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일과 어뢰의 경우 일단 발사되면 외부로부터 전원을 공급받을 수 없으므로 모든 탑재 장비가 정상 작동하려면 반드시 비축전지(Reserve battery)가 필요하다. 선진국에서는 주로 고체 전해질 비축전지인 열전지(Thermal Battery, Li/FeS2)를 유도무기용 전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연구개발 초기에는 열전지 관련 기술이 전무한 상태여서, 그나마 기반 기술이 있던 액체 전해질 전지(Li/SOCl2)부터 먼저 개발에 착수했다. 연구원들은 수백 차례의 위험한 실험을 실시하며 리튬의 폭발적인 위력을 실감했고, 쉴 새 없이 SOCl2 가스의 시큼한 냄새를 맡아가며 노력한 끝에 마침내 2009년 국내 최초로 유도무기용 액체 전해질 비축전지 개발에 성공했다.
하지만 액체 전해질 전지는 출력특성(약 100W/㎏)이 열전지(약 10,000W/㎏)에 비해 약 100분의 1 수준으로 낮고, 저온 성능이 크게 떨어져 높은 출력을 요구하는 군사적 응용에는 제약이 있었다. 또한 작동 초기에 액체 전해질이 순간적으로 전지 스택(stack ) 내부로 주입되는 과정에서 전극간의 단락이 발생해 전지 파열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대부분의 휴대기기용 전지는 리튬(Li)을 활(活, active)물질로 주로 사용한다. 활물질이란 의미 그대로 살아있는 물질이므로 잘못 다루면 배터리 파열 및 화재, 폭발 위험성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액체 전해질을 사용하면 이 같은 위험성은 더욱 증가한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고체 전해질 전지인 열전지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열전지의 경우 내부 온도는 높지만 전해질 이동이 적어 안전성과 신뢰성이 탁월하고 출력특성 또한 우수하다고 판단됐다.
결론은 열전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열전지는 작동 온도가 500℃로 매우 높고 부식성도 강하기 때문에 우선 극한 환경에서 견딜 수 있는 수십 종의 부품부터 새롭게 개발해야 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복잡한 조성을 가지는 음극, 양극, 전해질 등에 쓰이는 전극 재료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모래와 같은 전극 활물질을 디스크(CD) 모양의 얇은 전극으로 찍어내는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어려운 과정이었다.
당시 연구원들은 매일같이 실험실에서 밤늦도록 연구개발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전극 조성, 입도 조절, 유기 바인더 등을 바꿔가며 실험을 진행했는데, 독한 바인더 냄새 때문에 공장 라인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다. 전화위복이었는지 이 덕분에 독립된 국내 최초의 열전지 전용 제조시설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후 2년간의 고생 끝에 시멘트 역할을 하는 전해질 염으로 모래 같은 활물질 표면을 도포하는 특허 기술을 개발했고, 비로소 세계 최고 수준의 강도를 갖는 전극 개발에 성공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순수 국내 기술로 첫 번째 큰 산을 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뜻밖의 복병이 나타났다. 미국에서 핵심 부품의 수출을 거부한 것이다. 열전지에 불을 지피는 핵심 부품인 착화기(igniter)와 화약 종이(heat paper)는 미 정부의 수출규제대상 품목이었다. 실험용으로 소량 구매할 때는 미국에서 수출허가를 내줬지만, 수입량이 많아지면서 심사가 점차 까다로워졌고 결국은 수출 거절 통보를 받게 된 것이다. 다급해진 상황에서 연구소는 업체와 함께 연구개발에 몰두해 착화기 국산화에 성공했다.
도화선의 일종인 화약 종이는 외국 열전지 회사로부터 어깨너머로 배운 기본 공정을 참조해 연구개발에 착수했다. 외국 화약종이는 중금속을 첨가해 연소 온도를 조절하는 기술을 적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열전지의 높은 작동 온도에서 납이 녹으면서 전기적 단락 현상이 발생했다. 연구팀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화약 종이 표면에 용융염을 코팅하는 독창적인 친환경 기술을 개발해 국제특허를 출원하는데 성공했다.
창의적 발상으로 한계를 극복하다
리튬(Li)은 이상적인 전극재료이지만, 녹는점이 180℃로 매우 낮아서 500℃의 고온에서 작동하는 열전지 안에서는 녹아 흘러내려 파열 및 폭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당시 미국과 유럽의 유명 열전지 기업은 금속 분말을 적용해 액체 리튬을 잡아주는 독점 기술을 개발해 이 분야에서 세계신기록(2,781 A·s/g)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진국의 기술을 추종하는 수준을 넘어 기술적 리더십을 가지고 이끌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접근방법이 필요했다. 외국 기술을 따라하면 국내 시장에서는 통할 수 있어도,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연구팀은 나노 신물질 전극 개발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착수했다.
이후 외국의 핵심특허 장벽을 회피하면서도 액체 리튬을 가둘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한 결과, 물을 잘 흡수하는 스펀지 구조를 적용해보기로 했다. 마침 2012년 초 연구소에서는 도전적인 신기술 개발을 장려하는 선행핵심기술과제를 공모하고 있었다. 연구팀은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면 충분히 신개념 전극재료 개발이 가능하리라 믿고 과제를 제안했고 마침내 해당 과제로 선정됐다. 때마침 기공 크기가 일정한 메탈폼(Metal Foam)이 국내에서 개발돼 샘플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리튬을 메탈폼 속으로 녹여 넣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쉽게 생각했던 이 실험은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연구팀은 '공융염 코팅'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용했다. 박막형 고체전해질에 용융염 전해질을 코팅 또는 접합하여 수십분의 일 수준으로 두께를 줄이고 부피 및 중량감소를 통해 열전지의 활성화시간을 획기적으로 감소시켰으며, 동시에 용융에 필요한 열원의 중량을 감소시키고 열전지의 작동온도를 낮추었다. 이를 통해 열전지의 에너지밀도 및 출력밀도를 향상시킬 수 있었으며, 국제 특허를 출원하고 마침내 세계최고기록(3,009 A·s/g) 또한 경신할 수 있었다.
열전지와 같은 군수용 핵심부품은 특수한 용도로 제한돼 있어 경제성이 매우 부족한 분야다. 따라서 정부연구기관에서 주도적인 투자가 있어야 하고, 산·학·연의 사명감이 없다면 선뜻 참여하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열전지는 연구원들의 치열한 고민과 토의, 그리고 창의적인 도전으로 거둔 값진 결실이었다. 또한 연구소를 비롯한 기업, 학계, 정부출연연구소 등 다양한 기관의 헌신적인 협력이 빛을 발한 좋은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연구소의 국방전원기술팀 연구원들은 군에서 당장 필요로 하는 전지 개발은 물론 극한 환경과 미래 전장에서 필요로 하는 차세대의 신개념 전원 개발을 위해 지금도 밤낮으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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