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2] 🌻 근사한 찰나로 기억될 세 곡

휴가 특집호를 마치고 다시 돌아온 숑🌻입니다. 입추와 말복이 지나니 확실히 아침저녁의 온도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아요. 마음이 참 간사한 게 그렇게 덥다고 불평을 쏟다가도 여름의 요란함이 벌써 물러가니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름의 맛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한 채 얼렁뚱땅 이 계절이 지나고 있는 것만 같거든요. 하 수상한 시절이니 모두가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독자님은 올해의 여름을 어떤 감정으로 기억하게 되실지 궁금합니다.

저의 7월은 운동과 집, 가끔 회사를 시계추처럼 바지런히 오간 나날이었어요. SNS를 매일 수놓는 예쁜 노을을 (놀랍게도) 단 한번도 맨눈으로 본 적이 없었어요. 재택근무를 마치고 나면 지쳐서 빨랫감처럼 널브러졌고, 기운 좀 차리고 일어나보면 이미 사위가 깜깜해진 뒤였거든요. 하지만 비슷비슷한 나날 중에서도 가끔은 기쁨이 되는 찰나의 순간들을 행운처럼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이번 레터에서는 주제를 미리 정하지 않고 막연하게 요즘 즐겨 들은 세 곡을 모았는데요. 써놓고 보니 일상에서 맞닥뜨린 '매력적인 찰나의 순간'이라는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일기장에 대서특필할 만큼 거대한 이벤트는 없었지만, 저의 이번 여름은 찰나의 빛이 모여 그런 대로 기억할 만한 시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구독자님이 이번 레터를 읽고 있는 바로 지금, 목요일 오후의 찰나가 한 주의 괜찮은 기분 중 하나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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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QTIME - 긴밤을 지나

아마 올 여름 가장 자주 들은 앨범 중 하나. 이들의 노래는 감정이 스치고 겹쳤던 미묘한 시기들을 떠올리게 한다. 말하자면 지지부진하던 인연을 끊어낸 날의 후련하고도 쌉싸래한 감정이나 마감에 쫓기다 짬을 내어 맥주를 삼키는 망중한의 초조한 일탈 같은 것. 어딘가 안전하게 소속되기보다, 비틀대고 불안정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인 한때를 노래로 빚어낸 것만 같다. 보랏빛으로 저물어가는 여름의 노을과도 비슷하다. 밤낮의 뚜렷함에 질세라 어스름한 저만의 빛을 원없이 뿜어내는, 낮과 밤 사이 찰나이자 경계의 시간 말이다.

밴드 PQTIME은 초여름의 어느 날 우연히 음악 어플의 신곡 차트를 둘러보다 알게 됐다. 밴드 이름의 의미는 '심장이 두근거리며 P파에서 Q파로 전달되는 찰나의 순간', 'CD 음반의 트랙과 트랙 사이의 빈 공간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 국내 락페에서 열광적인 슬램을 이끌어냈던 밴드 칵스(THE KOXX)를 기억하시는지? PQTIME은 칵스 해체 후 이수륜(기타)과 신사론(드럼)이 결성했고, 이후 조성일(베이스)과 전재림(보컬)이 합류했다고 한다. 알아보니 보컬 분은 지금 수능 강사로 일하며 하이브리드 음악인으로 활약하고 있다고! 과연 큰일을 도맡는, 범상치 않은 목소리였던 셈이다.

앨범이 발매된 지는 두 달이 채 넘지 않았다. 처음엔 타이틀곡 <차(Tea)>에 귀를 빼앗겼지만 요즘은 <긴밤을 지나>를 가장 자주 듣는다(사실 전곡이 다 좋다). 중성적이고 몽환적인 목소리가 마치 <연극이 끝난 후>를 부른 샤프나 초창기 체리필터를 떠올리게 한다. 끈적이는 날씨 속에서도 지루할 틈 없는 연주와 매력적인 목소리를 들을 적마다 그때가 몇 시든 노을지는 순간의 황홀함에 젖곤 했다. 이제 막 새로운 발걸음을 떼는 밴드인 만큼 이들의 무수한 시도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싶다.

