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10월 한 달은 어떠셨나요? 중간고사 때문에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벌써 2학기의 절반이 지나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요. 2학기의 절반이 지나갔다는 것은 이제 2026년이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뜻해요. 올해 계획했던 목표는 잘 이루고 있는지 돌아 보아야겠어요. 여러분은 잘 이루고 계신가요? 그렇지 않다면, 마지막 재정비의 기회로 삼아 남은 시간을 같이 가꾸어 나가요!
이런 피곤한 생각들은 잠시 접어 서랍 속에 넣어 놓은 채, 쉬는 시간도 필요해요! 그래서 이 피곤함을 달래주기 위해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특별호가 준비되어 있어요!
저도 3년 만에 부국제를 이유로 부산에 갔다 왔는데, 좋은 영화를 만나볼 기회에 들뜨게 되더라고요(물론 예매는 실패했지만). 저와 함께 <FEELM> 부국제 특별호를 읽으며 행복했던 추억들을 다시 떠올려 보아요.

FEELM 편집장 이상현
🎥 [특집]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10월에는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는 '부산국제영화제'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에 맞추어 이번 호에서는 부국제 특집이 가장 먼저 여러분을 맞이해 줄 거에요. '에디터들의 부국제 취재 기록', 문집부에서 진행한 부국제 이벤트였던 '맛집 21', 그리고 '새로운 영사기'도 준비되어 있어요! 부국제의 기억을 되새겨 보아요!
🌊 부산국제영화제 MT 🌊

일시: 10월 9일 ~ 10월 11일
장소: 부산 일대 및 시원게스트하우스
2학기 주요 영공 일정인 '부산국제영화제 MT'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MT에서는 임원들이 영화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부산을 즐기기 위해 각자 원정대를 꾸리기도 하였고, 첫날 밤에는 홈파티가 열려 '이재모피자'와 '삐뽀치킨'을 함께 즐기며(무려 메인 메뉴 전액 동비 지원!) 부원 간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영공인 분들이 함께해 주어 더욱 즐거웠던 시간이었어요!

✍️ 에디터들의 부국제 취재 기록
한편, 문집부 에디터들도 함께 부산을 찾았답니다. 서로가 다른 시선으로 다른 것들을 경험하고 왔어요. 에디터들이 바라본 부산의 모습을 확인해 볼까요?
1.박민제 에디터의 시선
<상상의 부산물>, 혹은 다시쓰는 부산국제영화제 실패기
저렴한 가격에 신청한 ‘시네필배지’가 가브리엘관 미디어&엔터테인먼트 학과 사무실로 왔다. 온라인 예매를 통해 보고 싶었던 영화를 모두 잡을 수 있었다. 장당 만 원보다 저렴하게, 그것도 일반 티켓팅과 별개의 경쟁을 통해 좌석을 구할 수가 있으니 너무 편리하고 집행위를 비롯한 한국의 기성 영화인들이 후배들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을 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른 이 배지를 가지고 기대하던 영화들을 하나하나 모두 보고 듣고 올 생각에 신이 가득이다.
10/9 (금)
일찍 일어나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역에 향한다. 먼저 18명분의 티켓을 출력한 뒤 잠시 테라로사에 들러 ‘플랫폼 서울 블렌드’를 아이스로 주문한다. 마침 공휴일이자 연휴의 시작이지만 손님이 별로 없어 금방 신선한 커피가 번호표와 교환된다. 상큼한 향을 맡으며 탄 정방향 KTX는 무척 빠르고 충전기를 꽂아 놓은 전원도, 무료 와이파이도 끊기는 일이 없다. 어차피 학부 필수 과목인 [Creativity & Visual Expression] 과목도 오늘은 휴강이라 딱히 공부할 것도 없어 여유를 즐기며 밀린 신보들을 하나씩 듣는다. 중간중간 영공 내 스터디에서 읽는 책인 유운성 평론가의 <식물성의 유혹>도 읽다 보니까 ‘즐겨찾기’ 트랙은 한가득이고 열차는 부산역 플랫폼 안이다. 꼭 가보고 싶었던 부산역 앞 유명 중식당은 이상하게도 한적해서 웨이팅 없이 바로 입장한다. 만두를 즐겨 먹지 않는 내 입맛을 바꿔놓을 인생 중식을 맛본 후 한적한 북항으로 향하니 부캉이가 지느러미를 흔들며 나를 반겨준다.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거리에서 귀여운 이목구비를 목격한 뒤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꼬리 지느러미를 멀찍이서 지켜본다. 그러고선 미리 예매해 둔 <미노타우르스>와 <에브리타임>을 관람하러 센텀시티로 떠난다. 영화는 역시 기대만큼 훌륭하다. 게다가 새로 생긴 차백도에서 신선한 밀크티를 극장에서 홀짝이니 벌써 황홀하다. 내가 아닌 다른 임원들이 포장해 올 이재모피자의 ‘루꼴라무화과’ 메뉴도 얼마나 맛있을는지… 물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맛이다. 게다가 처음 보는 부원들이 (목요)감상회의 탁월한 큐레이션에 대한 인상을 들려주며 중간고사가 끝나면 꼭 참석하겠다고 약속한다. 보람찬 하루다.


10/10 (토)
푹신한 침대에서 편안히 숙면을 취한 뒤 따뜻한 물로 샤워하니 개운한 아침이다. 오늘은 상영작 중 <라 페라>, <텐더 러빙 케어>, <와일드 호스 나인>, <우리, 파도처럼> 총 네 개를 잡았으니 센텀 안에서 돌아다니며 식사와 커피를 해결하면 된다. 다행히 그 근처에는 소문난 맛집과 카페가 많아 오히려 너무 많은 선택지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카페인 덕에 첫 회차 상영부터 또렷한 정신으로 영화를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마베이요, 그리고 마동석과 어깨를 겨루는 거장 ‘마’이크 리와 ‘마’틴 맥도나의 신작은 예상한 만큼 흥미로웠다. 마지막 회차에서 감상한 기대작 <우리, 파도처럼>은 자전적인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하는데, 프랑스의 뮤지션 오케이루(Oklou)가 음악으로 참여한 만큼 익숙한 곡들과 새로운 오리지널 송에 귀를 기울이는 재미가 있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부산 토박이이자 우리의 가이드가 되어준 동료 문집부 에디터가 단골 횟집에서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신선한 회의 생생한 식감 속에서 사뭇 내가 부산 해안가를 바로 앞에 두고 있다는 감각이 되살아났다. 첫날 만난 부캉이도 이런 감각을 위해 항구를 찾았던 것일까? 공짜 쿠우쿠우를 마치고 조심히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길 빌며 부원들과 절제된 음주를 즐긴다.


10/11 (일)
꿈속에서 많은 ‘잼얘’를 나누었다. 내가 아끼는 영공 내의 커플들이 서로(물론 커플 내에서) 좋아하며 웃음 짓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벅차오른다. 오늘은 <버킹 패스타드>와 <노트르 살뤼>를 보고 귀가하는 날이다. 비엘날래가 야간 개장을 하는 덕분에 저녁 늦게까지 부산에서 놀다 갈 수 있다. 각각 최근 관심 가지게 된 헤어조크의 신작과 유물론을 운영하시는 동명 님에게 추천받은 칸 호평작인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 정도의 성공률이면 내가 응원하는 모 프로야구 팀의 타율과도 별 다를 것이 없겠다 싶다. 플레이오프는 물론 한국시리즈까지 걱정이 없다. 어쨌든 스페이스 원지와 (구)부산남고등학교, 그리고 부산현대미술관에서 나뉘어 개최되는 부산비엔날레로 자리를 옮긴다. 부산은 넓지만 이동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 참 관광하기 편안한 도시다. 배우 이정재 씨가 반한 이유가 있음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일찍이 예매해 둔 얼리버드 티켓을 발권한다. 드렉시아(Drexciya), 은키시(Nkisi) 등 익숙한 이름의 뮤지션들을 비롯해 관심 가지고 있던 여러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업을 한 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니. 이런 훌륭한 기회를 십수 명의 “부국제 꺼드럭 원정대” 대원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 더욱 뜻깊다. 마지막 한 끼까지 최고의 가성비 맛집을 돌아다녔고 시간에 딱 맞게 정뱡향 KTX 열차에 탑승했다. 집 앞에 열차역이 있어서 도착하자마자 여독이 녹아내린다.


부산이었을까. 어쨌든 내년에도 “렛츠풀업2부산” 해야겠다!
에디터 | 박민제
2.박선화 에디터의 시선
임연정 감독의 <리커버리[1]>
: 내가 지닌 몸이 오로지 나의 것이기 위해,

서론 겸 사족
10월 8일 목요일 밤, 부산역에 도착하자마자 안도감을 느꼈다. 부산역 여기저기서 들리는 익숙한 사투리, 북항에서 건너온 특유의 짭쪼름하고 익숙한 바닷냄새, 마중 나온 부모님.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서 평안함을 느꼈다. 영화 동아리 에디터로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나에게 부국제란 고향을 가기 위해 주어진 아주 적절한 핑곗거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많은 동아리 부원들이 아시아 최대 규모 영화제에서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자하는 의지 혹은 열정을 가지고 부산까지 갔겠지만, 나의 경우엔 그런 기대 자체가 없었다. 부국제 기간에 부산에 있으면서 하고 싶은 거라곤 본가에서 나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강아지와 노는 것 그뿐이었다.
영화 동아리 문집에 강아지랑 놀았던 내용을 쓸 순 없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행사 참여는 해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수험생이었던 작년을 제외하고 매년 참석했었던 영화제이기도 하니까. 고등학생 때 대학생이 된 이후로 참여할 부국제는 뭔가 많이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렇게 다르지도 않았다. 영화 끝나고 뒤풀이로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것,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를 관람할 수 있게 된 것. 이 두 가지 말고는 차이점을 그닥 느끼지 못했다.
‘부산은 여전히 부산이고 나는 여전히 날…까?’란 생각으로 3일을 알차게 보냈다. 중학교 동창인 친구에게 서울역에서 한 시간 기다려 얻은 한정선 과일 찹쌀떡을 전달해 주고, 강아지랑 놀고, 동아리 사람들과 단체로 양곱창을 (매우 비싸게) 먹으러 가고, 강아지랑 놀고 22, 우리 동네까지 와준 동아리 부원 3명과 함께 산책로에 있는 정자에 앉아 회를 먹고, 겸사겸사 영화도 보러 가고. 그렇게 정신없이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부산에서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마지막 날인 만큼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에 엄마와 함께 단둘이 마지막 영화를 보러 센텀시티로 향했다.
역설적이게도.. 영화에 대한 기대 하나 없이 갔었던 부국제에서, 엄마와 함께 마지막 영화를 관람하고 GV까지 참석했었던 기억이 가장 인상 깊다. 시놉시스만 대충 읽고 자리가 연석으로 남아 있기에 덜컥 예매한 영화였는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부산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흐릿한 와중 그 영화에 대한 기억만 지나치게 선명하다. 따라서 조금은 뻔하고 지루할 수도 있지만, 부국제 당시의 감각을 되살려 임연정 감독의 <리커버리>를 리뷰해 보려 한다.

