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W, 눈
새벽녘 하얗게 내리는 눈을 만나며 곤지암에 도착했다. 하얀 눈들은 언제나 내 마음을 신나게 하고 설레게 하는 존재이다. 길 위에, 건물 위에, 나무 위에, 산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눈들은 내 심장을 쿵쾅쿵쾅 뛰게 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지 감탄만 나왔다. 2시간 스키강습을 받은 후 기지개를 켜며 이른 아침에 바라보았던 나무와 산을 보았다. 그 새 눈은 녹고 초록 잎으로 갈색나뭇가지로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그들만의 색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쉬웠다. 내가 다른 곳에 신경 쓸 때 아름다운 눈들이 다 사라진 게 아쉬워, 더 높고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눈에 설레고 감탄하고 아쉬워 한 날, 나는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책을 만났다. 사실 그 전에 만났는데 스키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더 가깝게 마주하게 된 거다. "성근 눈이 내리고 있다."로 시작한 이야기는 "눈을 허물고 기어가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을 거다."라는 이야기로 끝을 향해 달려갔다. 나에게 한없이 가볍고 상큼하고 기분 좋았던 눈이 너무나 무겁고 가슴 아픈 눈이 되어 나에게 휘몰아쳐왔다.
녹지 않는 눈
너무나 무겁고 가슴 아픈 눈을 마주하고 있을 때, 필립 파레노의 <여름 없는 한 해>,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 <눈 더미>작품을 만났다.
<여름 없는 한해> 이 말을 <겨울만 있는 한해>로 바꾸고, 1년 내내 내리는 주황색 눈을 바라보았다. 주황색 눈을 맞고 묵묵히 서있는 윤기가 흐르는 검정색 그랜드 피아노, 내린 눈이 쌓인 주황색 눈 더미, 미술관의 공기를 흔드는 피아노 소리에 나는 <작별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 주인공 경하와 인선이를 만났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와 둘만의 언어로 대화를 한다. 대화는 피아노 선율로 바뀌어 나에게 들린다.
인선이가 이야기 한다.
“다섯 살 모습으로 내가 눈밭에 앉아 있었는데, 내 뺨에 내려앉은 눈이 이상하게 녹지를 않더래. 꿈속에서 엄마 몸이 덜덜 떨릴 만큼 그게 무서웠대. 따뜻한 애기 얼굴에 왜 눈이 안 녹고 그대로 있나.”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P81
경하는 대답 대신 인선을 바라본다.
“엄마가 어렸을 때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 때 국민학교 졸업반이던 엄마랑 열일곱 살 이모만 당숙 네에 심부름을 가 있어서 그 일을 피했다고 엄마는 말했어. 다음날 소식을 들은 자매 둘이 마을로 돌아와, 오후 내내 국민학교 운동장을 헤매 다녔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P84
녹지 않는 눈. 난 소름이 돋았다. 피아노 위에 눈은 인선이 볼에서 녹지 않는 눈처럼 이 전시가 끝날 때까지 녹지 않고 있을 것만 같다. 둘은 건반을 하나씩 누르며 서로의 대화를 끊임없이 나눈다.
작품 소개글 중 <<전시를 거대한 '악기'라 가정한 파레노는 전시를 '연주'하며 악기로서의 본성을 수용하고 악기에 장착된 시퀀싱 프로그램을 통해 박자와 선율을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피아노에 장착된 소리와 빛의 고유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주변 작품과의 안무는 전체를 환기해주는 역할을 하며, 피아노 위에 살포시 떨어지는 주황빛 인공 눈과 함께 멜랑콜리아와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유도한다>>는 내용이 있다. 멜랑콜리아는 근심스럽거나 답답하여 활기가 없다는 점에서 기분이 언짢은 느낌 또는 반성과 공상이 따르는 가벼운 슬픈 감정을 이야기 한다. 디스토피아는 과거 어느 순간 유토피아적인 이상을 이룩하려고 했으나 그 시도가 실패한 끝에 도달하는 세계라고 한다. 나는 작가의 의도대로 '멜랑콜리아'와 '디스토피아적 상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작품 속에 빠져 있다가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살아있구나! 다행이다!' 똑! 똑! 떨어지는 눈사람 녹는 소리는 생명이 숨 쉬는 소리 같다. 그리고 이내 경하와 인선이 이야기로 이어진다.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P133
'내가 행복하게 바라봤던 눈은 우리 엄마가 어렸을 때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 하던 눈일까? 내가 설레며 바라봤던 눈도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 얼굴을 덮은 눈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러 실타래로 엮인다.
서로 끌어당기는 너와 나, 우리
“하나의 눈송이가 태어나려면 극미세한 먼지나 재의 입자가 필요하다고 어린 시절 나는 읽었다. 구름은 물 분자들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고, 수증기를 타고 지상에서 올라온 먼지와 재의 입자들로 가득하다고 했다. 두 개의 물 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P93
우리 몸에 해로울 것만 같은 극미세먼지와 재가 하얀 눈의 핵이라니! 필립 파레노는 이 점 까지 고려해서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을 만들었던 것일까? 궁금해진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수많은 끌림들이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 사람과 식물, 사람과 사물 등 수많은 관계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끌림을 경험한다. 다양한 관계 속에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던 서로가 뒤엉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든다. 하얗기만 했던 눈이 어느새 까만색으로 변하기도 하고, 가볍기만 했던 눈이 단단해지고 하는 것처럼.
서로 끌어당겨 하얀 눈이 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서로 끌어당기며 이 자리에 있다. 서로 격려하고 성장할 수 있는 힘을 키우며 서로를 힘껏 끌어당기고 있다.
글쓴이 - 전애희
현재 미술관 도슨트로 활동하며 도서관에서 독서지도사로 독서연계, 창의융합독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림책과 그림은 예술이라는 한 장르! 예술을 매개체로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소통하는 삶을 꿈꾸며, 내 삶에 들어온 예술을 글로 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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