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권태로움
값비싼 공단을 풍성하게 이어붙인 검정 드레스로 몸을 휘감은 여자는 번쩍이는 금색 장식이 박힌 검정 가죽 구두를 꿰어신고 잔뜩 공들여 매만진 머리가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다. 딱 적당할 정도로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하품을 내뱉던 여자는 벗어나고 싶다.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화려한 춤동작을 뽐내는 사람들의 손과 눈이 뒤엉켜 이따금 곁을 스치지만 어렴풋한 미소를 짓는 여자의 눈은 권태롭다.
테이블 위에 놓인 반지르르 윤기 나는 고급 옷감 중 유독 눈에 띄었던 두툼한 공단을 고를 때만 해도 여자는 그저 새로 맞춘 드레스 위로 쏟아져 내릴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열망했다. 목둘레선이 높고 허리는 최대한 잘록하게 조여진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상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드레스가 완성되기만 하면 구김 하나 없이 완벽하게 갖춰 입은 차림새로 무도회에 나가서 괜찮은 가문의 남자가 다가와 주기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카를 바우어라는 교육이론가는 책을 읽으면 상상력과 감정이 억지로 뒤바뀌고 특히 여자의 경우 생식기에 문제가 생긴다고 단언했다. 그랬을 거다.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아온 서민들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여자의 생식기 운운하는 그 짧은 상상력이 불쾌하긴 하지만 사실 옳은 말이다. 아들을 낳아 대를 잇는 것이 여자의 숙명이라고 세뇌당하며 살아온 여자들이 사랑받는 아내가 되는 법을 알려주는 실용서 대신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파헤치는 진짜 책에 몰입하면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낯선 감정에 사로잡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뜰 수밖에 없다. 책은 인간의 상상력을 부채질하고 그동안 존재하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무언가를 갈망하게 만든다.
부유한 기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카탈루냐의 예술을 좀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문화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스페인의 국민화가 라몬 카사스(Ramon Casas). 무도회가 끝난 후 탈진한 여인의 얼굴은 고전주의 방식을 따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배경은 인상파의 화풍으로 그린 라몬 카사스의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코 여인의 손에 들린 한 권의 책이다.
무릇 숙녀란 그래야 한다는 갖은 가스라이팅에 넘어가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르고 살았던 여자의 삶을 통째로 뒤흔든 건 한 권의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독서는 여자를 바꿔놓았다. 흥겨웠어야 마땅한 무도회는 철없는 웃음소리로 가득한 의미 없는 소란이 됐다. 완성된 드레스를 입고 고대했던 무도회에 나섰지만 새 옷이 정말 예쁘다는 다른 여자들의 시기 어린 칭찬도, 유독 아름답게 반짝이는 여자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남자들의 뜨거운 시선도 여자의 마음을 파고들지 못했다. 그저 무도회 날 아침에 소파에 걸터앉아 읽었던 노란 표지의 책에 담긴 내용들이 여자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을 뿐이다.
글 쓰는 여자들
라몬 카사스가 소파에 드러누워 권태로운 표정을 짓는 여자를 그리기 20년 전이었던 1879년,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은 최초의 페미니즘 작품으로 꼽히곤 하는 <인형의 집(Et Dukkehjem)>을 발표했다. 카를 바우어가 여자들의 독서를 부정하고 그른 것으로 묘사한 지 90여 년만이었다. <인형의 집>은 세상이 여자들의 깨달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오랫동안 헌신했던 가정에서 자신은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남편의 옆자리를 완벽하게 메워주는 인형이었다는 깨달음을 얻은 노라는 거짓 행복을 박차고 나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 떠난다.
책을 읽는 여자들은 깨닫는다. “어디, 여자가!”라는 쌍팔년도식의 남녀 차별은 사라졌을지언정 운전에 능숙하지 못한 남자는 그저 ‘초보’로 불리지만 운전이 처음인 여자는 ‘김여사’로 매도되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낳은 아이가 잘못을 저질러도 아빠는 무죄 방면이지만 엄마는 ‘맘충’으로 폄훼되는 세상은 결코 평등하지도, 공평하지도 않다는 것을.
책 읽는 여자가 두렵다는 건 세상의 부조리를 눈치채고 있다는 뜻이다. 세상이 모두에게 평등하고 안온한 곳이라고 확신한다면 누구에게나 독서를 권장하면 했지 그 누구의 독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한쪽 눈을 질끈 감고 못 본 체하고 있지만 그 부조리 속에서 누군가가 견뎌낸 불편이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자각이 있기 때문에 그의 독서가 불편한 것이다.
여기, 책 읽는 여자보다 더 위험한 글 쓰는 여자들이 있다. ‘살롱 드 까뮤(Salon de Camu)’의 이름으로 하나가 된 우리 ‘글 쓰는 여자들’은 로댕의 연인 까뮤가 아닌, 각자의 삶을 조각해나가는 까뮤가 되어 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줄 글을 써볼 작정이다.
* 글쓴이 - 김현정
예술을 사랑하는 번역가. 꿈은 내 글을 쓰는 김작가. 남의 글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을 잠시 내려놓고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무수히 많은 말을 잘 꿰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글을 써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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