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의 말

첫 번째, 나무와의 인터뷰

2021.04.28 | 조회 6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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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내가 모르는 나무가 내가 아는 나무의 자세로 서 있었다. 나무가 나무의 자세로 서 있었을 뿐인데, 그날부터 이상할 만큼 자주 눈에 들어왔다. 서울 마포구 주택가 골목에서 마주친 나무는 전봇대보다 높았고, 바로 옆에 있는 주택보다는 조금 낮았다. 벽에 바짝 등을 대고 키를 재어보는 아이처럼 서 있던 나무 뒤로 오래된 주택의 적벽돌이 켜켜이 눈금을 그리며 나무의 기둥과 비슷한 갈색을 맞춰가고 있었다.

첫 번째, 나무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안녕하세요. 점심이면 늘 오가던 길이었는데 만나뵙고 싶어서 퇴근 후에 한달음에 달려왔어요.

아, 정말요?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는데 날이 흐려서 어떻게 해요. 비 오기 전에 얼른 집에 가세요.

비 맞는 사람 걱정해주는 나무는 처음 봅니다. 

걱정은 되는데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제가 다른 나무 같으면 잠시 제 그늘 밑에서 비를 피하라고 할 텐데 그렇게 할 수가 없거든요. 보시다시피 제가 이런 꼴이라.

꼴이라뇨.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생기셨어요.

그거 좋은 말인가요?

네, 좋은 말이에요. 겨울에도 분명히 여기 계셨을 텐데. 제가 그때 여기 계신 줄 알았다면 근사하다고 말씀 드렸을 것 같아요. 눈이 오면 분명 더 멋진 모습일 것 같거든요.

맞아요. 사시사철 같은 꼴이라 그때가 되면 저도 조금은 변하는 기분도 들어서 겨울이 살짝 기대되는 때도 있어요.

그렇군요. 저도 그맘때가 좋아요. 분명 같은 계절인데 다음 해로 넘어가는 시점이라 그런지 새로워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착각이 들거든요. 

맞아요. 그런 착각 들죠. 

올해는 그런 착각도 없이 시작했어요. 

그러게요. 꽤 길게 가네요. 저희로서도 어쩔 수가 없네요. 좋은 산소로도 극복이 안 되는 것들이 세상엔 참 많죠.

네, 맞아요. 참 많네요. 나무들한테도 그런 것들이 많겠죠?

저희는 우선 직접적인 이동이 안 되죠. 

아, 그건… 저희도 자신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그렇겠죠. 그래도 오래 서 있는 기분은 알아요. 

저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데. 기다림과 비슷한 것일까요.

기다림은 상태고, 기다릴 때의 기분은 나무도 나무마다 다를 거예요. 사람도 그렇지 않나요.

그렇겠네요. 무엇을 기다리는지, 왜 기다리는지, 혹은 대상도 이유도 없는데 기다리고 있다든지…

맞아요. 아까 제가 저 자신을 보고 이런 꼴이라고 했잖아요. 자조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저는 제 기다림의 모양이 좋아요. 제가 놓인 이 자리의 특성상 침엽수인 제가 정말 침엽수처럼 자랄 수밖에 없거든요.

뾰족하게요?

네, 제가 가진 잎의 모양처럼 뾰족하게 저도 자라고 있는 거예요.

자란다, 잘한다, 어쩐지 발음이 같아서 기분 좋아져요. 이런 발견은 제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 것이겠지만.

보편적으로 다른 사람과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게 좋을 때도 있어요. 저는 가끔 여기가 아닌 곳에서 자랐다면 조금 더 울창했을까. 다른 나무라면 어땠을까. 아까 그런 걱정을 하고도 걱정으로 끝내지 않고 그늘이 되어줄 수 있는 나무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울할 때도 있는데요.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할 것 같아요. 요즘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루를 넘겨요.

저도 비슷해요. 같은 종의 생명은 아니지만 저는 나무가 부럽기도 해요. 사람들 중에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거예요. 

뭐가 부러운 거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집착하게 되는 게 쓰임에 관한 건데요. 나무는 정말 아낌없이 주는 편이고 존재한다고 해서 해가 되는 경우도 거의 없는 것 같거든요. 

들어봤어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그런 표현들. 저는 여기 서 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게 없어요. 뭘 주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이미 많은 것들을 주고 계세요. 그러니까 제가 여기까지 왔죠.

앞으로도 저에게 큰 변화는 없을 거예요. 이 동네가 오히려 많이 변하면 모를까.

그래도 아까 기다림의 모양이 마음에 드신다고 하셨으니까. 

네. 제가 말하고도 잊을 뻔했네요. 

사람들이 쓰는 말 중에 '드높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단순히 위로 뻗어나가는 느낌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위까지의 길이가 길어지는 그런 걸 뜻하는 말인데. 온몸으로 그걸 깨우치고 계시다는 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해요.

드높이, 기억하면서 여기 계속 있어볼게요.

네, 저도 겨울에 한 번 더 보러 올게요. 건강 챙기시고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네요.


추신, 만물박사가 만난 첫 번째 인터뷰이는 나무였습니다. 나무 중에서도 침엽수는 인터뷰 내용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크리스마스 트리가 생각나서 좋아합니다. 그리고 결이 곧아서일까요. 사람들이 목조를 할 때 구조재로 많이 사용하는 게 침엽수라고 하네요. 나무를 나무로 보는 게 가장 좋지만, 나무로 만든 가구나 물건에 더 애착이 가는 건 나무만이 취할 수 있는 기다림의 모양 덕분인지도 모르겠어요. 연재를 계속한다면 이번 겨울에 오늘 만난 나무를 한 번 더 찾아가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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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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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끄리

    1
    about 3 years 전

    나무를 인터뷰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기다림의 모양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침엽수님! 건강히 크리스마스 트리 시즌까지 계셔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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