내가 지닌 몸이 오로지 나의 것이기 위해, 임연정 감독의 <리커버리>
임연정 감독이 연출한 <리커버리>는, 여성 액션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영화감독 ‘연정’이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몸을 쓰는 운동인 주짓수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외면해 왔던 몸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직시하는 내용의 영화이다. ‘연정’은 <리커버리> 이전에 꾸준히 극영화를 연출해 왔는데, 영화의 장르가 액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성 주인공들은 영화 속에서 하나같이 무언가를 파괴한다. 달리고, 깨뜨리고, 찢고, 산산조각 낸다. 파괴하는 대상은 주인공들의 내면에 있기도 하고, 외부에 감각 가능한 형태로 존재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여성 인물들이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연정’은 다음 영화로 ‘여성’이 주인공인 액션영화를 찍기를 원한다. 액션 영화를 찍기 위해선 몸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주짓수를 배우게 된다.
영화 초반엔 영화의 장르가 마치 스포츠처럼 느껴졌다. 가드, 마운트, 리커버리, 가드패스 등 주짓수의 기본 용어와 기술들과 으레 스포츠 선수들이 가지고 있을법한 중요한 마음가짐들을 하나씩 제시한다. 시퀀스들이 대부분 주짓수를 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 초반~중반부 내내 ‘연정’이 몸을 던져가면서 주짓수를 배운다. ‘연정’의 지인이 “주짓수하다가 손 다쳐서 시나리오 못 쓰면 어떡해?’라며 걱정하고, 실제로 무릎까지 다치면서도 주짓수를 배우는 것을 결단코 멈추지 않는다. 게다가 주짓수뿐만 아니라 서핑까지 배우기 시작하며 몸을 쓰는 일에 ‘연정’은 매몰된다.
왜 임연정 감독의 여성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무언가를 파괴하려 하는지, 감독이 굳이 ‘여성 액션’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주짓수 선수도 아닌 감독이 왜 시합에 나가려고 하는지는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내 몸이 내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수많은 나날들. 나의 몸이 자기들의 소유물인 것마냥 쉽게 다뤘던 사람들. 내가 지닌 몸이 오로지 나의 것이기 위해서는 나의 몸을 뺏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 나의 몸에 대한 통제권이 완전히 내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 그런 것들이 ‘연정’을 ‘여성이 남성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인 주짓수로 이끌었다고, 영화에서 담백하게 제시한다. ‘연정’은 마침내 본인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되고, 한 발 더 나아가 주짓수 시합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비록 아마추어들끼리 겨루는 경기이지만, 시합을 준비하는 내내 최선을 다한다. 긴장하였을 때 나쁜 습관들이 나오지 않도록, 익숙하지 않은 기술을 쓰지 않도록.. 내 몸에 대한 통제권을 오롯이 발휘하기 위해, ‘연정’은 도복을 입고 띠를 두른 채 경기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연정’의 시합을 응원하는 주짓수 도장 사람들이 경기 내내 목이 터져라 응원한다. ‘연정’은 리커버리를 잘하니까 승산이 있다고 말한다. 설령 당했더라도 리커버리를 잘 해낸다면 이길 수 있다고. 장담컨대 영화의 결말 부분에 배치된 ‘연정’의 주짓수 시합 장면은 그 어떤 여성 액션 영화의 시퀀스보다도 스릴 있고 박진감 넘쳤다.
여성들이라면 ‘나의 몸이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감각’을 무조건적으로 느껴봤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감각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공포는 여성들의 삶에 항상 도사리고 있다. 그것이 꼭 성과 관련된 문제가 아닐지라도. 분명 나의 몸인데 통제권 자체는 남에게 있는 것 같다는 미묘한 감각. 타인에 의해 내가 원하는 대로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언젠가는 올 것 같다는 걱정. 일상을 지배할 정도로 자주 느껴지는 나의 신체에 대한 증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여성들의 몸을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하며, 몸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으려 한다. 결국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내가 지닌 몸이 오로지 나의 것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영화에선 ‘리커버리’가 그 방법이라고 말한다. 위험하거나 불리한 포지션에서 빠져나와 다시 안전하거나 유리한 자세로 되돌리는 방어 및 회복 동작을 뜻하는 리커버리. 설령 당했더라도 리커버리를 잘 해낸다면 승산이 있다. 몸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더라도,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더라도, 증오가 끝없이 이어지더라도.. 이 모든 억압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내 몸에 대한 주체성을 회복한다면 우리의 몸은 비로소 우리의 것일 수 있을 것이다. ‘연정’에게 몸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쥐준 것이 주짓수였다면, 나에게는 무엇일 수 있을까. 우리에겐 무엇일 수 있을까.
스페셜 땡스-투
영화 이후 이어진 GV에서 “딸이 올해 성인이 됐고 지금은 떨어져서 사는데, 항상 그런 마음이 있었거든요. 여성으로 살면서 겪게 되는 상처들, 그리고 남에게 말하자니 너무 사소하지만 본인에게는 상처가 되고 폭력이 되는 순간들을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며 정말 많이 겪을 텐데, 그것들을 엄마 아빠 품 안에서만 자란 아이가 잘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내면적인 불안이 항상 있었거든요. 근데 그런 상황이 와도 딸이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일종의 힌트를 감독님께서 주신 것 같아서 너무 감사드립니다.”라고 용기 있게 발언해 주셨던 나의 어머니에게 감사드린다.
에디터 | 박선화
3.손예진 에디터의 시선
엔딩 크레딧,

바다에 가면 느껴지는 묘한 해방감이 있다. 어쩌면 그 해방감은 자연이라는 미지의 존재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과,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나를 돌아보며 일상의 고민들 또한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닫는 데서 오는 위안인지도 모른다.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볼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든다. 쉼 없이 움직이는 자동차와 사람들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면, 그제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현상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 아래에 있는 우리는 좀처럼 그렇게 큰 시야를 갖지 못하기에, 당장 눈앞에 놓인 과업을 해치우느라 한 치 앞을 살피기에도 바쁘다.
어쩌면 예술의 미학이란 바로 이러한 일상에 잠시 멈춤 버튼을 눌러 주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익숙해서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고,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일. 거창한 사회적 담론이 아니더라도 좋다. 누군가의 사소한 대화, 지나간 인연에 대한 기억,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풍경을 스크린 너머로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잠시 다른 삶에 머물 수 있다. 시나 소설이 인상주의 회화처럼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는 예술이라면, 영화는 그 순간들을 하나의 서사로 펼쳐 놓는 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올해 처음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수능이 끝나고 친구들과의 부산 여행에서 꼭 한 번 영화제를 가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곳을, 대학생이 되어 동아리 활동의 일환으로 찾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치열한 티켓팅을 뚫고 만난 영화들 가운데, 사랑이라는 보편의 감정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두 편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랑의 지평선 너머로》
가게를 폐업한 태영(박송열)과 주미(원향라) 부부에게 새 생명이 찾아온다. 기적처럼 찾아온 임신은 축복이지만, 출산 이후의 삶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육아의 체력전과 경제적 부담, 피로 속에서 엇갈리는 부부의 마음.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피로 속에서 허둥대고 삐걱거리며, 부부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그 이후의 삶을 온전히 예측할 수 없었음을 깨닫는다. 그들 앞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 펼쳐져 있다. 실제 부부인 두 배우와 감독은 돌봄이라는 새로운 챕터 속에서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영화는 삶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비추어 ‘먹고사는 것’ 너머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관찰적이고 담백한 시선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화면 연출이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사물의 형태조차 온전히 알아보기 어렵고, 빛이 있어야 비로소 각자의 색을 구별할 수 있다. 같은 세계도 빛의 유무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빛의 특성은 영화 속 부부의 일상을 바라보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육아를 하는 부부에게 밤은 단순히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 아닐 것이다. 아이가 잠들고, 부모도 비로소 쉴 수 있는 시간. 세상의 소리와 불빛이 조금은 잦아들고, 밤만큼은 평화롭기를 바라는 마음. 낮과 밤은 같은 일상 속에서도 서로 다른 감각과 의미를 지닌다. 영화는 흑백과 컬러를 오가며 부부의 일상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시간의 감각과 삶의 여러 면모를 드러낸다.
육아는 그 자체로 압도적인 현실이다. 영화는 그 현실을 낭만적으로 포장하는 대신, 버겁고 난처한 순간들까지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힘에 부치면서도 다시 해 보고, 어긋나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것. 어쩌면 이 영화는 사랑이란 완벽한 순간을 함께하는 일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일상을 함께 견디며 계속해 보는 일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낮과 밤은 서로에게》
영화는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하나의 카페를 스쳐 간 네 쌍의 남녀의 대화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전한다. 카페라는 공간을 매개로 닿을 듯 닿지 않을 듯한 인연, 중학교 시절의 인연과 우연한 재회, 비즈니스와 사적인 만남 사이에서 오가는 미묘한 감정, 오랜 연인들의 이야기까지 펼쳐진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마치 카페 한편에 앉아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기보다 인물들의 대화가 이어지고, 그 안에서 감정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복잡한 장치로 관객을 압도하기보다, 일상에서 마주칠 법한 사람들의 말과 표정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한다.
불특정 다수가 오고 가며 잠시 머물다 떠나는 카페. 그곳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영화관에 들어와 잠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갈 대화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래 묻어 두었던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에 기대어 나 자신의 삶과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바쁘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의 일상과 감정을 지나쳐 버린 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그 자체로 일상에 작은 틈을 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와는 무관해 보였던 감정이 어느새 내 안의 기억과 맞닿기도 한다. 그렇게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내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나의 내면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두 영화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과 관계의 모습을 비춘다. 《사랑의 지평선 너머로》가 대사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을 자연스러운 화면과 연출로 담아낸다면,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인물들의 대화에 집중하며 그 사이에서 감정이 피어나는 순간을 포착한다. 두 영화 모두 인물의 삶을 섣불리 재단하거나 관객에게 하나의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인물들의 삶을 비추어,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 각자의 감정이 들어설 자리를 남겨 둔다. 누군가는 공감하고, 누군가는 질문을 품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것이다. 그 여백이야말로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야기가 계속되는 이유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부산은 단 한 칸의 공백도 남겨 두지 않으려 바쁘게 채워 온 시간들 사이 쉼표였다. 해야 할 일을 쳐내고, 새로운 경험을 쌓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얻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달려오다 보면 멈추는 일조차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밤의 고요가 낮의 분주함 뒤에 찾아오듯, 살아 있다는 감각 역시 때로는 멈춤 속에서 선명해진다.
동기와 저녁을 먹고 해운대를 산책하는 일, 카페에 앉아 부국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낯선 사람들의 대화를 듣는 일. 그리고 영화관에서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 그 순간만큼은 눈앞의 과업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일상의 지평선 너머로 숱한 낮과 밤을 채워 나갈 서영공 부원들에게 이번 부산에서의 기억이 잠시 숨을 고르는 쉼표였기를, 그리고 구독자분들에게도 이 뉴스레터가 잠시 일상의 쉼이 되기를 조심스레 바라본다.
에디터 | 손예진
4.강시형 에디터의 시선
모두의 어머니, 각자의 어머니
〈빵과 책〉은 이란의 마지드 마지디 감독이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처음 선보여 부산 어워드 대상을 받은 영화다.[2] 국경 지대의 가난한 마을에서 계약직 교사 솔란은 급식을 후원하던 독지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함께 아이들의 끼니를 마련하고, 모자란 돈을 벌기 위해 석유 밀수에까지 손을 댄다. 상영 뒤 관객과의 대화에서 감독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솔란이 아니라 사실상 그의 어머니라는 취지로 말하며,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을 거듭 강조했다. 자신의 가정사도 덧붙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가 다섯 남매를 수십 년간 홀로 키웠으며, 촬영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촬영 내내 장면마다 떠올렸다고 했다.
한 사람의 어머니를 향한 애도가 영화로, 그리고 모든 어머니를 향한 헌사로 이어진 셈이다. 이 글에서 감독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반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감독의 진심을 의심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영화는 끝나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누구도 떼어낼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 의미는 누구에게도 완전히 같지는 않다. 여기에 어머니 자신이 자기 행동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까지 더하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한 사람의 증언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어머니를 근거로 어머니 일반에 관해 말한다.
더구나 문화적으로 모성에는 다른 가족 관계보다도 짙은 숭고함이 덧씌워져 있어서, 다른 경험을 꺼내는 일 자체가 누군가의 성역을 건드리는 일처럼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래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이야기이면서, 바로 그 때문에 유독 쉽게 ‘무례’해지는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어떤 모성관이 옳은지 보태지도 않고, 그저 모성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왜 그토록 쉽게 서로를 지우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갈라지는 경험과 이론을 정리하고, 이어서 어머니의 자리를 살핀 뒤, 모두가 당사자라는 사실이 어떻게 ‘무례’로 이어지는지 짚어볼 것이다.

