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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년 동안 바다에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클리퍼(Clipper) 세계일주 요트대회’에 출전 중이다. 도중에 포기하지만 않으면 요트로 무동력 세계 일주를 한 한국 여성 1호로 기록될 것이다.
바다와 하늘이 요동치며 흐려질 땐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역설적으로 그 순간 살아 있음을 느꼈다. 자연 앞에 겸허해지고, 인간에게 내재된 인내의 위대함을 체험했다. 선장의 날 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힘을 빼! 조종대를 풀어!” 그 순간, 진정한 힘은 저항이 아니라 때론 자연의 섭리와 함께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찾던 힘은, 투쟁만이 아니라 내려놓음 속에도 있구나. 때로는 자연과 싸우고 저항하지만 때론 받아들이고 흐르는 대로 내버려둔다.
감사함으로 가득한 그 공기 속에서 시련을 극복한 힘에, 자신에 대한 신뢰에, 팀의 결속에 경탄했다. 파도의 리듬에 새겨진 교훈과도 같았다. 이렇게 가끔은 삶의 통제권을 놓고 나서야 진정한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4회 완주한 어머니는 11kg의 배낭에 홀로 의지한 채 야생의 숲에서 캠핑하고, 숱한 물집과 관절의 고통을 인내하며, 자신과 삶의 흐름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였다. 나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 나침반이 되어 결정했다. 한국인 여성 최초의 세계 일주자가 되기 위한 도전은 내면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안정된 직장 생활에서 탈출했다.
인간에게 잠재된 보석은, 기회가 오면 언제든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바람이 뼈를 찌르고 더위가 한계를 시험하는 상황에서도 맑은 정신과 따뜻한 마음이 더 중요했다. 이 시련으로 나는 인내심과 회복력을 알게 되었다. 내면이든 외면이든, 폭풍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의 샘, 우리 모두 그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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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윈터슬립’의 중늙은이 아이딘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내 청춘은 어둡고 따분했다오. 그래서 뭐가 행복인지 모르는가 봐. 남을 행복하게 하는 건 더 모르겠고. 미안해.” 나는 80년대에 20대를 보낸 세대다. 세상은 무도하고 불온했다. 우리는 정의로운 분노와 용기 있는 저항엔 익숙했으나, 그래서일까? 친절⸱겸손⸱화합⸱관용이 부족하다. 대개는 아이딘의 고백처럼 무엇이 행복인 줄 모르고 산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구상 시인의 시 ‘꽃자리’에 나온다. 행복의 다른 표현이리라. 이 땅의 아름다운 청년들과 우선 만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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