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와 허무

네 번째, 막다른 길 인터뷰

2021.06.15 | 조회 1.05K |
3
|

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유월에 온다는 사람이 있었다. 유월이 왔다. 그 사람이 왔다. 가만히 있으면 오는 시간과 달리, 가만히 있으면 오지 않는 기회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제대로 꺼내지 않고 전부터 좋아했던 공간들을 오랜만에 찾아가기 위해서 열심히 걸었다. 작년 이맘때 나는 "너 혼자 앞서가지만 않아도 다 잘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그게 조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생각하니 충고였다. 생각하면 기분이 나빠지는, 지나간 인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서툰 방식으로 좋아했던 것에 사과를 표하고도 싶지만, 반성은 끝이 아니다. 언제나 그다음 행동이 중요하다는 걸 많은 일들이 알려주었다. 그래도 올해는 걷다가도 뒤돌아보고, 걷다가도 뛰어가보고, 걷다가도 멈추어보았다. 그렇게나마 나아졌다고 믿고 싶은 부분이 드물게 있었다.

네 번째, 막다른 길 인터뷰

어서 오세요. 여기는 막다른 길입니다. 저는 저를 여기라고 부르는 걸 좋아해요.

어? 조금 당황스럽긴 한데 저도 그래요. 식당에 가거나 가게를 가면 "여기요" 하고 본론을 말하는 편이에요.

(웃음) 그나저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냥 걷다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좀 정처 없이 걸어다니는 편이신가보다.

네, 뭐 그런 편이죠. 그러고 보니 제가 살았던 곳들도 다 여기와 같은 막다른 길에 위치해 있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낯설지 않아요. 막다른 길이라고 적혀 있는 이런 아스팔트. 

좀 지저분하죠?

아뇨, 거친 사포에 하얀 초를 문댄 것 같고 좋아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막다른 길이라는 어감이랑 대충 질감이 맞아서 좋다, 그런 말이에요.

느낌 엄청 따지시는 분이 어쩌다가 집을 그렇게 얻으신 거죠? 대로변은 시끄럽다고 해도, 여기는 좀 많이 조용하지 않나? 좀 으슥하기도 하고. 

솔직히 예전에는 좀 답답했어요. 밤이면 좀 무섭기도 하고, 근데 뭐 저만 이런 곳에 사는 것도 아닐 텐데. 어디든 다 사람이 살더라고요.

맞아요. 내가 여기 있으면서 여러 사람 겪어봤는데 그쪽 같은 사람이 잘 이해할 것 같더라고.

뭘요?

인생 별거 없다. 뭐 그런 거요.

별거... 있었으면, 있을 거면 많았으면 좋겠는데...

대신 좋은 걸로 있었으면 하는 거잖아요.

맞아요. 왜 당연한 걸 되물어보세요?

예외가 있나 싶어서, 당연한 걸 묻다가도 내가 다시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길은 돌아 나와야만 이어진다. 이 길은 막혀 있어서 그런대로 희망이 있어요.

희망이 있다고요?

네, 단지 이렇다 할 계획이 없어서 이 상태인 거예요. 해외에 나가면 좋은 케이스가 있어요.

막다른 길, 다 거기서 거기인 줄 알았는데. 길도 사람처럼 떠나 봐야 좋은 걸 아나봐요?

(웃음) 아까 제가 말씀 드린 거 잊었어요? 어떤 길은 돌아 나와야만 이어져요. 돌아 나오는 곳이구나 생각하세요. 자신을 생각할 때는 특히 더 그래야만 해요.

더 넓은 곳에는 막다른 길도 좋은 케이스로 놓여 있다는 이야기도 하셨잖아요.

맞아요. 'Cul de sac'이라고 미국이나 덴마크에서는 Loop형으로 주택가의 막다른 길을 설계하기도 해요.

끝에 고리 하나 놓는 거네요.

네, 그거 하나 놓았을 뿐인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주죠.

근데 가끔은 끝없다는 생각이 딱 막힌 기분을 안겨주기도 하잖아요.

맞아요. 그래도 모든 길 끝에서는 계획을 다시 세워야만 해요. 이제와는 다른 방식이어도 좋고, 이제껏 세워보지 않았어도 괜찮아요.

거기서 끝을 낼 생각이라면요?

아무래도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겠죠. 내가 여기 있으면서 많이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정말 집이 필요하겠다. 막다른 길에 있어도 스쿼시 공처럼 튕겨져 나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이 필요하겠다. 

(막다른 길에 놓인 쓰레기를 보다가) 이 길 끝에 돌아서서 왔던 길을 성의 있게 돌아가는 것도.

그것도 방법이에요. 


추신, 만물박사가 만난 네 번째 인터뷰이는 막다른 길이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언덕이 많은 동네에서 몇 년간 막다른 길에 위치한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이번 인터뷰이는 좀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질문만 메아리처럼 돌아오면 어쩌지 싶었는데 그래도 조금은 새로운 말을 듣고 온 것 같아요. 어디에 걸지 못하는 고리라도 끝에는 하나씩 쥐어보는 그런 생활하시길 바라며. 오늘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댓글도, 메일에 대한 답장도 언제나 길을 열어두고 있으니 편히 남겨주세요. 제가 또 오늘 오타를 냈다면 사람이 아니고 사랑입니다. :)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만물박사 김민지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3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 남윤주

    1
    almost 3 years 전

    . 만물박사 김민지님께. 첫 뉴스레터를 받아보았는데 내용에 감사드려 답장을 보냅니다! 취준생인 저는 요즘,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지내는 게 쉽지가 않다는 느낌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데요, 마침 또 오늘은 붕 떠있는 느낌이 더 들어서 집에 오는 길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Cul de Sac 막다른길이 돌아오는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통찰력 쩔어요. 좋은 관찰과 사려 깊은 글은 한 사람을 구원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취준은 막다른길에 매일 서 있는 기분이고 이 걸음이 과연 뒤로 가는지 앞으로 가는지 잘 모르겠고 한 발짝 떼기도 쉽지 않지만, 막다른 것 같아도 원한다면 돌아서 갈 수 있기도 하겠네요. 이 시기에 하나의 큰 진리이자 한 번 더의 희망이 되었어요. 앞으로도 뉴스레터 잘 읽겠습니다 :) 답장 이렇게 보내는 건지 모르겠지만, 사실 뉴스레터에 답을 보내는 로망이 있었어요!!!!!! 그럼 Cul de Sac한 날들 보내겠습니다. 만물박사님~

    ㄴ 답글 (2)

© 2024 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