1.갈라지는 경험, 경합하는 이론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몸을 거쳐 태어났다. 존재의 차원에서 이 사실에는 아직 예외가 없다. 그러나 태어난 다음부터 이야기는 갈라진다. 누군가에게 어머니는 마지디 감독의 어머니처럼 평생을 건 헌신의 기억이다. 누군가에게는 일찍 떠났거나 처음부터 곁에 없던 부재이고, 누군가에게는 낳은 사람과 기른 사람이 서로 다른 두 얼굴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방치와 학대, 착취의 다른 이름이다. 특히 어머니를 포함한 양육자가 아이를 해치는 일은 드물게 뉴스에나 나오는 사건이 아니다. 국내에서 2025년 한 해에만 아동학대로 판단된 사례가 2만 3천여 건이었고, 그 가해자의 85.3%가 부모였다.[3]
1988년 도쿄의 이른바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도 그런 일 가운데 하나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자취를 감춘 뒤 홀로 네 아이를 키우던 어머니는, 새 연인과 살기 위해 집을 나가며 어린 동생들을 맏아들에게 맡겼다. 아이들은 모두 출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동안 생활비를 보내고 가끔 들여다보았지만 그마저 점점 끊겼고, 그사이 막내가 목숨을 잃었다. 사건은 아이들끼리 지내는 것을 알게 된 집주인의 신고로 드러났다.[4] 어머니는 유기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이후 두 딸의 양육권을 되찾았다. 돌봄과 방치는 서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도 이어져 있을 수 있다.
갈라지는 것은 경험만이 아니다. 누군가를 어머니로 만드는 것이 출산인지 돌봄인지, 모성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를 두고 오랜 대립이 이어져 왔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한쪽 끝에는 모성을 생물학적 본성으로 보는 ‘본성론’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사회가 만든 규범, 더 나아가 여성을 억압해 온 장치로 보는 ‘구성론’이 있다. 두 입장 모두 근거가 있다. 2017년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실린 연구는 첫아이를 낳은 여성 25명의 뇌를 임신 전후로 비교했다. 타인의 마음을 읽는 데 관여하는 영역의 회백질이 달라져 출산 후 2년까지 이어졌고, 그 변화로 아기에 대한 애착 점수를 예측할 수 있었다.[5]
반대로 철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만들어진 모성』(1980)에서 18세기 파리의 기록을 내밀었다. 1780년 파리 경찰총감은 한 해에 태어나는 아이 2만 1천 명 가운데 친어머니의 젖을 먹는 아이는 1천 명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유모의 집으로 보내진다고 썼다. 물론 양쪽 모두 반론이 있다. 건강 분야 기자 첼시 코나보이는 『마더 브레인』(2022)에서, 아이를 꾸준히 돌보는 아버지의 뇌도 출산한 어머니와 닮은 방식으로 바뀐다는 연구들을 들어 모든 어머니가 모성을 타고난다는 통념을 반박했다.[6] 바댕테르가 인용한 수치에 대해서는 역사인구학자 피터 래슬릿이 서평에서 믿기 어렵다고 비판했다.[7]
그런데 두 이론이 다투는 것은 어디까지나 어머니 일반에 대한 ‘설명’이지, 한 사람의 어머니에 대한 ‘판결’이 아니다. 모성이 본성이라고 해서 방치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모성이 규범이라고 해서 헌신이 진심이 아닌 것도 아니다. 출산과 함께 뇌가 바뀐 어머니도 아이를 떠날 수 있고, 사회의 기대 속에서 어머니가 된 사람도 그 기대와 무관하게 아이를 사랑할 수 있다. 어느 이론도 한 사람의 경험을 대신 증언해 주지 않는다. 두 이론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지 판정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논쟁이 학술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결코 남의 일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성은 본능이다”라는 문장은 누군가에게는 자기 어머니에 대한 증언이고, 누군가에게는 자기에 대한 판결이다. 문제는 이론이 판결로 쓰일 때 생긴다. 본성론이 판결의 잣대가 되면 모성을 느끼지 못한 어머니는 어딘가 고장 난 사람이 되고, 어머니에게 상처받은 자식은 “그래도 엄마잖아”라는 말 앞에서 자기 경험을 접어야 한다. 반대로 구성론이 판결의 잣대가 되면 어머니의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가부장적 규범에 길든 사람이 되고, 그 헌신을 스스로 택하고 긍지로 여긴 어머니는 모성 이데올로기에 착취당한 피해자로만 남는다. 어느 쪽이든 설명이 판결로 둔갑하는 순간, 누군가의 삶은 오류로 처리된다.

2.어머니라는 또 하나의 당사자
1장이 어머니를 바라보는 자식과 바깥의 시선을 다루었다면, 이제 시선을 어머니 쪽으로 돌릴 차례다. 자식 역시 어머니의 삶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타자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어머니가 산 삶의 일부일 뿐이고, 어머니에게는 자식이 보지 못한 시간과 고르지 못한 선택지, 끝내 말하지 않은 사정이 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기 행동을 어떻게 인식하고 규정하는지는 자식의 경험만큼 무게를 갖는다. 그리고 그 인식 역시 단순하지 않다. 진심으로 자식을 위한다고 믿은 일이 자식에게는 다르게 경험되기도 하고, 자식을 위한다는 명분이 어머니 자신의 욕망을 위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부모와 자녀에게 같은 양육을 평가하게 한 연구 85편을 종합한 메타분석에서, 두 사람의 평가는 의미 있는 수준으로 일치하긴 했지만 그 정도가 크지 않았고, 부모의 보고는 자녀의 보고보다 전반적으로 더 호의적이었다.[8] 이 차이에는 자기 양육을 좋게 보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곧 거짓말은 아니다. 어머니가 품은 진심과 자식이 겪은 경험이 어긋나는 것은, 같은 관계를 서로 다른 자리에서 겪기 때문일 수 있다. 명분과 욕망이 뒤엉킨 말로는 “다 너 잘되라고 그랬다”가 대표적이다. 이 말이 꼭 거짓인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정말로 자식이 잘되기를 바랐을 수 있다.
다만 그 ‘잘됨’의 모양이 이루지 못한 자기 꿈이나 남들 앞에서의 체면과 겹쳐 있을 때, 어머니 자신도 그 둘을 구별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런 뒤엉킴은 실험으로도 관찰되었다. 8~15세 자녀를 둔 네덜란드 부모 73명(그중 89%가 어머니)에게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떠올리게 하자, 자녀를 자기 일부처럼 여기는 부모에게서 그 꿈을 자녀가 대신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 지인의 이루지 못한 꿈을 떠올리게 했을 때는 이런 경향이 나타나지 않았다.[9] 한 나라의 작은 표본에서 얻은 결과이긴 하지만,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자기 삶을 만회하고 싶은 마음은 하나의 바람 안에서 따로 떼어내기 어려울 만큼 섞여 있을 수 있다.
결과로 어머니의 사랑을 판정하려는 시선도 있다. 1999년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격 사건 가해자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는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썼다. 언론은 그를 무관심하고 무능한 부모로, 혹은 아들의 증오를 알고도 덮어준 부모로 그렸다. 그는 책에서 청소년기의 우울증이 어른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조차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이 아는 아이를 자신이 아는 최선의 방식으로 길렀지만, 자신이 모르는 존재가 되어 버린 아이를 기르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고 썼다. 아들과 공범이 왜 그랬는지 밝혀 줄 단 하나의 퍼즐 조각을 찾으려는 생각도 버렸다고 했다. 이 회고는 당연히 정답이 아니지만, 결과만으로는 그의 사랑을 판정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 판정은 학문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통용되기도 했다.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의학계의 상당 부분은 자폐의 원인을 아이를 차갑게 대한 어머니에게서 찾았다. ‘조기 유아 자폐증’을 처음 보고한 정신과 의사 레오 캐너는 1949년 자폐아들이 ‘감정의 냉장고’ 속에서 길러졌다고 썼고, 브루노 베텔하임은 1967년 『텅 빈 요새』에서 양육이 자폐를 낳는다고 주장했다.[10] 이른바 ‘냉장고 엄마’ 이론이다. 이 이론은 1960년대 중반부터 반박되기 시작했고, 1970년대 후반 쌍둥이 연구 등에서 유전적 요인이 드러나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그사이 많은 어머니가 자기 탓이라는 죄책감 속에 살았다.
결과를 보고 어머니의 따뜻함이 부족했다고 내린 판정은, 그 판정을 내린 쪽이 권위 있는 전문가였는데도 틀렸다. 이 경우들이 보여주는 것은 어머니의 진심도, 자식이 겪은 경험도, 그 관계가 낳은 결과도 모성의 의미를 확정하는 최종 권위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진심은 자식의 경험을 지우지 못하고, 자식의 경험은 어머니의 진심을 거짓으로 만들지 못하며, 결과는 그 둘 가운데 어느 쪽의 손도 대신 들어주지 못한다. 물론 학대나 방치처럼 명백한 가해가 있었다면 그 사실과 책임을 가리는 일은 별개다. 행위를 판단하는 일과 결과에서 거슬러 올라가 그 관계에 담긴 사랑의 의미까지 확정하는 일은 다르다.
그런데 일상에서 어머니도 이 이야기의 또 다른 당사자로서 발언한다. 자식이 길러진 경험으로 말한다면, 어머니는 길러 낸 경험으로 말한다. 둘 다 1인칭의 경험이고, 어느 쪽도 상대가 대신할 수 없다. “엄마가 돼 봐야 알지”나 “다 너 잘되라고 그랬다”는 어머니의 자리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고, 그 자리가 주는 권위로 자식의 경험을 기각하기도 한다. 아직 어머니가 되어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식의 경험이 섣부른 판단이 되는 식이다. 자식이 자기 경험으로 어머니를 판정하듯, 어머니도 자기 인식으로 자식의 경험을 판정한다. 아무도 최종 권위를 갖지 못한 이야기에서 모두가 최종 권위처럼 말하는 것이다.

