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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
이따금 젊은 독자에게 긴 편지를 받는다. 그들 대부분은 진지하게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생생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나이 차도 크고, 지금껏 축적한 경험도 전혀 다를 텐데"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것은 내가 당신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그러니 당연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혹여 내가 당신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당신이 나의 이야기를 당신 안에 유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가설의 행방을 결정하는 주체는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다. 이야기는 바람과 같다. 흔들리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눈에 보인다.
우리네 세상사의 대부분에는 결론 따위가 없다. 특히 중요한 문제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해진다. (…) 그럼에도 나는 그러한 혼탁을 헤쳐나가지 않고는 결코 보이지 않는 정경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 정경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설령 눈에 들어온다고 해도 그것을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말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 그러나 그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글이 나올 리 없다.
우리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왜 이리도 곤흑스러운 사회에 살고 있을까, 라고. 그러고는 팔짱을 끼거나 머리를 긁적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무리하게 벗어나려 들면, 우리는 '진짜가 아닌 장소'에 도달하게 되고 만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단 한 가지입니다.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살과 죽음의 이야기를 쓰고, 사랑의 이야기를 쓰고, 사람을 울리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웃게 만들어 개개인의 영혼이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함을 명확히 밝혀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진지하게 허구를 만들어나갑니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진정한 음악이란 관념으로서 악보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단은 편의적으로 소리로 변환시키긴 하지만, 사실 그런 것은 듣지 않더라도 음악으로서의 관념이 악보에서 전해지면 그걸로 좋은 거라고. 음악이란 분명 일종의 순수관념이구나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들긴 합니다.
끊임없는 가치 판단의 축적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그림일 수도 있고 와인일 수도 있고 요리일 수도 있지만 내 경우는 음악입니다. 그런 만큼 정말로 좋은 음악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내가 그 시대에 품었던 강물 같은 슬픔, 혹은 숨이 막힐 듯한 기쁨이나 사랑했던 사람, 이루지 못한 염원 같은 것들은 텔로니어스 멍크의 그 10인치 레코드 속에 흡수된 채 어느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사라져버리고 만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주 자체의 훌륭함이다. 그것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에 못지않게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그 음악의 훌륭함에 우리 자신의 마음이나 육체의 소중한 일부를 위탁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해'는 버넌 듀크 작곡, 아이라 거쉰 작사의 오래된 옛 미국 노래로 1930년대 후반에 큰 인기를 끌었다. 상당히 세련된 가사이므로 첫 부분을 옮겨본다.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그 당시 나는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좀더 제대로 된 말을, 뭔가 좀더 확실하게 마음이 담긴 말을 건넸어야 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내 머릿속에는 도무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이별의 대부분은 그대로 영원한 이별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은 영원히 갈 곳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어느 한 구절이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가 있다. 얼여덟 살 때 트루먼 카포티의 〈최후의 문을 닫아라〉라는 단편소설을 읽었는데, 마지막 한 구절이 머릿속 깊이 박혀버렸다. 이런 문장이다. "그리고 그는 베개에 머리를 깊이 파묻고 두 손으로 귀를 감싸쥐고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을 생각 하자, 라고"
"think of nothing things, think of wind"라는 마지막 문장이 나는 너무나 좋았다. (…) 그런 까닭에 나는 뭔가 고통스럽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늘 그 구절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을 생각하자'라고.
텔로니어스 멍크는 내가 가장 경애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인데, "당신의 연주는 어떻게 그렇게 특별하게 울리나요?”라는 질문에 그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다. "새로운 음note은 어디에도 없어, 건반을 봐, 모든 음은 이미 그 안에 늘어서 있지. 그렇지만 어떤 음에다 자네가 확실하게 의미를 담으면, 그것이 다르게 울려퍼지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담는 거야." (…) 그래,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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