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17] 🌻 한여름의 느릿한 산책에 함께할 노래들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숑🌻입니다. 어제 아침 집 밖을 나섰다가 놀랐습니다. 이르게 집을 나설 일이 별로 없다 보니 그 시간의 온도를 오랜만에 실감했거든요. 우리가 잠자고 휴식하고 노동하면서 시간과 정직하게 맞서는 동안 이 계절도 조용히 자기의 일을 하고 있었구나 싶고, 매미의 한철처럼 결국 끝이 있는 이 시기를 탓해봐야 무엇 하겠나 싶고... 물론 여전히 한낮은 등땀을 흠뻑 쏟게 무덥지만요.

언젠가의 레터에서 적은 것도 같은데, 저는 늘 여름을 가장 싫어하는 계절로 꼽아 왔습니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여름의 숨은 매력과 속속 마주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다시 돌아오는 여름을 꽤 반기는 사람이 되었어요. 아무래도 정확히는 '여름'보다 '여름에 있었던 일'들에 좋은 기억이 켜켜이 쌓여서겠죠.

며칠 전 열렸던 인천 펜타포트 락페스티벌에서 김창완 밴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틀 뒤가 입추죠, 우리에겐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이 여름을 잡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 없었음에도 '이 여름을 잡아야 한다'는 짧은 한마디에 왜 그리 매료되던지!

요즘 저는 아침 저녁으로 표정을 달리하는 공기를 느끼며 이 여름을 잡을 방법을 오만 방면으로 고민하고 있는데요. 그 과정은 사실 단순하고 즐거워서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산책하는 걸음의 속도를 줄이며 감각의 밀도를 더 높여보는 거예요. 덕분에 더욱 매력을 느낀, 여름끝의 플레이리스트 세 곡을 공유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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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inger Root - Loneliness

여름날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시티팝을 빼놓을 수 있을까? 최근 알게 된 진저 루트(Ginger Root)는 2017년 캘리포니아에서 결성된 밴드다. 중국계 미국인이자 작곡, 보컬을 맡는 카메론 류(Cameron Lew)가 프론트맨이자 심볼로서 밴드를 이끄는데 그가 가진 캐릭터성이 만만치 않다. 올해 초에는 내한 공연에 이어 펜타포트 락페스티벌 무대에 섰을 만큼 글로벌 스타(!)인데 이제 나만 알고 싶은 인디한 매력을 곁들인...

이들의 뮤직비디오 몇 편을 찾아봤는데 컨셉이 참 확실하고 독특하다. 2020년 이후의 촬영 장비로 이렇게 리얼하게 옛스러운 화질 구현이 가능하다니? 정녕 80년대 찍은 영상이 아니라고? 하긴 아이맥스 70mm의 시대에 안되는 게 어딨겠는가. <Loneliness>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방송사고를 막기 위해 아이돌 대신 무대에 올랐다가 슈퍼스타가 되는 프로듀서의 이야기가 클리셰 가득하게 담겼는데, 카메론 류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일품이다.

🌻 유희열 - 여름날 (Feat. 페퍼톤스 신재평)

평소 자주 걷는 집 근처 천변은 지금 풀숲이 무성하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다 보이던 자리에 드문드문 초록이 보이더니 이제는 과장 조금 섞어 정글처럼 키가 커졌다. 한여름의 산책은 어느 시간대든 팔다리가 축축해지는 일을 피할 수 없지만, 생명력을 듬뿍 머금고 전성기를 과시하는 녹음을 바라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시기일 거다. 지난 휴일에도 어김없이 나선 산책길에서 들은 이 노래가 유난히도 좋았다.

<여름날>은 2008년에 발매된 유희열의 소곡집 [여름날]에 실렸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르지만 마치 자전거를 타고 공원의 풀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기분이 든다. 으레 생각하는 '토이스러움', 그러니까 감수성과 아날로그로 가득찬 반주도 그렇지만 페퍼톤스 신재평은 어떻게 목소리만으로 한여름의 계절감을 담을 수 있는 걸까. 언제라도 이 시기, 가사처럼 '푸르른 여름날'이 그리워질 때 꺼내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가 된다.

🌻 SEKAI NO OWARI - 虹色の戦争 (무지개빛 전쟁)

요즘 같은 시기에는 러닝에 나설 타이밍을 어느 때보다 잘 맞춰야 한다. 일단 뙤약볕이 내리쬐는 시간에 바깥을 뛰어다닐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 패스. 해가 막 얼굴을 감춘 저녁도 아직은 후텁지근하다. 저녁 먹은 사람들이 슬렁슬렁 산책에 나서는 여덟~아홉 시의 땅도 여전히 뜨겁다. 밤 열 시가 넘어가면 그제야 공기 중에 섞인 여름끝의 선선함을 느낄 수 있다.

상당한 습도와 장마를 지나 슬금슬금 야외 러닝을 재개한 요즘, 가장 자주 들은 앨범 중 하나는 밴드 세카이노 오와리(SEKAI NO OWARI)의 [EARTH]다. 그들 특유의 청명하고 벅차오르는 느낌이 무더위를 헤치고 나아가는 여름의 러닝과 잘 어울린다. 앨범 자켓에 적힌 밴드 이름에서 색이 칠해진 부분만 읽으면 'NO WAR'가 되는데, 수록곡의 면면에도 인간의 욕심에 희생된 지구의 생명들을 기리거나 전쟁을 반대하는 등 순수한 메시지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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