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고 먼 예술
예술은 어렵다. 어딘가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다른 거 같기도 한 선율에 외국어로 쓰인 뜻 모를 단어들이 덕지덕지 들러붙는 클래식도 어렵고, 온갖 심오한 표현이 꽉꽉 들어차 있어서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는데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 고전 소설도 어렵고, 기승전결도 없고 친절한 서사도 없이 그저 지루하기만 한데 전문가들은 호평을 늘어놓는 예술 영화도 어렵다.
거기에다 예술이라는 이름표 덕에 벽에 붙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바나나 한 알이 무려 12만 달러에 팔리고 폼알데하이드에 갇힌 데미안 허스트의 박제된 상어가 천문학적인 가격에 거래되는 미술의 세계는 그야말로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어디 어려울 뿐인가? 설치 미술의 세계에서는 범죄가 예술로 둔갑하기도 한다. 카텔란이 은색 테이프로 흰 벽에 고정해 놓은 바나나 한 알은 ‘코미디언(Comedian)’이라는 제목의 예술로 승화됐지만 어느 행위 예술가는 배가 고프다며 전시된 바나나를 꿀꺽 삼켜버렸다. 장소를 불문하고 타인의 물건을 허락 없이 갈취하는 행위는 범죄다. 더군다나 갤러리 벽에 전시된 작품을 먹어 치웠다면 예술 작품 훼손이라는 괘씸죄가 추가돼 좀 더 큰 처벌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벽에 붙은 바나나라는 예술 작품을 먹어 치운 범죄 행동은 행위 예술로 포장됐고 그 덕에 그 바나나는 더욱 비싼 몸값을 자랑하게 됐다.
일반적인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는 사건은 그뿐이 아니다. 소더비 경매에서 자기 작품이 낙찰되자마자 미리 설치해둔 기계 장치로 그림의 절반을 파쇄해버린 뱅크시가 비난받기는커녕 ‘현대미술사의 진정한 아이콘’이라는 찬사를 받는 아이러니한 일이 종종 일어나는 곳이 미술계이니 예술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예술은 자유다
예술이라고 하면 지레 겁먹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발 물러서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궁금하지 않은가? 도대체 왜 예술이 어려워야 할까?
예술을 어렵게 만드는 첫 번째 장애물은 예술이 심오해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예술이란 인간이 감상할 수 있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창조하는 행위와 그 결과물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행위와 표현이 예술이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낸 한 줄의 카톡이 노랫말이 될 수도 있고, 유명한 화가가 오랜 시간 공들여 그린 값비싼 예술 작품보다 약속 시간에 늦은 친구를 기다리며 끼적인 그림에 좀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을 수도 있다.
세상 사람 누구나 가슴속에는 뜨거운 노래를 한 가락쯤 품고 산다. 실제로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더라도 머릿속에는 남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한 자락쯤 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600제곱미터가 넘는 거대한 천장에 벽화를 그린 미켈란젤로나 귀가 들리지 않는데도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곡을 남긴 베토벤 같은 거장만이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위압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예술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은 또 있다. 그건 바로 올바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그저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예술가가 작품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은 관객에게 작품에 대한 해석을 온전히 맡길 준비가 돼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남들의 시선에 온전히 내맡길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꼭꼭 숨겨두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옳다.
예술가에게 작품은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자신의 내면이 담긴 작품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고 혼자 간직한다면 그 작품은 오롯이 예술가의 것으로 남을 테고, 그 작품에 대한 해석 또한 오로지 그의 몫으로 남는다. 하지만 일단 세상에 공개된 작품에 대한 해석은 철저히 관객의 몫이다. 그러니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르게 해석하려는 강박은 버려도 된다.
예술이 된 말풍선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 설치 미술 거장 필립 파레노는 리움에서 열린 개인전 ‘보이스(VOICES)’에서 자신의 삶과 경험이 담긴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녹아내린 얼음 조각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AI가 창조한 기이한 목소리가 전시장 곳곳에서 흘러나오며, 물고기 모양의 헬륨 풍선들이 둥둥 떠다니고, 자동으로 연주되는 야마하 피아노 위로 주황색 종이 눈이 쏟아진다.
관객들은 내심 ‘이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안고 미술관에 들어서서 전시관 전체를 가득 메운 기발하고 위트 넘치는 작품을 보며 갖은 말을 쏟아낸다. 작품인지 철 지난 크리스마스 장식인지 헷갈리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고 “도대체 저건 뭐지?”라는 혼잣말을 쏟아내는 학생도 있고, 한쪽에 쌓여있는 눈더미를 보며 지나가 버린 겨울 이야기를 하는 아이도 있고, 피아노 위로 때때로 쏟아져 내리는 가루를 보며 “저건 어떻게 치우는 걸까?”라며 친구와 킥킥대는 이도 있다.
하지만 파레노는 작품에 대한 관객의 해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관객들이 입 밖으로 꺼내놓는 온갖 해석들이 모두 머리 위로 날아올라 말풍선에 투명하게 담기도록 천장 위에 수많은 투명 풍선을 띄워두었다. 파레노의 아름다운 상상력이 만들어낸 투명 말풍선들은 예술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격려한다. 이것 보라고.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드러낼 테니, 당신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흘려보내도 좋다고.
* 글쓴이-김현정
예술을 사랑하는 번역가. 꿈은 내 글을 쓰는 김작가. 남의 글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을 잠시 내려놓고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무수히 많은 말을 잘 꿰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글을 써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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