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69] 🌻 낮의 열기가 물러가면 일기를 쓰고 노래를 합시다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숑🌻입니다. 꼭 쥐면 바스라질까 고이고이 여겼던 소중한 추석 연휴도 이렇게 가버렸네요. 저는 운 좋게도 별다른 근심이나 갈등 없이 휴식에 충실한 명절을 보내선지 다시 돌아온 평일을 기꺼이 맞았답니다. 2주 연속 주 4일제라니 이 정도면 훌륭한데! 역시 짝수가 바이오리듬에 좋아!(?) 같은 긍정적인 생각을 길어 올리면서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역시 부쩍 시원해진 날씨 덕분인 듯합니다.

구독자님은 '누구나 태어난 계절을 가장 사랑하게 된다'는 전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 주변을 보자면 얼추 과반수는 들어맞습니다. 저로서는 장점을 겨우 착즙하게 되는 계절도 누군가에게는 일년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찬란한 시기가 되고, 어떤 이에게는 끔찍하고 우울한 계절이 또다른 누군가에겐 낭만의 정점이 되기도 하니까요.

가을에 태어난 저는 일년 중 9월 중순부터 11월 초까지의 이 시기가 오면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편입니다. 빽빽하게 엮여 있던 긴장의 끈이 맥주 한 잔 걸쳤을 때처럼 기분 좋게 느슨해지고 즐거운 사건을 꾸릴 생각에 평소의 120%로 의욕이 넘쳐요. 구독자님에게 가을은 어떤 계절일지 궁금해집니다. 오늘 소개하는 세 곡을 듣는 순간만큼은 이 계절에 대한 호불호에 상관 없이, 다시 돌아올지 않을 올해 가을날의 괜찮은 순간이 되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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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리카겔 - NO PAIN

내맘대로 선정! 요즘 가장 핫한 한국 밴드는 바로 실리카겔이다. 작년 여름쯤 밴드 차세대에 홀딱 빠져 PRIIISM에도 소개한 바 있는데, 실로 오랜만에 다시 밴드를 향한 열광의 장작을 새로 팼다. 실리카겔과의 첫 만남은 지난 달 인천 펜타포트 락페스티벌이었다. 밴드 이름만 종종 들어본지라 페스티벌 예습 개념으로 몇 곡을 들어두려 했다. 그때 무심코 귀에 꽂아 넣은 곡 <NEO SOUL>의 감상이 일단 '어라?'였다. 무대 위에서 본 그들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야외 공연장의 무더위 속에서도 표현 그대로 기깔났다. 그날 '곧 발매할 신곡'이라 소개하며 연주했던 곡이 바로 <NO PAIN>이었다.

방습제에서 따온 밴드 이름 탓도 있겠지만 3초간의 인트로 후 터져 나오는 신스와 기타 리프가 상당히 시원하다. 하지만 여름에 듣더라도 해가 정수리 위에서 기세등등한 날씨보다 적당히 기운 시간이 어울릴 것만 같은 정서가 있다. 비유하자면 양 어깨 무겁게 내려앉은 고민을 잠시 풀러두고 석양을 배경으로 뛰는 청춘의 배경음악 같다고 해야 할까. 한편 유명한 격언에 절여진 머리는 제목을 보자마자 'NO GAIN'을 출력했지만 노랫말은 뻔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밴드 음악에 기대하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 아닐까? 기분 좋게 관습을 깨는 것.

가사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타인과 부대끼는 일을 피하고만 싶지만, 그럼에도 '우리만의 따뜻한 불'을 피워내는 데 있어 누군가와의 연대는 큰 연료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사족: 고백컨대 친구들과 '요즘 밴드 음악은 가사가 뭐라는 건지 너무 안 들려, 예전 밴드 가사 전달력 생각해보면~'과 같은 꼰대 발언을 일삼은 적 있다. 실리카겔의 이번 곡도 가사가 꽤 뭉개지는 편이라고 느끼지만 비틀대며 소리치는 듯한 이 노래의 분위기와 더없이 어울린다!)

🌻 오석준 - 내일 일기

싱어송라이터 장필순이 참여했던 프로젝트 그룹 '오장박'에서 '오'를 맡고 있는 오석준이 1990년 발매한 앨범이다. 이 노래와 나의 출생연도가 몹시 가까움에도 속절없이 빠져들게 되는 건 역시 시공간을 초월하는 음악의 힘일까? 사실 매일 밤 일기장을 꾹꾹 누르는 습관을 가진 인간으로서 제목부터 마음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내일과 일기라니, 좋아하지만 정작 조합이 낯선 두 단어라서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바쁜 일상 속 우리는 정말로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산 건 아닌지..♪ 지나가버린 어제보다도 다가올 내일을 그려봐요...♬' 나는 참 이런 풍의 노랫말이 왜 이리도 좋을까? 맑고 좋은 문장이라는 데는 대부분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선풍기로 치면 미풍처럼 누군가에겐 별스럽지 않게 넘길 만한 가사에 난 매번 새삼스레 걸려 넘어지고 만다. 내가 놓쳐버린 소중한 것과 내일 그려넣을 것들을 오늘의 일기장에 적으며 오래오래 감상에 빠져든다.

이따금 그 시절 노래에 푹 잠겨 있다 보면 '8090년대 청년으로 살아갔다면 더 적성에 맞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진실되고 청신하고 정직하고 담담한 음악이 좋다. 좋은 노래를 들으며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좋은 책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결론에 가 닿는다. 내가 좋다고 느낀 책과 노래의 정수를 삶의 레퍼런스로 삼아보면 어떨까. 아무려면 '정말로 소중한 것을 잊고 산 건 아닌지'와 같은 걱정을 이전보다 덜하게 될지도 모른다.

🌻 황인경 - 요란한 웃음과 시끄러운 낮의 열기

밴드 전기뱀장어의 보컬 황인경의 솔로 앨범 수록곡이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여름날 밤바다에서 자동반사처럼 떠오르는 전기뱀장어의 히트곡 <적도>로만 기억했다. 내가 아는 청량함은 잔잔한 발라드에서 잠시 묻어둔 듯했지만, 되풀이해 들을수록 밤하늘에 언뜻언뜻 비치는 별빛처럼 이따금 드러난다고도 느꼈다.

정확히 요즘 이 시기의 일교차를 하나의 곡으로 요약해야 한다면 자신있게 이 노래를 들이밀고 싶다. 한낮에는 등줄기에 제법 땀방울이 솟아 요란한 열기에 싸여 보내지만 해가 지고 나면 거짓말처럼 새로운 온도를 마주치게 된다. 사막에 가면 꼭 그렇다고들 하던데. 아직 사막에 가보지 못했음에도 마치 두 지방의 날씨를 겪은 듯 얼떨떨해지고 마는 계절인 탓이다.

이 레터를 보내는 오후 4시를 기준으로 삼자면, 조금 애매하다. 하지만 퇴근길과 같이 해가 진 뒤 집으로 향하는 시간대라면 충분하다. 한낮의 볕 아래에서와는 달리 양 팔을 쓸어내리게 되는 저녁의 귀갓길에 이 노래를 귀에 담아보길 추천하고 싶다. 시원하고 해사한 여름 노래를 맛있게 부른 보컬이기에 태양이 물러간 뒤의 갈무리 또한 누구보다 근사하게 해낼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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