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모든 순간을 기억합니다.
죽음 역시 우리 인생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며 두려움을 다독여 주는 것입니다.
그림의 힘_김선현지음
순식간에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고통 없이 누워 잠만 자는 그가 세상을 떠났다. 아직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데 어떠한 미동도 없다. 진짜 죽은 걸까? 정말 나를 떠난 걸까? 몸을 낮춰 그의 숨소리를 들어본다. 새근새근 들리던 그의 숨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그냥 자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는 영혼 없는 육체일 뿐이었다. 기계의 오작동이라고 믿고 싶었다. 의사가 병실로 들어오면서 나는 더 분주해졌다. 나는 아직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함께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한 그였는데 이 상황이 믿기질 않았다. 다시 기계는 좀처럼 괜찮아질 텐데 성질 급한 간호사는 내가 정신없는 사이에 의사를 호출한 모양이다. 의사는 자다가 막 일어난 사람처럼 정신없어 보였고 급하게 뛰어 올라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말했다. “병원에선 늘 있는 일입니다.”라는 어투로 나에게 그의 죽음을 인정하게 만들어줬다. 2024년 3월 1일 오전 3시, 000 환자 사망하셨습니다. 저기요, 잠깐 이 사람에 대한 예의를 더 갖춰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옷깃을 붙잡고 따지듯 묻고 싶었지만, 그는 해야 할 일을 다 한 사람처럼 서둘러 병실 문 밖을 나가버렸다. 간호사는 “보호자님 인사 더하셔도 됩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둘만의 시간을 허락해 줬다. 죽음에 이를 때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 남아 있는 감각이 청각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최대한 나의 목소리가 잘 들릴 수 있게 그의 귀에 나의 입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자기.
자기, 내 말 들려?
자기야, 이제 안 아파? 안 아픈거 맞지?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못난 내가 당신에게 해준 게 별로 없다.
.
.
.
우리 너무 걱정하지 마. 나 씩씩한 거 알지? 아픔 없는 천국에 가서 편히 쉬어,
자기야, 나랑 같이 살아줘서 고마워.
당신이 내 남편이어서, 내 아이의 아빠여서 너무 감사했어.
내가 당신에게 받았던 사랑 모두 아이들에게도 꼭 전할게.
나 씩씩하게 우리 아이들 잘 키울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가,
자기야, 사랑해,
아이들도 아빠를 사랑한다고 정말 사랑한다고 전해달래.
사랑해 자기야.
차마 아무에게도 할 수 없던 이야기
사실 이 이야기는 누구한테도 할 수 없었는데 나는 그 방에서 오랜 시간 머무를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그냥 너무 무서웠다, 갑자기 무서운 느낌이 확 나를 감싸더니 그 방에 그와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남편 곁에서 들려주던 찬양곡을 몇 곡 틀어주고 나는 문 앞에 앉아 울었다, 미안해, 자기야 미안해, 옆에 있을 수가 없어, 너무 무서워, 너무 미안해, 그렇게 쫓기듯 병실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지나고 무섭다는 이유로 더 곁에 있어 주지 못한 나를 나는 많이 원망했다. 그리고 그 원망으로 한동안 잠도 편히 이루지 못했다.)
나는 남편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온몸에 암이 퍼져 등을 대고 누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내 옆에 누워 손을 잡고 집에 돌아가 아이들을 만나자고 약속한 그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남편만 놔두고 홀로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혼자라고 생각하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계속 고개를 저으며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질 거라고 주문을 걸었다.
남편을 태운 차는 먼저 고속도로로 빠져나갔다. 나는 그 뒤를 이어 따라갔다. 먼저 출발한 시동생이 장례식장에 가 일을 보기로 하고 나는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갔다. 아빠의 죽음을 다른 사람이 아닌 엄마인 내가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는 아이들을 한 명씩 꼭 안아줬다. 불편했는지 아이들이 일어났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모습을 기뻐하면서 순간 얼굴에 슬픔이 깃들였다. 아빠는요? 아빠는 어디에 있어요? 아빠 하늘나라 가셨어요? 아이들이 질문이 또 한 번 나를 좌절케 했다. 상황 설명을 해주자, 아이들은 담담히 받아들였고, 나를 꼭 안아주었다. “엄마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
아이들의 위로가 다시 한번 나를 감싼다. 남편이 없는 이 빈자리를 그들이 채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자 사랑이고 구원이다. 깨진 항아리가 되어 돌아온 상처뿐인 나를 아이들이 그 구멍을 서로 막아 나에게 물을 채워준다. 가끔 그 무게가 버거워 다시 물이 새기도 하지만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항아리에 물이 차오른다. 넘쳐흐르는 날도, 물이 새어 다시 모아야 하는 날도 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고 사랑이고 구원이 된다.
더 나은 미래의 희망으로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보듬고 있다.
이지연
아들 쌍둥이를 씩씩하게 홀로 키우고 있는 엄마이자 아이들에게 영어와 미디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수원 공동체 라디오 Sone FM에서 "그녀들의 세상사는 이야기" DJ를 하고 있다. 브런치 작가로 글을 쓰고 있으며, 부족하지만 그림 감상과 글쓰기를 통해 삶을 통찰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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