3.모두가 당사자인 이야기
결국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에는 구경꾼이 없다. 누구에게도 그 의미가 같지 않고 어머니 자신조차 그 의미를 확정하지 못하지만, 모두가 자식으로서, 또 누군가는 어머니로서 이 이야기의 당사자다. 당사자라는 사실은 보통 발언의 근거가 된다. 겪어 본 사람의 말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의 일반론을 바로잡는다. 그러나 모두가 당사자인 이야기에서 이 근거는 다르게 작동한다. 모성에 관한 주장은 대개 자기 삶에서 길어 올린 것이어서 주장과 삶이 잘 분리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이렇다’는 문장 밑에는 ‘내 어머니는 이랬다’나 ‘나는 이런 어머니다’가 깔려 있다. 모성에 덧씌워진 숭고함은 이 결합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숭고한 것에 대한 반론은 의견 차이가 아니라 모독처럼 들리기 쉽다. ‘무례’는 여기서 생긴다. 그것은 거친 말투나 악의가 아니다. 저마다 자기 삶으로 발언의 정당성을 얻었다고 믿기에 자기 의견에 대한 지적은 자기 삶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바로 그 정당성으로 타인의 경험은 가볍게 기각해 버리는 태도다. 존중받아야 할 경험과 무시해도 되는 경험이 같은 원리로 갈리는 셈이다. 자기 것이냐 남의 것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이 ‘무례’는 정중한 말로도, 위로의 말로도, 때로는 비평의 언어로도 저질러진다. 오히려 자기 삶에 대한 확신이 클수록, 그 확신이 진실할수록 더 쉽게 저질러진다.
모성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리에서 이 ‘무례’가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는 이스라엘의 사회학자 오나 도나스의 연구를 둘러싼 반응에서 볼 수 있다. 도나스는 2015년 연구에서 아이를 사랑하지만 어머니가 된 것은 후회한다고 말하는 여성 23명을 인터뷰했다.[11] 어머니들이 어머니의 자리에서 한 증언이었다. 이 연구가 독일에 소개되자 신문 칼럼과 토크쇼, SNS에서 몇 달 동안 논쟁이 이어졌고, 희생적인 모성상을 내려놓자는 목소리와 젊은 여성들의 투정이라며 조롱하는 목소리가 엇갈렸다.[12] 같은 증언이 어머니가 된 다른 여성에게는 자기 선택에 대한 부정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에게는 자기 어머니에 대한 모독으로 들릴 수 있다.
같은 구조는 반대 방향에서도 나타난다. 농장 브랜드 ‘발레리나 팜’을 운영하는 미국의 인플루언서 한나 닐먼은 줄리아드에서 발레를 공부했지만 무용수 대신 농장에서 여덟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가 되었다. 2024년 7월 영국 『더 타임스』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발레리나가 될 참이었다”고 하면서도, 아이를 낳기 시작하면 삶이 달라지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기사는 그가 보모 없이 여덟 아이를 돌본다는 것과, 그가 때로 탈진해 일주일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남편의 말도 함께 전했다.[13] 이 기사를 두고 SNS에서는 그가 꿈을 포기하도록 압박받았을 뿐 그 삶을 스스로 고른 것이 아니라는 반응이 쏟아졌다.[14]
닐먼은 그 기사가 자신을 억압받는 사람으로, 남편을 가해자로 그렸다며 “그보다 더 사실과 먼 것은 없다”고 반박했다. 삶의 시기마다 무용과 결혼, 모성, 사업이라는 서로 다른 꿈이 있었다는 것이다.[15] 기사가 전한 고된 일상을 근거로 사회적 압력을 짚는 비판 자체는 ‘무례’가 아니다. 다만 같은 비판이 자기 삶을 스스로 택했다고 말하는 어머니에게는, 그 선택을 사회가 주입한 규범의 결과로 환원하는 말로 들릴 수 있다. 비판이 구조에서 사람으로 옮겨 가는 순간, 모성 신화를 경계하는 말 역시 그 삶을 살아낸 사람의 증언을 지울 수 있다. 당사자가 스스로 말하는 삶을 바깥의 판단으로 덮어쓰는 이런 일은 익명의 반응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2005년 미국의 철학자 린다 허시먼은 고학력 여성이 아이를 키우려고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실수라고 썼다. 그 여성들이 집에서 행복해 보여도, 그들이 하는 일은 자신에게도 사회에도 나쁘다는 것이다.[16] 전업 어머니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깎아내려졌다고 반발했고, 반론 가운데에는 숨 막히는 직장을 떠나는 것이 정치적으로 퇴행적인 선택은 아니라는 말도 있었다.[17] 이런 비판도 늘 바깥의 이론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의 희생을 아픔으로 지켜봤거나 모성 규범을 압박으로 겪어 낸 사람에게 그 이론은 남의 학설이 아니라 자기 삶의 증언이 된다. 문제는 그 증언이 상대의 진실을 기각하는 데 쓰인다는 것이다.

4.결론
모성을 옹호하는 쪽이든 경계하는 쪽이든, 말하는 사람은 저마다 자기 어머니에 대해, 혹은 자기 모성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마지디 감독은 자기 어머니를 떠올리며 모든 어머니에게 영화를 바쳤다. 같은 헌사를 보며 객석의 누군가는 자기 어머니를 겹쳤을 것이고, 누군가는 겹칠 얼굴이 없었을 것이며, 누군가는 겹치고 싶지 않은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셋 중 누구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셋이 서로에게 자기 어머니를 근거로 말하기 시작하면, 대화는 곧 서로의 삶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그토록 쉽게 ‘무례’해지는 것은 누군가 악의를 품어서가 아니다. 모두가 진심이고, 모두가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에디터 | 강시형
🍕 맛집 21
이번 부국제 MT에서는 문집부가 준비한 소소한 즐길 거리인 '맛집 21'이 진행되었는데요! 여러분이 부산에서 먹은 음식들의 사진과 별점, 한 줄 평을 받아 보는 이벤트였습니다. 그 중에 예쁜 사진을 찍으신 분들을 위한 상품들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찍은 사진을 보니 저도 너무 먹고 싶더라고요! 다음 부산 여행에는 꼭 여기에 있는 맛집들을 가야겠어요.
파도당

★★★★★
사진 | 윤채린
사십이

★★★★★
사장님이 친절하시고 회 식감이 아주 좋아요
사진 | 조유나
미로

★★★★☆
개맛있네요
사진 | 신채윤
우사기

★★★★☆
일본보다 맛있을지도
사진 | 임다현
도머

★★★★
칵테일 2만원으로 비싸긴하지만, 해운대구에 위치해서 뷰도 엄청 좋고 분위기가 좋았음.
시그니처 칵테일 모두 맛있었고, 위에 꽃 올려진 것도 예뻤음
사진 | 조해담
빨간 떡볶이

★★★★☆
사진 | 이정빈
🎥영(화)사(람)기(록)
이번 호부터 영(공)사(람)기(록)은 영공 내부에서만이 아닌 외부 영화인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영(화)사(람)기(록)으로 확장됩니다. 앞으로 영공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될 다른 사람들의 영화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이번 <FEELM> 23호에서는 제가 부국제 MT 기간에 부산대학교 중앙영화제작동아리 '누구의 영화' 분들을 만나 몇 가지 질문을 여쭤보며 영화 제작 경험이나 영화 취향 등을 듣고 왔습니다.

