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
대도시의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를 주제로 작업하는 김준의 작품과 쓰레기 매립지였던 난지도의 귀화식물로 작업하는 나현의 작품을 같은 전시에서 관람한 적이 있다. 김준의 〈에코시스템: 도시의 신호, 자연의 신호〉(2018)는 나무로 짠 큐브 안에 열린 서랍 속 사진과 오브제는 베를린, 시드니, 런던, 서울 등 지리적으로 익숙하지만 물리적으로 먼 대도시의 일부를 가져온 것이고 동시에 작가가 아카이빙한 그곳의 소음이 재생된다. 김준 작품의 소리는 도시의 소음이라기엔 경미하게 작고 또 추상적이기까지 하다. 나중에 작가는 뉴질랜드나 호주의 블루마운틴, 한국의 지리산과 제주도처럼 자연 풍광에 소리를 채집한 소리를 작품으로 구현하는데, 큐브 속에서 재생되는 상반된 소리들은 작은 변화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도시의 일부로 살아가는 무감한 존재들을 깨운다.
나현의 <난지도>(2015-) 연작은 영토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이동하며 번식하는 가시상추, 가중나무, 개망초, 단풍잎돼지풀, 서양민들레 등의 귀화식물로 이주와 정주를 말한다. 난지도는 과거 군사독재시절 산업화의 산물로 쓰레기 매립장이었다가 현재는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00여미터 높이의 쓰레기 산이었던 난지도에 돌아온 귀화식물을 채집하고 기록한 나현의 작품은 질곡의 시간을 겪은 장소에 초연하게 돌아온 식물을 통해 장소의 기원을 주목한다. 김준과 나현의 작품은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장소 혹은 공간이 지닌 맥락이나 정의를 뭉뚱그린 생각이 얼마나 무심한지를 알게 한다.
자연에 세워진 바벨탑=송전탑
오래전 우연히 찾은 태안도 그랬다. 태안에 화력발전소가 10기에 달한다는 것과 그 배경에 한국서부발전이 있다는 걸 태안을 찾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몇 번을 더 방문한 후에 한국서부발전 직원과 그 가족들의 이주가 태안에 비교적 젊은 인구가 유입되는 이유이고, 그렇기 때문에 묘하게 태안 내 구역을 나누는 기준이 이곳에 오래 살아온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로 나뉜다는 것도 들었다. 현재 태안은 점진적인 발전소 폐쇄를 앞두고 지역 경제 침체 등의 이슈로 들썩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석탄화력발전소는 전국에 59기가 있다. 태안에 10기, 당진에 10기, 보령에 9기로 충남에만 총 29기가 자리한다. 이들 발전소가 생산한 전기는 모두 대도시로 보내진다. 최근에는 G7 기후환경에너지협약 이행으로 석탄화력발전소를 2029년부터 2046년까지 단계적 폐쇄해야 하는 상황과 더불어 설계수명 30년 도래로 LNG로 전환하려는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1] 당진시에는 고압전기가 흐르는 송전탑이 모두 528기로 전국 최대 규모이다. 수도권으로 전기를 보내기 위한 목적으로 늘어선 송전탑은 겨울 철새의 월동지이자 멸종 위기 야생 생물들의 서식지인 소들섬에도 들어섰다. 새들이 송전탑에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 이로 인한 서식지 파괴와 지속적인 생태 위협을 안고 있다.[2]
지역과 산업을 선택하는 일
지역을 대표하는 각각의 산업이 있다. 으레 어느 지역을 가면 이 산업이 혹은 특정 기업이 주름잡고 있고 이들이 때로는 지역의 이름이자 활발한 산업의 징표로 불리도록 허락해 지역 소멸화와는 거리를 두려고 한다. 대부분의 지역은 굵직한 산업을 영위하지 않으면 혹은 그를 위한 땅을 제공하지 않으면 이른바 지역 소멸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역 소멸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과는 상반되게 불가피한 산업으로 한 지역이 견디고 있는 피로는 보상할 방법을 강구할 수 없이 고스란히 그 지역에 가중되는 현실에는 무감하다. 천연기념물이 서식하고 있는 소들섬이라도 지중화를 추진하여 철새 군락지를 지켜야 한다는 당진 시민들의 목소리는 처음 소들섬 송전탑 공사를 본격 시작한 2021년부터 지속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고압 전자파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도 충분히 검토된 바 없다는 점이다. 산업으로 지역 활성화를 꾀한다는 해법보다 이제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우리의 미래를 위한 대안을 숙고해야 하는 시점이 이미 도래한 것이다. 지역 주민들이 견디고 있는 산업의 그늘과 그 결과물이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도시 주민들의 혜택을 견줘본다면 어쩐지 공간에도 위계가 있다는 생각에 미친다.
‘재생산’ 속 우리는 남는가?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91)는 현대에서 공간은 ‘생산된’ 것이기 때문에 동질성-파편화-위계화라는 특성을 보인다고 말한다. 현대 공간은 경영, 관리, 감시, 소통 등의 다양한 목적으로 동질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동질성을 구분하기 위해 공간을 토지 구획, 택지 등으로 파편화된다.[3] 르페브르는 동질성을 유지하려는 성질 때문에 역설적으로 ‘실제적’ 관계와의 갈등을 은폐하고 인위적인 재생산만을 반복하기 때문에 동질성 내 위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역 정체성이라는 것도 ‘생산’ 개념의 적용 여부에 따라 ‘지역의식’과 ‘지역 그 자체의 정체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지역의식에는 고유성과 상징성이 있다면 이에 따라 생성되는 주민들 간의 사회적인 관계나 타지역과 구분되는 집단적 정체성이 ‘지역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다.[4]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 정체성’은 재생산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것인데 여기에 달라붙은 산업은 지역의 이름이자 지역 활성화의 신호로 그리고 끝내는 지역의 서사로 자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원적인 지역 정체성은 존재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역 정체성에는 무엇보다 공간을 영위하는 사람은 지워지고 없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단순히 지역이 곧 산업이 되는 동시대에서 이러한 인지는 다른 관점의 시작이 될 것이다. 비단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아니더라도 한 지역의 산업과 에너지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환경, 인구, 문화 등의 지역 문제 전반에 다가서고 우리를 이루는 정체성은 어떻게 생산되는 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는 '실제적 관계'로 연결된 하나의 공간 안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1] 전민정, 「2045 거주(불)가능도시 지역 연구_당진 + -」, 2024.
[2] 같은 글, p. 30.
[3] 이동현, 설혜림, 이지훈, 김영재, 「역사적 지역 정체성의 지역민 소외 아이러니에 관한 이론적 고찰」, 『건축역사연구』, vol.31, no.2, 2022, pp. 7-18. p.13.
[4] 같은 글, p. 12.
이희옥 / (재)광주비엔날레 홍보마케팅부 stitch063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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