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바리안 데이즈』 윌리엄 피네건
나는 이제 바다의 기분에 묶였다. 이 연결은 한계가 없고, 저항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제 더는 천상의 작업실에서 조각한 파도를 떠올리지 않았다. 나는 더 실리적으로 생각했다. 이제는 그들이 소위 심연의 얼굴 위에서 움직이는 아득한 폭풍 속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서핑에 완전히 빠져버린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냥 서핑이 나를 몰고 간 것뿐이었다.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이 파묻힌 깊은 광산이 그 안에 있었다. 그것 말고는 내가 왜 서핑을 하는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겁에 질려 꼼짝도 못 한 채 그대로 통스의 채널 안에 앉아 있기만 할 따름이었다. 나는 기본 담력 시험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패배와 굴욕과 비겁한 회피는 나의 적보다 나 자신의 기억 속에서 더 깊이 타오른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약을 들이키면 잠시 동안 나는 분자적인 열정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매일의 지각 작용에서 비스듬히 서 있을 때는 괜찮았다. 일상의 명랑한 허세, 임의성을 드러내 밝혀주니까. 어쨌든 환각의 가장 위대한 약속이란 이런 것이리라. (…) 캐린은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삶은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다. 그 말은 엘에스디와 관련한 나의 문제에서 정곡을 찔렀다. 뇌 부분은 짜릿했다. 감정적인 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어느 날 저녁, 해가 떨어지고 한참이 지나 첫 별이 벌써 나왔을 때, 나는 파도 하나에 올라탔다. 그 파도는 우뚝 일어서서 산호초를 감아 돌아 탁 트인 바다를 향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었다. 벽의 바닥에는 진한, 유리병 같은 녹색의 빛이 어렸고, 머리 위에는 흰 빛이 파닥거렸다. 그 외의 모든 것은—바람에 물결 지는 파도의 얼굴, 앞의 채널, 하늘—청흑색 그늘 속에 잠겼다. 파도가 휘어지자, 그리고 더 휘어지자, 나도 모르게 비티레부 북쪽으로, 해가 뜨는 산맥 쪽으로 서핑하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어. 내 마음이 말했다. 계속 가.
내가 마침내 구멍에서 빠져나오자, 파도는 다시 뒤집히며 똑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아름다운 절망으로 물러갔다가 한층 더 아름다운 희망으로 돌아오기. 내 생애에서 가장 길게, 튜브에서 타본 경험이었다.
나는 내가 인생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 이전의 나는 유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쨌든 일하고, 글을 쓰고, 가르치고, 위대한 것들을 성취하고 싶었다. 그런 꿈들은 어떻게 되었지? 그래, 나는 위대한 서핑 여행을 떠나야만 한다는 충동을, 거의 그런 소명을 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나 길어야 할 필요가 정말로 있었을까? (…) 세계는 이해할 수 없이 거대했으며, 여전히 볼거리가 많았다. 그렇다, 나는 외국인으로, 언제나 무지한 상태로, 사물의 바깥에 살아가는 것에 진력이 났지만, 가정적인 삶에, 매일 같은 사람들과 같은 장소를 보고, 다소간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갈 준비가 되진 않았다. 나는 여정의 돌발성, 불확실성, 우연한 만남에 굴복하고 싶었다.
좌절은 서핑에서는 큰 부분이다. 우리 모두가 잊기 쉬운 부분이었다. 멍청한 구간, 놓쳐버린 파도, 바람에 날린 파도, 끝없어 보이는 잠잠함. (…) 서핑에 열중한다면, 파도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각각은 분명히 대별되는 복잡한 개성이 있었고, 기분이 휙휙 바뀌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거의 즉각적으로 반응해야만 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파도타기를 사랑을 나누는 행위에 비유한다. 그러나 파도는 물론 살아 있지도 않고, 자각할 수도 없다. 손을 뻗어 안고 싶은 연인은 경고 없이 살인자로 변신할 수 있다. 인간적인 존재가 아니다. 안쪽 모래섬에서 부서지며 할복하는 죽음의 파도는 잔인한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반사적인 의인화일 뿐이다. 파도의 사랑은 일방통행이다.
“하지만 매번 보드에서 떨어질 때마다 깨닫게 되기는 해. 실제로는 생각보다 더 안전하다고. 그냥 물일 뿐이지. 그저 숨을 참기만 하면 돼. 파도는 지나갈 거야.” 공포를 느껴본 적 있나? “물론이지. 하지만 정말로 해야 할 일은 그저 긴장을 푸는 거야. 항상 올라오게 돼 있어.”
나는 늘 광포한 양가성을 느꼈다. 나는 다른 곳 어디에도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른 곳 어디에든 있고 싶었다. (…) 상황이 악화되면—그리고 무척 큰 파도 안에 갇히거나 파도타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기 마련이므로—모든 기술과 힘, 판단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누구도 우르르 밀려오는 커다란 파도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위엄을 유지할 순 없었다. 그 순간 유일하게 통제할 희망이 있는 건 오로지 공포뿐이었다.
“그 사람은 파도의 텅 빈 중심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보면, 알게 될 거라고 했지.” 피터가 말했다. “아니면 보지 말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했어. 파도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지 말고, 잡은 파도에서 성공할 생각만 하라고.”
아버지는 하고 싶은 일이 그렇게나 많았다. 아버지는 한때 내게, 그 모든 게 그저 실패의 두려움이라고 말했다.
제리 사인펠드는 일할 필요가 없는데도 여전히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고, 농담을 강박적으로 갈고 닦아 1년에 100번 가까이 쇼를 진행한다. 그는 “80대까지, 그를 넘어서도” 계속할 거라고 말한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서퍼에 비유했다. “그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런 걸 할까요? 그저 순수한 겁니다. 사람은 혼자예요. 파도는 사람보다 더 크고 강하죠. 언제나 압도당합니다. 파도는 언제나 사람을 부수어버릴 수 있어요. 그렇지만 사람은 그걸 받아들여서 작고 간결하며 의미 없는 예술 형태로 바꾸어놓는 거죠.”
# remem+ 매일 글쓰기 모임
한 번이라도 글을 써본 분은 알 것 입니다. 글로서 마음을 담아내는 기쁨을요. 머리속에 떠오르는 무수한 생각들, 마음속에 응어리지는 고민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한껏 부려놓고 싶지만, 빈화면을 바라보고 앉으면 마주하는 낯섬과 괴로움에 막막하기도 합니다.
글쓰기란 결국 나를 위한 활동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만드는 것, 그건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혼자서는 어렵지만 함께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도는 두렵기도 하지만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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