Q1: '누구의 영화' 동아리와 본인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누구의 영화' 동아리는 부산대학교 유일의 영상예술분과 동라리로, 동아리 이름에서 짐작하실 수 있다시피 영화나 영상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동아리입니다. 영화 제작을 중심으로 시나리오부터 촬영, 편집까지 전공과 관계없이 직접 많은 걸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준호님: 저는 '누구의 영화'에서 저번 학기에 영화도 만들었고, 지금은 간부로도 활동하고 있는 '조준호'라고 합니다.
준서님: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의 영화' 부원이자 이곳에서 두 차례 감독을 해본 경험이 있는 '박준서'라고 합니다.
Q2: 처음 영화 제작 동아리에 가입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준호님: 19살 20살 정도에 영화에 입문하게 되어 비록 진로로 삼지 않더라도 20대 때 영화를 만들어 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시간과 돈뿐만 아니라 촬영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부족하여 외부에서 만들기는 힘들다 보니 영화 제작 동아리를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준서님: 초등학생 때 한 영화에 푹 빠져, 직접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감독의 꿈을 키웠습니다. 이후 친구들과 100편이 넘는 영상을 촬영 및 편집하고 저만의 시나리오를 창작하며 영상 제작을 즐겨왔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제게 대학 진학 후 '누구의 영화' 가입은 당연한 필연이었습니다. 이제는 마음이 맞는 든든한 동료들과 함께, 고등학생 때보다 훨씬 더 폭넓고 새로운 영화적 시도를 마음껏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Q3: 두 분 다 동아리에서 영화를 제작한 경험이 있으신 거네요! 어떤 영화인지 궁금합니다. 설명 가능할까요?
준호님: 제 영화 <무기력의 중요성>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 가사를 한국 대학생의 현실에 맞게 각색한 작품입니다. 20대 초반 방황하고 게을렀던 저의 과거에 대한 참회를 담았습니다. 동시에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직접 던지고자 제 4의 벽을 깨는 연출도 시도했습니다. 한마디로 번아웃이 온 대학생의 무기력과 게으름을 솔직하게 그려낸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준서님: 동아리 첫 작품이자 유일하게 유튜브에 공개된 <파이널 컷>은 제 힘든 시기의 감정을 담은 자전적 영화입니다. 무의미한 삶 속 '우울'을 고등하게 여기는 남자와 '사랑'을 믿는 여자의 만남을 통해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했습니다. 다행히 제작 과정에서 크루들과 교류하며 제 안의 어두운 감정을 주인공에게 남겨둔 채 온전히 해방될 수 있었고, 당시 함께해 준 분들께 깊이 감사합니다. 현재는 SF 장르에 새롭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Q4: 그렇다면 영화를 제작할 때 가장 큰 희열을 느끼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준호님: 첫 영화 제작은 로케이션과 음향 문제 등 쉽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장소 문제로 길 한복판에서 촬영해야 했을 때도 있었지만,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덕분에 무사히 장면을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희열을 느낀 순간은 마지막 컷에 '오케이'를 외쳤을 때입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제가 전체를 이끌어, 큰 사고나 다툼 없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온전히 마무리했다는 사실에 벅찬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준서님: 영화 제작의 희열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영감의 원천이 된 단 하나의 장면이 촬영장에서 즉흥성을 더해 눈앞에 실현되는 순간의 설렘입니다. 둘째는 완성된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다양한 해석을 들을 때입니다. 제 영화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작은 세상을 구축하고 무한한 질문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무척 매력적입니다. 제가 구상한 세상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결국 영화를 만드는 이유이며, 현재 전공인 건축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Q5: 이제 동아리에서의 경험을 넘어 개인적인 영화 이야기가 궁금해져요. 평소 어떤 영화를 좋아하시나요?
준호님: 저는 남들과 조금 다르게 냉소적이고 서늘한 분위기의 영화를 선호합니다. 대표적으로 데이빗 핀처, 클린트 이스트우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작품들을 좋아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몰입도가 높고 깊이 있어 진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도 즐겨 봅니다. 주로 일본이나 대만 영화 중에 이런 작품이 많은데, <하나 그리고 둘>, <패왕별희>, 그리고 작년에 개봉한 <해피엔드> 같은 영화들을 좋아합니다.
준서님: 방식에 상관없이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하고자 하는 말'이 담긴 영화를 좋아합니다. 거창한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치열한 고민이 담긴 영화는 감독과 관객 사이에 솔직한 울림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화면과 음향의 형태로 제 마음속에 남는 그 울림들이 좋아 영화를 봅니다. 그렇게 영화를 통해 울림을 차곡차곡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 저와 온전히 공명하는 작품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Q6: 영화를 사랑하여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는 첫 영화 기억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렸을 때 본 위인전에 등장한 '스필버그' 감독이 첫 기억이고 지금도 스필버그 영화는 전부 좋아해요. 두 분의 인생에서 영화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첫 기억'은 무엇인가요?
준호님: 제 첫 영화관 기억은 아주 또렷합니다. 부모님은 제가 첫 영화로 좋은 작품을 보길 바라셨고, 그 덕에 6살 때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극장에서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사람들이 괴물에게 쫓겨 도망치던 장면들이 단편적으로나마 무척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이후로도 이 영화를 수없이 다시 봤지만, 영화관에서 처음 마주했던 그 강렬한 기억만큼은 지금도 제 안에 깊이 남아있습니다.
준서님: 어릴 적 저녁마다 불 꺼진 거실에서 어머니가 대여해 주신 영화를 보던 추억이 있습니다. 가족들이 먼저 잠들어도 저는 늘 끝까지 영화를 다 본 뒤에야 잠자리에 들곤 했습니다. 이런 경험 덕분에 영화는 제게 무척 편안하고 친숙한 존재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시 보았던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다시 찾아볼 만큼, 현재 제 삶과 가치관의 많은 부분을 형성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Q7: 또 일상에서 문득문득 영화가 떠오를 때도 있어요. 저는 감동을 느낄 때 제가 초등학생 때 영화를 보며 감동을 처음 느낀 <괴물의 아이>가 그러한데요. 비가 올 때 생각나는 영화, 특정 소리, 냄새, 시간 등 등... 일상의 어떤 것과 연결되어 조건반사처럼 떠오르는 영화가 있으신가요?
준호님: 본가 주변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많아 거리를 지나는 학생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럴때면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하며 옛 추억에 잠기곤 합니다. 동시에 <너와 나>, <파수꾼> 처럼 학창 시절을 배경으로 한 한국 독립 영화들이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합니다.
준서님: 길을 걷다 문득 햇빛이 드리울 때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의 마지막 장면과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매번 변하는 세상과 제 감정과는 무관하게, 늘 변함없고 가치중립적인 태도로 무심하게 세상을 비추는 햇빛의 존재가 제게는 아주 큰 위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Q8: 이제 곧 끝나갑니다. 이어서 세 질문 드릴게요. 여태까지 본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 4개만 뽑아 주세요! 그리고 짧은 이유도 부탁드려요.

준호님: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 데이빗 핀처의 <세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 코엔 형제의 <블러드 심플>을 꼽고 싶습니다. 이 작품들은 주제나 미장센이 직관적이고 강렬하며, 제가 선호하는 냉소적이고 서늘한 분위기를 지녔습니다. 특히 억지 해피엔딩이나 신파를 극도로 싫어하는 제 취향에 완벽히 부합해 더욱 끌립니다. 그 중 <시계태엽 오렌지>는 압도적인 테크닉과 미장센, 인간의 자유 의지와 강요된 선에 대한 묵직한 고찰을 담고 있어 좋아합니다.

준서님: 인생 영화로 샬롯 웰스의 <애프터썬>,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타셈 싱의 <더 폴>을 꼽습니다.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 많아 나중에 이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제 곁에 가장 오래 체류하며 수없이 돌려본 영화들이기 때문입니다. 눈물 없는 저를 울린 <애프터썬>, 깊은 적막감에 멍해졌던 <토리노의 말> 등 이 네 편은 모두 제 인생에 크게 빚을 진 소중한 작품들입니다.
Q9: 그렇다면 이 4개의 작품 중 영공 부원분들께 '이 영화만큼은 꼭 보아라!'라고 추천하고 싶은 한 편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준호님: 네 편 중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워낙 촬영이 뛰어나 자막과 소리를 끄고 화면만 따라가도 이야기가 온전히 전달될 정도입니다. 특히 저희 같은 대학생들이 직접 영화를 찍을 때 카메라의 위치, 인물의 구도, 미장센 등을 어떻게 연출해야 하는지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주는 작품이니 꼭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준서님: 다가올 겨울을 맞아 <이터널 선샤인>을 추천합니다. 이 영화는 사랑에서 우리가 가장 어려워하는 지점을 솔직하게 다룹니다. 언젠가 다가올 이별과 상처를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것의 가치를 일깨우며, 슬픔마저 사랑의 일부임을 보여줍니다. 미성숙한 우리가 서로를 품어가는 과정을 담은 주인공의 어린 시절 회귀 장면을 가장 좋아합니다. 혼자도 좋지만, 오래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보며 이야기 나누기를 권합니다.
Q10: 마지막으로 뉴스레터 '영사기'를 통해 이 인터뷰를 읽게 될 분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준호님: 안녕하세요, 학생 감독 조준호입니다. 영화 제작을 망설인다면 거창하지도 않더라도 직접 영화를 만들어 본인의 가치관을 마음껏 펼쳐보시길 바랍니다. 또한, 관객분들께는 밝은 영화뿐만 아니라, 어둡고 불편한 작품도 거부감 없이 접해보시길 권합니다. 그런 영화만이 주는 고유한 미덕과 배움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저희 '누구의 영화'에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소중한 인터뷰 기회를 주신 동아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준서님: 우선 뜻 깊은 인터뷰에 참여할 기회를 만들어주신 '서강영화공동체'분들께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누구의 영화'는 영화의 도시 부산의 대학교 소속으로서 앞으로도 새로운 시도들과 질적으로 상승하는 작품을 통해 더욱 성장하는 모습들을 보여드릴테니까요, 쭉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직 저희 동아리의 비전에 도달하기까지는 한참 남았습니다.

뉴스레터에 담지 못한 인터뷰 전문은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인터뷰어 Interviewer | 이상현
인터뷰이 Interviewee | 조준호 박준서
사진 | 박현영
✖️ 곱하다
'곱하다' 섹션에서는 장근우 부원이 우울하고 공허했던 시기에 자신을 위로해 준 '영화'라는 새로운 친구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영화를 통해 타인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마음속에 '이해'를 심게 된 본인의 경험담을 통해, 여러분에게 과연 영화는 어떤 의미인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아요.
영공 부원1이 물어보는 "당신에게 영화는 무엇인가요?"

영화 얘기 전에 제 잡설 조금만 들어주세요!! 다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선선한 가을날 땅에 떨어져 있는 낙엽들을 바스락바스락 밟으며 계절을 느끼고 계시나요? 운명의 상대를 만나 사랑을 하고 계시나요? 개강한 지 두 달이 지난 현 시점 학기 초의 설렘은 그대로인가요? 중간고사는 잘 이겨냈나요? 아니면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진 않으셨나요?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다들 자기 자신이 비련의 주인공 같을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지금부터 제 자랑을 조금만 할게요.
때는 제가 비련의 주인공같이 느껴지던 늦봄, 울적하기도, 공허하기도 했던 저는 저를 치유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고 때마침 너무나 좋은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이 친구는 어찌나 말도 잘하고 제 곁을 잘 지켜주는지 금세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친구에게 빠지게 된 것은 이 친구가 들려주는 이야기들 때문이었어요. 제가 우울해하고 있을 때면 너무 공감되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제 아픔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기도 하고,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웃긴 이야기를 들려주어 우울이며 슬픔이며 생각도 안 날 정도로 웃겨 주기도 합니다. 또 이 친구와 얘기할 때면 꼭 이 세상에 있는 것 같지 않고, 들려주는 이야기의 세상에 쏙 들어간 느낌까지도 나더군요. 어찌나 친해졌는지 지난 9월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답니다!

