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청학동의 기억>
父生我身(부생아신)하시고 母鞠吾身(모국오신)하시니.
"아버지 나의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 나의 몸을 기르셨으니."
웬일인지 아직도 여성의 나체를 보여주는 미술품 앞에 서면 늘 나는 사자소학의 첫 문장을 떠올리며, 청학동 서당에 앉아 있는 11살의 학생이 된다. 나체에 대한 불편한 마음은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방학 때부터 아닐지 싶다. 첫째 셋째와 다르게 학급 임원으로 나서는 것이 불편한 둘째를 부모님은 꽤 걱정하셨다. 당시, 어디를 가나 주목받던 수려한 외모에 성품마저 순한 첫째 아래 둘째는 판이한 기질과 평균적인 외모의 소녀였다. 나는 자신을 나름 귀엽다고 여겼지만, 주위 어른들과 언니 친구들로부터 비교하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외모 언급이 무례하다는 것을 모르는, 지금까지도 ‘살쪘어?’라고 인사치레로 하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자매를 맡아 수업하게 될 때 늘 부모님 상담에 넣는 하나의 큰 주제이기도 하다. 둘의 장점을 각기 부각하고 따로 보아야 하며, 어떤 부분이든 우위로 나누지 않는다는 부분을 꼭 당부한다. 그것이 아이의 자존감과 앞으로 성장하며 그려갈 세계관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는 걸 그저 예민해서라고 가벼이 보는 한국 문화 속에 커왔다.
부모님의 말씀을 고분고분 잘 따라가던 첫째 셋째와 다른 둘째를 연구 중이셨음이 틀림없었다. 지금도 그런 듯하지만, 다시 돌아봐도 나는 아버지에게 난이도 있는 미션을 자주 드린 느낌이다. 시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연락 두절하고 사라진 날도 있었다. 지금 보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짓을 어린 나는 자주 했었다. 지루할 것 같았던 그곳에서 배운 것들은 생각보다 긍정적이었다. 손바닥보다 더 큰 잠자리를 직접 보며 자연의 신비를 배웠고, 가지고 온 몇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읽을 때마다 다른 감정으로 보게 되는 새로움도 발견하였다. 사자소학을 통해 한자를 사용하는 일본어, 중국어를 부담 없이 배우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 앞에서 진취적으로 발표를 하며, 내 생각을 말할 줄 알게 되었다.
불도저
아버지의 산은 나에게 정말 높아 현기증이 자주 났다. 아무리 유명하고 한마디면 나를 제압할 만한 대단한 그 누군가의 앞에서도 긴장하거나 나의 이야기를 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내 높은 산과 같은 아비가 나를 혼낼 때, 나는 좀처럼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내 온 정신이 저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첫 회사였던 미국계 대기업에서 매주 월요일 미국인 부사장, 외국 임원분들 앞에서 진행되는 상황을 그들의 모국어인 영어로 발표하는 시간에도 나는 별로 떨지 않았다. 물론 자료나 디자인팀의 관리 능력을 대표해서 지적받는 것만 신경이 온통 갈 뿐이었다. 엄청나게 높은 위치에 계신 분이 오히려 나는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현재는 나이도 차고 사회화가 되었으므로 면적에서 180도로 뒤로 꺾이며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사람 일은 늘 장담하면 안 되는 법이다.
잔 다르크는 어린 시절부터 억압된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찾아가는 척도와도 같았다. 마녀로 몰려 화형이 치러지며 생을 마감한 잔 다르크의 형상이 눈앞에서 자꾸만 어른거리고 했고, 같은 여성이라는 공통 분모 속에서 처절하게 분노하였다.
언젠가 여인의 나체를 그린 1호짜리 화폭을 보며, 부모님께 여쭤본 적이 있다. 왜 여성의 누드화가 미술의 주제가 되는지. 좀처럼 말이 없던 그 시절의 내가 ‘나체, 나체화’라는 단어를 과감하게 물어볼 수 있었던 큰 용기도 필요했겠으나, 적대적인 감정이 더 중요하였던 듯하다. 여성의 몸이야말로 아름다운 미술의 시각일 수 있다 하셨던가. 그런 답변을 받고도 나쁜 감정이 해소되진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성인이 된 지금, 소방관 선생님들의 근육질 몸을 화보로 썼다는 사진을 보면서 감탄한다. 인생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다시 보는 生我身(부생아신) 母鞠吾身(모국오신)
지리산 청학동에서 배웠던 사자소학(四字少學: 아이가 배워야 할 생활 규범과 어른 공경 법 등 모든 구절이 넉 자로 정리된 글) 의 첫 문장이다. ‘아버지 나의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 나의 몸을 기르셨으니….’ 기르는 시간에 비하자면 낳는 건 찰나의 고통이다. 이 얼마나 힘든 것을 어머니가 행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나의 이러한 성향이 한국 남자와의 결혼에서 많이 부딪혔던 신혼 때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지금은 그저 물에 물 타고 술에 술 탄 듯 살아감이 편안하다는 이유로 살아가는 듯하지만 가끔은 극단적인 선택을 해버린 여성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화가 목구멍을 태우고 분출되어 내 머리 뚜껑이 폭발해, 마치 2015년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Kingsman: The Secret Service> 마지막 장면과 같이 음악에 맞춰 팡팡 터져버리는 머리통들처럼 블랙코미디 하는 장면을 그려낸다. 괜찮다! 더 잘살아 버리면 그만이다. 너를 던지면서까지 이루려는 사랑은 정상적이지 않아. 이건 남녀가 뒤바뀌어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너의 재능을 더 내어놓지 못하게 되어, 통탄스럽다. 그녀의 <성숙의 시대> 1899년 작품이 아무리 유명한들 작품세계를 뻗어 나가 성숙하고 치유 받았더라면 하고 마음속으로 통곡해 본다. 가슴으로 운 나에게 그녀는 훗날 어떤 답변을 건네줄까.
글쓴이: 유승희
예술을 사랑하고 그에 필요한 여러 언어를 공부해 나가고 있는 영어교육자 이자 영어교육강연자. 현재 영어 강의를 대학교, 어학원, 개인공간에서 16년째 하고 있다. 영어강연으로 영어를 배우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을 위한 영어권 국가의 사고를 알려드리는 부모교육 <여러언어를 하는 영어강사의 육아이야기>,영어 및 다른 언어들을 배워가는데 중요한 방법을 알려드리고 영어동기부여, 영어 공부법을 알려드리는 <영어, 행복하게 만나다>를 하고 향후 강연도 기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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