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세포

세 번째, 지붕과의 인터뷰

2021.05.17 | 조회 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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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작년 가을날, 친구들과 올라탄 케이블카에서 바닷가 근처 마을에 놓인 지붕들을 내려다볼 기회가 있었다. 도시에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특별한 소풍날 마음먹고 싸 가야 하는 몇 단짜리 찬합처럼 쌓아진 터라 위층과 위층, 평평한 옥상이 지붕의 자리를 대체할 때가 많은데… 이날 보게 된 지붕들은 어린 시절 자주 보던 우유갑의 윗부분을 닮아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 사진을 찍어 두고 서울에 돌아와 몇 달 뒤에 시를 썼다. 지구의 세포로서 존재하는 다양한 지붕을 떠올리면서 무엇이든 분열하기를 빌었던 몇 달의 밤이 더 지났다.

세 번째, 지붕과의 인터뷰

안녕하세요. 대화 전부터 제가 내려다보고 있어서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

제 입장에서는 정면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계속 이 자세를 유지하겠습니다.

네, 좋아요. 저한테 궁금하신 게 있을까요. 

주로 무엇을 막고 계세요?

아까부터 자꾸 본인 위주로 말씀하고 계신 거 아세요?

네? 아, 죄송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막고 있는 게 아니라 맞는 것일 수도 있고요. 또 흘려 보내는 것일 수도 있어요.

아.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사과만 반복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까 이 또한 흘려 보내는 걸로 해요.

고맙습니다. 그럼 다시 질문 드릴게요. 요즘 자주 맞거나 흘려 보내려고 노력했던 것이 있을까요.

저는 타고나기를 비와 싸우려고 태어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을 테니까.

인간에 의해서요?

그렇죠. 높고 튼튼한 지붕을 갖고 싶어 하는 거 많이 봤어요.

맞아요. 저는 솔직히 집에 지붕 같은 지붕이 없어요.

그럼요?

위층이 늘 지붕 역할을 해줬던 것 같아요. 빗소리보다 위층 사람 발소리를 더 많이 듣고 사는지도 몰라요.

비가 이렇게 자주 오는데도요?

네. 요즘엔 층간 소음으로 인한 다툼도, 범죄도 많이 일어나요. 기후 위기 만큼 중대한 사안은 아니지만 당장에 괴로운 일이긴 하죠.

그럼 이 동네로 와요.

아.

망설이는 걸 보니까 자신이 없구나.

아뇨. 살고는 싶은데. 

그렇게 하다가는 시간만 가요. 남의 발밑에서 사는 것도 내 입장에서는 낭만이겠다 싶지만, 나도 빗소리에 갇히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아니까 괴로울 것 같기도 해요. 남의 발소리에 갇혀 사는 거.

맞아요. 그러고 보니 저는 천장에 더 익숙한 것 같아요.

아, 나에게도 천장이 있어요. 그건 내 마음과도 같아요.

안에서도 많은 일이 일어날 텐데 비까지 맞아야 하고. 

쉽지가 않죠? 우리 지붕이나 인간이나 무너질 이유를 찾으면 끝도 없어요. 그래도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네, 스스로. 긴 이야기를 보태고 싶은데. 지금 또 비가 와요. 왜 이렇게 자주 비가 오는지 모르겠어요. 우산 늘 챙기고 다녀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올 때는 좀 일찍 와요. 시간만큼 중요한 게 마음인데, 마음을 온전히 다 썼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도 결국 시간 뿐인 것 같더라고. 

그때는 별 이야기 들려주시면 안 돼요?

별 대신 인공위성 이야기를 해줄게요. 요즘 이상하게 그 정도 밝기는 보고 있어야 안심이 되더라고요. 나도 지붕인지라 자꾸 밝은 게 눈에 들어오나봐.

형광등 불빛 같을 것 같은데요.

알고보면 제 마음의 불빛이기도 합니다. 인위적이긴 해도 많은 걸 하게 만들잖아요. 집에 있는 시간 길어졌다고 너무 우울해 말고 형광등 아래에서 많은 걸 해요. 그러다 만나요.   


추신, 만물박사가 만난 세 번째 인터뷰이는 지붕이었습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헐려서 조각난 지붕도 보이고 보수 중인 지붕도 보이는데요. 온전한 지붕 아래에서도 어떤 사람이 어떤 자세로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문득 아득해져요. 최근 방송한 tvN <알쓸범잡>에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가 말하길 우리가 아는 DNA의 길이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고 하여 놀랐습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우리도 모르게 남길 수 있는 DNA의 길이감이 실제로 그렇게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역시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우리도 모르게 남길 수 있는 마음에 어떤 사실이 숨겨져 있을까 궁금해져요. 저도 하나의 마음을 밝히고 가려고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셨겠지만, 그동안 발행했던 레터의 제목을 모두 다섯 글자로 맞췄답니다. 이유는 그냥 어릴 때 다섯 글자로 떨어지는 제목의 드라마들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어서. 그냥 그렇게 해봤습니다. 다음부터는 글자 수를 조금 다르게 하여, 제목에도 분열을 일으킬 참입니다. 참 쓸데없죠. 그래도 이게 제가 순간순간을 살아내는 방법입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두 안전하고 건강한 하루 보내세요.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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