눈치채셨나요 여러분? 맞아요, 제 새로운 친구는 '영화'입니다. 저한테 영화는 말 잘하고 평생 갈 것 같은 친구입니다. 영화는 제게 처음에는 현실 도피처로 다가왔습니다. 그 손을 잡고 영화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여기저기 따라가다 보니 영화를 꽤 사랑하게 되었지요. 저는 이제 영화로 나의 감정을 넘어 타인의 이야기를, 감정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습니다. 나밖에 모르던 제 마음속에 어느 순간 '이해'라는 녀석을 쏙 심어준 것이지요. 그렇다고 모든 영화를 보며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순 없더라고요. 그저 힘이 닿는 데까지 그 순간 온몸을 영화 속 세상에 던져 보는 중입니다. 저는 영화와 함께하는 지금의 제가 참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께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떨 때 영화를 보시나요? 영화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당신에게 영화는 무엇인가요?

글 | 장근우
➗ 나누다
'나누다' 섹션에서는 우선 영화 <버닝>에 대한 두 분의 글을 볼 수 있습니다. 이우성 에디터가 무한한 세상 속에서 유한한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과, 삶의 고유한 존재론적 의미를 찾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 분석해 봅니다. 유진서 부원은 미스터리한 실체와 인물들의 흔들리는 불안을 따라가며, 영화가 끝난 뒤에도 가라앉지 않는 묵직한 여운과 질문들을 마주하게 합니다. 그리고 강시형 에디터의 <봉오동 전투> 비평을 통해 이 영화를 '퓨전 사극'이자 '슈퍼히어로' 장르로서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강시형 에디터가 짚어본 '반일민족주의'와 민족주의 담론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까지 들어보아요.

<버닝(2018)>
감독 : 이창동
미스터리 · 한국 · 2시간 28분
존재와 무

‘세상’의 범위는 무한하다. 지구, 우리은하, 어쩌면 관측 가능한 우주 너머까지를 모두 포괄한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생명의 출현보다 까마득히 앞서 존재했고, 언젠가 다가올 인류의 멸종 이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무한(無限).
범위를 좁혀보자. 인세(人世)는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까. 단 한 순간 존재하는 현재의 세상을, 그 순간을 살아가는 하나의 인간을 미래의 이들은 결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또한 언젠가 잊혀진다.
유한(有限).
존재와 무, 눈에 보이는 것과 아닌 것, 현실과 비현실.
노을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간다. 마치 태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무(無)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내게는 때로 소리 소문 없이 내 존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지우고픈 순간이 찾아온다. 세상 앞에서 인간은 그저 한 톨의 먼지, 순간의 파편, 힘없는 개인일 뿐이다. 모든 것이 수수께끼처럼 느껴진다. 알 수 없는 요지경 속, 개인은 두 갈래의 선택지 사이에서 번민한다. 필연적으로 회귀할 ‘무’로 지금 당장 되돌아가는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존재했던 유(有)의 시간을 필사적으로 연장해 나가는 길.
현재 우리 사회에는 ‘위대한 개츠비’들이 수두룩하다. SNS의 시대가 시작되며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듯하다. 이 시대의 개인은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끝없는 절망에 빠져든다. 그렇게 그들은 첫 번째 길로 떠밀린다. 순간의 행복도 후에 찾아올 삶의 부조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을 채워주진 못한다. 그들은 그저 ‘벤’이 오기를 기다린다.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모조리, 그것도 순식간에 태워버리는 벤을 말이다.
이러한 불가항력적 무력감과 절망 속에서, 혹자는 자신의 단전에서 미칠 듯이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느낀다. 뜨거운 무언가, 가만있으면 나의 육신을 태워버릴 것만 같은 무언가, 나를 끊임없이 달리게 만드는 무언가.
‘분노’
그들은 달린다. 자신만의 유(有)를 남기고자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다. 무력한 우리의 절망을 초극할 수 있는 최후의 몸부림을 행위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잊은 채 오로지 그 하나를 단순히 열망하는 판토마임처럼, 물리적 허기를 넘어 근본적인 ‘삶의 의미’에 굶주리는 그레이트 헝거처럼. 이 모든 결단 끝에 그들은 마침내 인간으로서 가진 유한의 틀을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론적 의미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에디터 | 이우성
당신의 헛간을 태운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중·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이다. 상상으로만 하던 하루키의 세계를 어우러지는 음악과 색감이 눈앞에 펼쳐준다는 점에서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매력적이다. 특히, 해미가 술에 취해 춤추는 장면에 삽입된 마일스 데이비스의 재즈 곡은 해미의 흔들리는 일상과 불안한 자유를 언어 대신 한층 더 깊게 전달한다. 이 외에도 수많은 디테일이 바뀐 영화 <버닝>은 당신에게 영화가 끝나고도 이어지는 여운과 고민거리들을 남긴다. <당신의 헛간을 태운다>는 영화 <버닝>을 원작 소설 <헛간을 태우다>와 비교하며 감상을 시도하고, '벤'이 태운 비닐하우스의 실재와 그 의미를 고민하는 기고문이다.
<헛간을 태우다>에서 ‘벤’은 두 달에 한 번씩 헛간을 태운다. 말하자면 범법 행위이나, 경찰에게는 잡히지 않는다. 영화 <버닝>에서는 ‘비닐하우스’로 표현된다.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후 유유히 멀어져 사그라지는 헛간을 숨어 바라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헛간이 ‘자신을 태워주길 바라는 듯‘ 하다고 말한다. <버닝>에서 종수는 벤과 해미가 사라진 후 비닐하우스가 태워지는 것을 보기 위해 하루를 기록하고 지도를 완성하지만, 결코 비닐하우스가 타는 것을 목격할 수 없다. ‘종수’는 끝내 ‘벤’을 이해할 수 없고, 증폭되는 괴리와 불안함은 종수를 어떠한 충동으로 이끈다. 원작과는 다르게 30대의 늙은 남자인 화자가 20대 청년 ‘종수’로 바뀌었다. 이는 ‘벤’에게 더욱 노련하고 성숙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일반적이라면 흘려듣고 넘길 비닐하우스에 관한 주장에 묘한 신뢰감을 주고, ‘종수’를 대하는 것이 진심인지 그저 장난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어 캐릭터에 신비로움을 더한다.
[그] 저는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아시겠어요? 그곳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비와 같은 거죠. 비가 온다. 강이 넘친다. 무언가가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합니까? 보세요. 저는 절대 비도덕적인 것을 지향하는 게 아닙니다. 전 저 나름대로 도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도덕은 인간 존재에 무척 중요한 힘이죠. 도덕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 도덕이라는 것은 동시 존재의 균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벤은 헛간이 마치 자신을 태워 주기를 기다리는 듯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헛간이 정말로 태워지기를 원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헛간의 욕망이 아니라 벤이 부여한 의미일 뿐이다. 무언가를 파괴하고 소멸시킴으로써 충족되는 욕구가 있다면 벤은 그것을 실현할 용기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영화 속 비닐하우스는 실재하는 것일까. 비닐하우스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것의 부재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확인할 수 없기에 비닐하우스는 종수의 의심 속에서 더욱 거대한 의미를 획득한다. 어쩌면 종수는 비닐하우스 자체보다 자신이 믿는 세계가 틀리지 않았음을 바랐을 것이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해미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는다. 벤과 종수의 결말조차 알 수 없다. 크레딧이 올라간 후 관객에게 남은 것은 의문뿐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할 때 답답한 감정을 경험한다. 그 감정은 혼동과 충동의 매개체다. 모순적이게도 내가 알고자 하는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촉매가 된다. 그러나 종수가 끝내 바랐던 해미의 마음과 존재함은 여전히 모호하다. 종수가 태운 것은 ‘벤’일까, ‘비닐하우스’일까.
글 | 유진서
<봉오동 전투>와 민족주의

