 최근 음악들 중에서도 가장 좋았다. 어쩌면 나에게 있어 2023년 상반기 가장 큰 발견일지도 모르겠다. 장장 7분 20초나 되는 긴 곡인 데다가 구성도 굉장히 독특해 Rad Museum이라는 아티스타가 이 마지막 트랙에 모든 것을 갈아 넣은 것 같다고 느낄 정도다. 특히 가사가 매우 철학적인데, 도대체 이분이 어떤 삶을 살았길래, 나이는 몇이길래 이런 깊은 고민을 하는 걸까 싶었다. 찾아보니 1990년생. 그래 할 만하다.

2절부터 목소리를 맞추는 황소윤의 보컬은 매번 들을 때마다 놀랍다. 그녀 덕분에 이 노래의 깊이가 더해진다. 노래가 끝난듯 할 때 새로운 사운드로 전환이 되는데, 이때는 마치 고해성사하는 분위기가 된다. 마치 다니엘 시저(Daniel Caesar)의 그것과 닮아있는 듯하다. 그래서 더 좋다. 꼭 한번 들어보시길 바란다. 언제든 좋지만, 특히 밤에 추천한다. 

🍄 지바노프 - 난 아니야 / NOT ME!

음악을 찾고 찾을수록 훌륭한 아티스트들은 많이 발견한다.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새로운 아티스트를 알게 되고 취향에 맞는 음악을 듣고 발굴하는 것은 정말로 즐거운 일이다. 누군가의 추천을 통해 알게 된 지바노프(jeebanoff)는 이미 다수의 앨범을 발매하면서 R&B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확고한 팬덤을 보유한 아티스트다. 그가 2016년 발매한 EP [so fed up]은 리드머의 2010년대 한국 알앤비 앨범 베스트10에서 무려 6위에 올랐다. 자이언티와 크러쉬보다 높은 순위다.

오늘 소개하는 노래 <난 아니야 / NOT ME!>는 2018년 발매한 앨범 [Talking Book]의 타이틀 곡이다. 노래가 끌렸던 것은 오로지 가사 때문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내가 못났던 게 아니야, 돌이켜 생각해보니 난 정말 나빴던 게 아니야, 내게 잘못이 없다 말해줘 내 맘이 편할 수 있게...  와씨, 뭐지 이거? 내 이야기인가? 왜 이렇게 찌질하지? 이 극사실주의 찌질함은 무엇이란말인가!

지바노프도 모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 노래는 진짜 못난 사람이 자기 혼자서만 난 못난 사람이 아니야라며 생각하며 곱씹는 노래"라고 말했다. 나 역시도 이 노래를 들으며 터벅터벅 걷는 퇴근길에 갑작스레 기억 너머에 있는 수년 전 옛 순간이 떠올랐다. 조용한 골목길에 가로등만 켜져 있는 퇴근길이었는데, 걷다 말고 가로등 아래 발걸음을 잠깐 멈춰 세웠다. 그리고 들릴락 말락 미세한 입술로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맞아. 난 잘못이 없어. 사실 니가 나빴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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