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 이하의 것들』 조르주 페렉
신문들은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매일 일어나는 일들만 제외하고. 신문은 나를 지루하게 만들고, 내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나와 관련이 없고, 내게 질문을 던지지 않으며, 그렇다고 내가 묻거나 묻고 싶은 질문들에 답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 우리가 경험하는 것, 나머지인 것, 모든 나머지 것, 그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매일 일어나고 날마다 되돌아오는 것, 흔한 것, 일상적인 것, 뻔한 것, 평범한 것, 보통의 것, 보통-이하의 것, 잡음 같은 것, 익숙한 것. 어떻게 그것들을 설명하고, 어떻게 그것들에 대해 질문하며, 어떻게 그것들을 묘사할 수 있을까?
익숙한 것에 대해 질문해 보자.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미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게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 익숙한 것 또한 우리에게 질문하지 않으며 딱히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지도 않다. 마치 익숙한 것은 어떤 질문이나 답도 전하지 않고 아무런 정보도 지니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 그것과 함께 살아간다. 그것은 더 이상 삶의 조건조차 되지 못하며, 일종의 무감각 상태 같은 것이 된다. 우리는 생애 동안 꿈도 없는 잠을 자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생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에 우리의 육체가 있을까? 어디에 우리의 공간이 있을까?
어떻게 '평범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어떻게 그것들을 더 잘 추적하고 수풀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들을 끈끈하게 감싸고 있는 외피에서 떼어내고, 그것들에 하나의 의미, 하나의 언어를 부여할 수 있을까. 마침내 그 평범한 것들이 자신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너무 당연해 보여서 우리가 그 기원을 잊어버린 것에 대해 질문해 보자. 쥘 베른이나 그의 독자들이 소리를 재생하고 전송할 수 있는 기구를 마주했을 때 느꼈을 그 놀라운 무언가를 되찾아 보자. 바로 그 놀라움과 함께 또 다른 수천 가지의 놀라움들이 존재해 왔고, 그러한 놀라움들이 우리를 형성해 왔기 때문이다.
조르주 페렉이 행하는 사물들의 열거와 묘사, 때로는 포화를 넘어 '고갈'을 지향하는 듯한 집요한 묘사에는 생의 공허에 맞서려는 그의 의지가 담겨 있다. 어린 시절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세상에 홀로 내던져졌던 그. 생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자마자 맞닥뜨려야 했던 거대한 공백은 그로 하여금 무엇으로든 텅 빈 삶을 채우도록 이끌었다. 그는 '글쓰기'를 그 수단으로 선택한다. 주변의 온갖 사물들에 대한 시시콜콜한 나열과 묘사를 통해 존재의 조건처럼 주어진 공허를 하나하나 채워간 것이다. 그로부터, 남아 있는 긴 생에 대한 의지도 조금씩 키워간다.
(…) 나아가, 장소들에 대한 세밀하고 끈기 있는 묘사는 사물들에 대한 그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절대성에 맞서기 위한 방식이기도 하다. 삶의 모든 장소와 공간들을 파괴하고 삼켜버리는 것은 결국 시간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모든 순간들을 함축하고 있는 장소를 찾아서 묘사하는 것, "거의 어리석을 정도로 천천히 접근"하면서 하나하나 새기듯 기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시간의 횡포에 맞서는 것이고, 우리 삶의 일부 조각들이나마 붙들어 고정시키는 것이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