<봉오동 전투(2019)>
감독 : 원신연
시대극/액션/드라마/역사 · 한국 · 2시간 15분
"누군가의 테러리스트는 다른 이에겐 자유 투사다.
(One man's terrorist is another man's freedom fighter.)"
—『Harry’s Game』, 제럴드 시모어(Gerald Seymour)
<봉오동 전투> 비평
<봉오동 전투>는 역사 고증과 관련하여 여러 지적을 받았다. 그중 영화의 근간과 관련된 지적 사항이 바로 봉오동 전투의 ‘전과(戰果)’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독립신문』 88호에 적힌 일본군 피해 규모에 대한 서술 등을 보여주며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음을 밝혔다. 그러나 일차 사료로 인정받는 당시 일본군의 공식 보고서인 『봉오동부근전투상보(鳳梧洞附近戰鬪詳報)』에는 일본군의 피해 규모가 전사자 1명, 부상자 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18] 이후 나온 해당 보고서 및 당시 전투에 대한 연구 등을 종합해 보면 당시 일본군 보고서에는 명백한 오류가 존재하고 의도적으로 피해 규모를 축소했을 가능성 등이 제기되었다.[19] 따라서 실제 피해 규모는 『봉오동부근전투상보』와 『독립신문』 88호 사이일 가능성이 높다.[20] 물론 이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감독이 인터뷰에서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독립신문에 정확히 기록된 게 봉오동 전투의 승리, 전 후의 과정이 남아 있다. 독립신문 88호 기록을 근거해 만들었다”고 발언한 내용은 사실과 어긋난다.[21] [22]단순히 전투 결과 이외에 전개 과정과 독립군 활약상 또한 대체로 역사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23] 이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봉오동 전투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감독이 봉오동에서 벌어진 가상 전투를 영상화한 것에 가깝다.
그러므로 <봉오동 전투>는 ‘퓨전 사극’에 속한다. 그리고 후술할 이유로 이 영화를 상징하는 장르는 ‘슈퍼히어로’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만 이러한 장르 분류와 무관하게 영화 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고증’과 ‘핍진성’의 역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고증은 영화 속 묘사가 역사 기록과 일치하는지를 파악하는 분석 기준이고, 핍진성은 극의 내용이 관객에게 얼마나 자연스럽게 수용되는지를 나타내는 성질이다. 영화 후반부 전투 장면에는 이장하(류준열分)가 일본군 추격대를 향해 땅에 숨겨뒀던 기관총을 꺼내 쏘는 장면과 전투 중간중간 일본군이 독립군을 향해 산포를 쏘는 장면이 있다. 어느 기록에도 봉오동 전투 때 독립군이 기관총을 사용했다거나, 일본군이 포병부대를 운용했다고 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해당 장면들은 역사 기록과의 불일치, 즉 고증 오류가 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배경 지식이 많지 않은 관객에게는 해당 무기의 활용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핍진성이 낮아진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리고 둘 모두 정당한 가치 평가 기준이 되지 못한다. 고증 오류는 재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괴리이므로 그 존재를 평가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극영화가 지닌 본질적 성질을 부정하는 것과 같고, 핍진성은 관객의 주관적 개연성에 의존하여 반증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감독의 고증에 대한 언급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감독이 영화의 고증에 대해 설명한 내용 중에는 실제 기록과 어긋난 부분이 다수 존재한다. 영화에 대한 가치 판단 과정에서 이 불일치가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영화 외적으로 제기된 주장은 그 자체로 진위 판별의 대상이 된다. 더 나아가 그러한 발언이 관객의 영화 감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역사 영화’라는 장르에 대해서 그 묘사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기를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고증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인상을 통해 그 기대를 충족시켜 감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 효과를 지니기 때문이다. 한 인터뷰에서 “극중 인물의 옷차림부터 머리 스타일까지 조심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고 밝힌 부분이 대표적인 예시다.[24] 실제로는 의복과 두발 상태에 대해서도 고증에 대한 지적을 받았지만, 이러한 사실과 별개로 그 발언은 관객이 영화 속 묘사를 실제 역사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외부 정보로 기능할 수 있다. 특히 관련 역사 지식이 충분치 않고 별도로 사실관계를 검증하지 않는 관객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감독이 반복적으로 고증을 강조한 것은 관객이 영화 속 재현을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자연스럽게 수용하도록 만드는 홍보 전략으로 기능한다.
앞서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봉오동 전투>의 장르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 영화를 상징하는 장르를 ‘슈퍼히어로’로 분류한 이유는 초인적인 영웅의 활약과 명확한 선악 구도, 극적인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극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주인공인 황해철(유해진分)과 이장하(류준열分)의 신체 능력과 활약상은 일반적인 인간의 수준을 넘어선다. 혼자서 대검을 들고 적을 도륙하는 황해철의 모습이나, 수많은 피격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목표를 완수하는 이장하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들과 대립하는 일본군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의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악당의 역할을 수행한다. 여러 차례 위기와 해결을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전투 장면을 역동적으로 배치하며, 중간중간 희극적인 장면을 삽입해 분위기를 조절한다. 또한 기존의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자주 사용되는 극적인 구원과 승리의 연출도 나타난다. 가령 극의 후반부에 독립군 연합이 등장하며 주인공 일행을 위기에서 구하고 승리하는 장면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대표격인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도 나타나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연출 방식이다. 일본군 장교와 황해철의 일대일 대결이 반복되는 것 역시 개인화된 영웅과 악당의 대결 구조를 강조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하면 <봉오동 전투>의 장르는 ‘슈퍼히어로’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현대에 다시 만든 『박씨전(朴氏傳)』과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박씨전』은 조선시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영웅 서사 소설로, 병조참판 이시백의 부인 박소저가 주인공이며, 초현실적인 도술을 통해 청나라를 물리치는 내용이다. 청나라에 침략당한 울분에 대한 반발로 만들어진, 역사적 패배를 허구적 승리로 재창조한 작품이다. 이야기 구도부터 감상자로 하여금 승리감을 느끼게 하는 기능까지 <봉오동 전투>와 닮은 점이 많다. 영화 역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초인적인 영웅들이 일본군을 압도하는 과정을 묘사하며, 감상자에 따라 시각적 즐거움이나 승리감, 나아가 ‘민족적’ 자부심과 고양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반대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적대 대상을 설정하는 방식에 거부감을 느끼는 관객도 존재한다. 이러한 반응은 관객의 상태와 가치관에 따라 형성되는 감상의 영역이지만, 감상이 갈리는 원인이 되는 ‘민족주의’라는 관념 자체는 별도로 논증할 수 있는 대상이다. ‘민족주의’ 혹은 ‘반일민족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다음 장에서는 <봉오동 전투>에 대한 분석이 아닌, ‘반일민족주의’에 대한 논쟁을 그 역사와 해결 가능성을 중심으로 고찰했다.
'<봉오동 전투>와 민족주의'의 전체 원본은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에디터 | 강시형
🍿 감상회 돌아보기
지난 5회차 감상회와 6회차 감상회를 돌아보아요. 10월에는 아쉽게도 두 회차밖에 열리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6회차 감상회에는 무려 커스튼홀에서 열려 보다 쾌적하고 좋은 환경에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어요!
11월에는 많은 회차의 감상회가 준비되어 있으니 감상회를 아직 가본 적 없으신 분들은 꼭 가 보세요! 감상단장의 뛰어난 안목을 통해 선정된 좋은 영화들이 준비되어 있답니다!
🎞️ <5회차 감상회 : 무트>
목요듣기회 ② : 타울 카츠를 들어보자!
2026년 10월 1일 (목)

<무트(2023)>
감독 : 부크 룽굴로브 클로츠
음악 : 타울 카츠 · 제임스 윌리엄 블레이즈
드라마 · 미국 · 1시간 24분
안녕하세요. 꽤 오랜만에 목요 감상회가 돌아왔습니다. 두 번째 감상회에서 함께 감상한 영화는 룽굴로브-클로츠 감독의 2023년 작 <무트>로, 지난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를 통해 한국의 관객을 만나기도 했던 작품인데요. 길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페냐'라는 인물의 하루를 끈질기게 따라다닙니다. 비록 국내에는 <뉴욕의 외톨이 페냐>라는 제목으로 수입되었지만, 원제의 '무트(mutt)'가 잡종(개)를 뜻하는 속어임을 고려했을 때 제목에서부터 '페냐'의 뒤섞인 정체성과 개성이 곧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것이 금세 드러나는데요. 그러나 관객에겐 그가 라틴계 가족에서 어머니와 불화를 겪고 있으며 최근에 호르몬 요법을 시작한 트랜스 남성이라는 것 외에 구체적인 정보나 배경은 모호하게 주어지며, 각본 속에서 벌어지는 24시간 내의 사건들도 사소한 해프닝에 그치(는 것처럼 보이)거나 이미 과거 시점에 지나간 일이기에 하루만을 관찰하는 우리에게는 추측의 영역으로 남습니다. 즉, 페냐를 지켜보는 우리는 그저 그가 주변 인물들과 주고받는 상호작용, 반응과 감정의 변화가 만들어 내는 흐름에 눈과 귀를 맡기면 됩니다.
한편, 얼마 전 DMZ다큐멘터리영화제를 찾아 메리엄 베나니(Meriem Bennani)와 오라이언 바키(Orian Barki)의 첫 장편 영화이자,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 안팎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부슈라>를 보고 왔습니다. 근래 영화제에서 발견한 영화를 통틀어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기도 했던 이 작품에 바로 이번 주 감상회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음악가 타울 카츠(Taul Katz)가 사운드 디자이너로 참여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는데요. 젊은 뮤지션인 카츠가 영화음악가로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상영작 <무트>입니다. 다재다능한 작곡가이자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로서 여러 장편 영화의 스코어링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타울 카츠의 필모그래피는 특히 다큐멘터리 영역에서 두드러지는데요. 국내에서도 상영된 바 있는 <바바라 포에버(2025)>를 비롯해 <Just Kids(2025)>, <Death Without Mercy(2024)> 등 여러 다큐멘터리 스코어링 작업에 참여하며 전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카츠는 영화음악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으며 왕성한 작업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동료 뮤지션 제이라(Zsela), 다니엘 에이지드(Daniel Aged)와 함께 트리오를 이루어 첫 앨범을 발매했으며, 장르를 가리지 않는 '팔방미-연주자'로서 킴 고든(Kim Gordon)의 투어와 함께한 켈시 루(Kelsey Lu)의 무대에서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타울 카츠는 디올, 발렌티노, 캘빈 클라인 등 유명 브랜드들의 캠페인에 음악과 사운드 디자인으로 참여해 오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최근 저의 마음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던, 뉴욕의 패션 브랜드 SC103의 SS26 런웨이 쇼에서 선보인 라이브 무대 역시 빼놓을 수 없겠고요.
최근 <Just Kids>에 이어 <바바라 포에버>의 사운드트랙이 정식 음원으로 발매된 데 반해 아쉽게도 <무트>를 비롯해 대부분의 작업물들의 경우, 일부가 카츠의 사운드클라우드 계정에 업로드된 것 외에 따로 발매된 바가 없습니다. 비록 <무트>에서 타울 카츠가 동료 작곡가 제임스 윌리엄 블레이즈(James William Blades)가 함께 작업한 오리지널 스코어는 매우 절제된 채 쓰이고 있습니다만 그의 창작 세계를 들여다 '들을' 시작점으로는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축제가끝난 뒤의 고요함 속, 10월의 첫 영화를 <무트> 그리고 목요 감상회와 함께 했습니다.감상단장 박민제
우수 한 줄 감상
이상현 자신이 떠난 자리는 자기가 치워야 하고, 자신이 나아갈 자리는 자기가 가꿔야 한다.
하준원 결국엔 따뜻한 위로만이
이상휘 내용과 형식 양자가 모두 참신하지만 어우러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 어수선함을 끌어 정리해 주는 주연 배우의 연기 중력
🎞️ <6회차 감상회 : 졸라>
목요듣기회 ③ : 미카 레비를 들어보자!
2026년 10월 8일 (목)