🌻 Summer Salt - Candy Wrappers

습하고 후끈한 공기가 몸을 감쌀 때 나는 주로 오장육부가 장쾌해지는 밴드 음악을 듣는다. 평소에는 정신없고 시끄럽다며 멀리했던 곡도 기억의 저편에서 데려와 듣고 있자면 흡사 고막에 등목을 해주는 느낌이 든다. 로큰롤 사운드로 연명하며 인고의 시간을 버티다 보면 어느덧 쾌적한 실내로 들어와 한숨 돌리게 된다. 당연히 이 기후 변화(?)에 알맞은 새로운 선곡이 필요하다.

4인조 미국 밴드 썸머 솔트(Summer Salt)의 노래는 서늘한 차렵이불 위에 누워 에어컨 바람 맞으며 빈둥대는 순간에 맞춘 듯 어울린다. 밴드 이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하고 많은 휴식 중에서도 꼭 여름의 한가로운 피서를 떠올리게 한다. 밴드에서 드럼과 보컬을 맡은 멤버 Eugene Chung이 한국계라는 특이점도 있다. 뭐 대단한 정보는 아니지만 그냥... 괜히 이 밴드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K-친화력)

요즘 종종 요가 수업을 듣는데, 수련을 시작할 때 선생님은 항상 '미간과 턱에 들어간 힘을 풀라'고 말하신다. 그때마다 잔뜩 팽팽했던 얼굴 근육에 힘이 탁 빠지는 게 신기하다. 왜냐면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내가 얼굴에 힘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썸머 솔트의 노래들은 마치 요가의 마지막 동작인 사바사나와 비슷하다. 매일 다른 이유로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이젠 다 지나갔다고, 지금은 힘을 빼도 좋다고 나른한 멜로디로 토닥여주는 것만 같다. 올해 여름, 울분과 짜증이 차오르던 순간의 절반은 이들의 노래를 딛고 무사히 건넜다.

🌻 The Smiths - Asleep

지난 주말 서촌의 어느 바를 찾았다. 푸르게 칠한 벽과 강렬한 붉은색의 스피커가 근사한 공간이었다. 신청곡을 적을 수 있는 종이를 앞에 두고 이곳과 어울리는 음악을 고민하다 보니 80년대 활동한 영국 밴드 스미스(The Smiths)가 떠올랐다. 내게 있어 그들의 키워드는 '새벽' 그 자체다. 요란한 오후의 행락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수평선이 보이지 않을 만큼 칠흑 같은 밤바다의 풍경과 비슷하다. 언뜻 쓸쓸하지만 밤바다의 낭만이란 길게 부연할 필요도 없지 않나. 그 바의 술병과 손님들의 어깨 위로 부유하는 낭만에 꼭 어울리는 배경음악이 될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Asleep>이 흘러나왔다. 그때 물컵을 채워주시던 직원 분께서 별안간 우리에게 말을 붙이셨다. 스미스 노래 중에서도 이 노랠 가장 좋아해서 자주 틀어두는데, 2년 넘게 일하면서 신청곡으로 받으신 건 처음이라고! 대화하고 보니 그녀는 좋아하는 영국 밴드와 즐겨 찾는 독립영화관까지 나와 무척 닮은 취향을 갖고 있었다. 일상에서 쉽게 마주치지 못했던 취향의 동반자를 뜻밖의 공간에서 맞닥뜨린 뒤, 들불이 번지듯 삽시간에 동지애를 나누게 되는 순간이란!

위스키 몇 모금이 오래도록 남긴 잔향처럼 그 찰나의 지나침 덕에 나는 이 노래를 더욱 특별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세상을 등질 듯 염세적인 노랫말이지만, 우울의 바다에 침잠하기보다 무기력하고도 아름다운 멜로디 안에서 자주 안온해질 것만 같다. 공교롭게도 그 바는 지난 5월 콜리🥦, 로이🍄와 작당하여 PRIIISM 뉴스레터를 처음 논의한 곳이기도 하다.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 음악과 관련한 추억이 소복히 쌓이고 있다. 신통한 경험이다.

어떤 찰나는 가끔 몸집을 부풀려 인생의 더 많은 시간을 충만하게 만든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찰나의 순간들이 밋밋한 일상 곳곳에 고요히 몸을 낮추고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했던가. 바라건대 그 순간들을 최대한 자주 삶에 심어두고 싶다. 취향의 징검다리를 부지런히 놓는 일은 어쩌면 빈번하게 행복해지는 분명한 방법 중 하나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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