<졸라(2020)>
감독 : 자니크자 브라보
음악 : 미카 레비
드라마 · 미국 · 1시간 30분
안녕하세요. 연휴가 끝나고 중간고사 전 마지막 정기 감상회가 끝났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학기까지 영공 감상회에 참여하면서 일반 강의실 환경에서 온전히 보이고 들리는 것에 집중하기 어려워 정성 어린 선정과 기획을 온전히 전달받기 어렵다는 아쉬움을 느끼곤 했는데요. 이를 개선하고자 개강총회에서 뻔뻔스럽게 상영 공간을 업그레이드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여름 방학 동안 수많은 부서와 담당자들에게 읍소한 끝에, 그 결실의 시작이 드디어 감상회를 찾아왔습니다. 바로 영상 상영 용도의 가브리엘관 GA109호 커스튼홀에서 84기의 여섯 번째 정기 감상회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학기 감상회에서 가장 먼저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었던 (영화)음악가 미카 레비의 작품을 6회차로 미루게 된 연유이기도 하고요.
미카 레비로 말할 것 같으면 21세기 여러 음악 씬의 판도를 바꾼 최고의 뮤지션 중 하나이자 가장 혁신적인 사운드를 영화 스크린 안으로 들여 오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특히 레비를 동시대 영화음악계의 최대 기대주로 만든 작품으로는 조나단 글레이저의 <언더 더 스킨>과 파블로 라라인의 <재키>를 뽑을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는 글레이저와 다시 함께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통해 칸 영화제에서 사운드트랙 부문 수상을 이뤄내는 쾌거를 이뤘고요. 클래시컬한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으면서 밴드 활동과 실험음악, 그리고 팝에 이르는 미카 레비의 폭넓은 사운드 팔레트는 비로소 영화음악 스코어링에서 가장 빛나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미카 레비가 음악을 맡은 여러 장·단편 영화 중에서도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20202년 작 <졸라>를 이번 상영작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로는 한 뮤지션의 레터박스 코멘트가 있었습니다. 바로 영화의 한 장면에서 배경에 있는 보조 출연자들이 농구공을 튕기는 사운드를 음악적으로 스코어와 영화 안에 녹여냈다는 점을 짚고 있었습니다. 곧바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음악의 미덕이란 무엇일까요? 스코어는 왜 필요한 걸까요? 아마 가장 근본에는 어떻게 디제시스 내부와 외부를 잇고, 결국에는 각기 다른 시공간을 넘어 극장이라는 공간에까지 침투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을 겁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21세기 들어 가장 도발적이고도 의미 있는 시도를 이어오고 있는 창작자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서 <졸라>를 커스튼홀 감상회의 상영작으로 선정하게 된 것입니다.
아주 어린 시절 바이올린과 비올라 등의 악기로 음악 경력을 시작한 미카 레비는 유년기를 음악 학교에서 보내며 영재 클래식 음악가로서 정석적인 길을 걸었고, 만 20세의 나이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부터 위촉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레비는 친구들과 ‘Micachu and the Shapes’를 결성하게 되었고 밴드 활동을 통해 ‘미카츄’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인디 씬에 알리게 되었습니다(최근까지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며 ‘Good Sad Happy Bad’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후 그는 <언더 더 스킨>을 계기로 이후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연출한 대부분의 영화에서 음악을 맡으며 여러 감독에게 러브콜을 받는 영화음악가로 자리잡았고 파블로 라라인, 마이클 알메레이다, 알레한드로 란데스 등과 작업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전설적인 사진작가 낸 골딘과 협업하고 첫 솔로 앨범 [Ruff Dog]을 발매하는 등 솔로 뮤지션으로서도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동시에 오랜 협업자이자 친구인 Tirzah의 앨범 세 장을 연달아 프로듀싱하며 엄청난 비평적 찬사를 받았고 영국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Arca, Mount Kimbie, Björk 등 동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들의 크레딧에서도 미카 레비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상영작인 <졸라> 외에도 <모노스>, 그리고 필 콜린스의 짧은 애니메이션인 <딜리트 비치> 등 소개하고 싶은 미카 레비의 참여작이 많이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졸라>는 정말 개성이 강하고 독특한 작품입니다. 다름 아닌 실존 인물 ‘졸라’의 유명 트위터 타래를 영화화한 이 영화는 두 스트리퍼가 겪는 며칠 간의 우여곡절과 스릴 넘치는 사건들의 여정을 따라갑니다. 자극적인 배경과 설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미국에서의 인종과 젠더의 문제, 그리고 노동과 폭력이라는 쉽사리 잡히지 않는 개념까지 뛰어난 연기와 연출로 우리의 눈과 귀 앞에 제시됩니다. 시각중심주의가 철저히 점거한 근현대 매체(사) 한가운데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볼래”라고 묻는 이 영화야말로 진정 제가 “저와 함께 들어보지 않으시겠냐”라고 묻고 싶은 작품입니다.감상단장 박민제
우수 한 줄 감상
홍준영 졸라 졸라 재밌네요
이천희 졸라 재밌다
백지우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는 그런 때가 있지...
★☆ 영공2️⃣1️⃣
'영공21'에서는 최신 개봉작에 대한 영공 부원들의 평가를 나누어 봅니다. 10월에는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을 관람한 부원들의 별점과 한 줄 평을 받아 보았습니다.
🌕<가능한 사랑>📹

이창동 | 전도연, 설경구, 조인성, 조여정 | 9월 23일
| 이름 | 별점 (5점 만점) | 한줄평 |
|---|---|---|
| 최태빈 | 3.5 | <버닝>에서 종수가 벤을 바라봤다면, 이번엔 벤이 종수를 바라본다. |
| 고다르하위호환 | 4.5 |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듯한 시선으로 사랑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저 오만. |
| 똥 | 4.0 | '예지'라는 캐릭터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1.0점 더 줌 |
평균 별점: 4.0
★ ★ ★ ★
- 여기서 소개된 글은 2026년 서강영화공동체 문집으로 발간됩니다.
- 11월 기고는 11월 1일 공지 예정입니다.
- 기고 방법은 영공 카톡 공지방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84기 영공 캘린더 11월 주요 일정
🤝 10월 30일 (금) : 연세대 프로메테우스 연합 감상회
🎥 11월 1일 (일) : 제작단 워크샵
🍿 11월 2일 (월) : 11월 첫 번째 월요보기회 (84기 네 번째 월요보기회)
🍿 11월 5일 (목) : 11월 첫 번째 목요듣기회 (84기 네 번째 목요듣기회)
🌙 11월 6일 (금) : 무비올나잇
🎥 11월 6일 (금) ~ 11월 9일 (월) : 서강청년영화제
🎥 11월 27일 (금) : 작은영화제
FEELM NO.23 만든 사람들
편집장 | 이상현
에디터 | 강시형 권준형 김가은 박민제 박상준 박선화 손예진 윤준영 이우성
사진 제공 | 윤채린 조유나 신채윤 임다현 조해담 이정빈
영사기 게스트 | 조준호 박준서 박현영
객원 에디터 | 장근우 유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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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1] 주짓수에서 위험하거나 불리한 포지션에서 빠져나와 다시 안전하거나 유리한 자세로 되돌리는 방어 및 회복 동작을 뜻한다.
- [2] 영화의 영어 제목은 Midday Meal이고, 2026년 10월 15일 영화제 폐막식에서 경쟁 부문 최고상인 부산 어워드 대상을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 참조.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610165952i
- [3] 보건복지부, 「2025년 아동학대 연차보고서」(2026년 9월 3일 공개). 2025년 아동학대 판단 건수는 23,648건이며, 그중 학대행위자가 부모인 경우가 20,172건(85.3%)이었다. 보도자료 내용은 아래 참조. https://eiec.kdi.re.kr/policy/materialView.do?num=286267
- [4] 보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조. https://www.jprime.jp/articles/-/12028
- [5] Hoekzema, E., Barba-Müller, E., Pozzobon, C., et al. (2017), “Pregnancy leads to long-lasting changes in human brain structure”, Nature Neuroscience, 20(2), pp. 287–296.
- [6] 관련된 연구의 예로는 아래 논문 참조. Abraham, E., Hendler, T., Shapira-Lichter, I., et al. (2014), “Father’s brain is sensitive to childcare experiences”, PNAS, 111(27), pp. 9792–9797.
- [7] Laslett, P. (1981), L’Amour en plus 서평, London Review of Books, 3(14).
- [8] Korelitz, K. E., & Garber, J. (2016), “Congruence of Parents’ and Children’s Perceptions of Parenting: A Meta-Analysis”, Journal of Youth and Adolescence, 45(10), pp. 1973–1995.
- [9] Brummelman, E., Thomaes, S., Slagt, M., Overbeek, G., Orobio de Castro, B., & Bushman, B. J. (2013), “My child redeems my broken dreams: On parents transferring their unfulfilled ambitions onto their child”, PLoS ONE, 8(6), e65360.
- [10] Kanner, L. (1949), “Problems of Nosology and Psychodynamics of Early Infantile Autism”, American Journal of Orthopsychiatry, 19, pp. 416–426.
- [11] Donath, O. (2015), “Regretting Motherhood: A Sociopolitical Analysis”, Signs: Journal of Women in Culture and Society, 40(2), pp. 343–367.
- [12] AFP(2016. 6. 27.) 기사에 따르면 논쟁은 신문 칼럼과 TV 토크쇼, 해시태그 #RegrettingMotherhood를 통해 이어졌고, 언론은 덜 희생적인 모성상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자기 성취에 몰두한 젊은 여성들의 ‘투정’을 비꼬는 목소리 사이를 크게 오갔다. 도나스는 이스라엘에서는 일주일 만에 정리된 논쟁이 독일에서는 몇 달째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 [13] Agnew, M. (2024. 7. 20.), “Meet the queen of the ‘trad wives’ (and her eight children)”, The Times.
- [14] SNS의 반응은 아래 기사 참조. Deseret News (2024. 8. 1.). https://www.deseret.com/utah/2024/08/01/who-is-ballerina-farm-hannah-neelman/
- [15] 닐먼의 반박과 “삶의 시기마다 다른 꿈이 있었다”는 글은 아래 기사 참조. https://graziadaily.co.uk/life/in-the-news/ballerina-farm-response-times-article/
- [16] Hirshman, L. R. (2005), “Homeward Bound”, The American Prospect, 2005년 12월호.
- [17] Plant, J. (2006. 9. 8.), “Anti-Unpaid-Work Polemicist Riles Full-Time Moms”, Women’s eNews.
- [18] 해당 보고서를 작성한 인물은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군 소좌 야스카와 지로(키타무라 카즈키分)다. 영화상에서 황해철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패한 뒤 죽은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런 결투가 있지도 않았고, 살아남아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 원본 이미지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참조. https://search.i815.or.kr/sojang/read.do?isTotalSearch=Y&book=&adminId=3-002622-000#explain
- [19] 이상훈(2020), 「「봉오동부근전투상보」를 통해 본 봉오동전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2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pp. 7–53.
- [20] 당시 연길보위단 제1대 대장 서육린은 상부에 일본군 병사 49명과 장교 3명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논문 참조. 박창욱(2000),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연구: 경신년반토벌전을 재론함」, 『한국사연구』, 제111호, 한국사연구회, pp. 95–136.
- [21] 영화 개봉 훨씬 이전 시점에도 봉오동 전투와 관련된 사학 연구 자료는 존재했다. 그리고 기존 연구에 따르면 『독립신문』의 기록은 심하게 과장되었고, 진실성을 인정할 만한 다른 사료들도 존재했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논문 참조.
- [22] 같은 인터뷰에서 감독은 또한 “역사적 사실 근거로 하는 영화를 만들 때 보통 영화를 기획하고 시나리오 써서 그냥 만들 때보다 훨씬 많은 공과 많은 시간 신경을 써서 자료를 수집해야 하고, 그런 자료들이 체화됐을 때 비로소 영화로 내놓을 수 있다”, “봉오동 전투는 자료 수집, 고증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다양한 난관에 봉착했다. 남아있는 사료가 거의 없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노력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아래 기사 참조. https://m.entertain.naver.com/home/article/421/0004119893
- [23] 역사적 사실과 다른 영화 속 묘사의 차이를 일일이 짚어내기 어렵지만, 대표적인 사례 한 가지만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군 포로였던 유키오(다이고 코타로分)와 춘희(이재인分) 등을 구출하기 위해 황해철 일행이 일본군 숙영지를 급습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관련 기록에서 전혀 확인되지 않는 습격이다. 해당 규모의 교전이 실제로 있었다면 일본군의 피해 보고나 독립군 측 전과 기록 등에 흔적이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화에서 창작된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24]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 참조. https://m.entertain.naver.com/home/article/076/000345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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