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과 하양

속속들이 재워둔 어둠이나 빛이 번질 때는

2021.11.23 | 조회 6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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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어제는 실내에 우두커니 앉아서 하얀 눈과 검은 비닐봉지를 봤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가로로 내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첫눈이 쉴 새 없이 내렸다. 몇 분 사이 눈이 뚝 그쳤고 곧바로 땅바닥 어딘가를 부유하던 비닐봉지가 고층의 건물 사이로 두둥실 떠올랐다. 설렘을 느끼기엔 애매한 방향으로 정신없이 내리던 하얀 눈이 뿌연 노이즈처럼 대기를 채웠다. 너무나 가뿐한 모습으로 날아오르다가 이내 나선을 그리며 유유히 낙하하는 검은 비닐봉지를 지켜보는 동안 마음에 부유하던 빛과 어둠도 그와 같은 양상으로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편의점 온장고에서 데자와 캔을 꺼낸 다음날

안녕하세요. 검정입니다.

안녕하세요. 하양입니다.

또 뵙네요.

네, 우리 구면이죠.

그렇네요. 지난 주에도 우리를 걸치고 다니는 한 인간이 세탁기에 한꺼번에 우리를 몰아넣었죠.

그랬었죠. 더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일단은 귀찮은 대로 행동하는 인간들은 참 신기해요.

저도 매번 신기해요. 어쨌든 이번에도 운이 좋게도 우리 둘이 뒤엉켰지만 골치 아프게 섞이진 않았어요.

맞아요. 저로부터 이렇다 할 먼지나 보풀이 떨어지지 않았고, 그쪽에 거뭇거뭇한 물빠짐이 생기지도 않았죠.

찬물 세탁을 해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더운물을 썼다면 저는 진즉 줄어들었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호주머니에 휴지나 종이를 넣는 일은 많이 줄어서 좋아요. 

그래도 여전히 저를 걸치고 나간 날은 튀거나 묻기 좋은 음식을 먹게 된다니까요. 아무리 확인하고 조심해도 그렇게 될 때는 자포자기하게 돼요.

맞아요. 그렇게 해서 이 구역에 검정의 양상이 더 커진 게 아닐까 싶어요. 검정이라고 다 같은 검정은 아니지만, 저를 걸치고 나가서 오히려 더 깨끗하고 단정한 이미지를 풍기게 되는 인간을 생각할 때면 도움이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깨끗하고 단정해야 하는 순간에 인간을 돕고 마는 것 같아요. 그게 우리가 원하는 쓰임은 아닐지라도.

사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부러운 색들이 너무 많아요. 부러울 때 불현듯 주변을 어둡게 만들고 밝게 밝히는 어둠과 빛이 부러울 때도 있지 않나요? 

네, 우리처럼 이미 물성을 띤 검정과 하양들은 갈 길이 너무 분명해져서 더 막막해질 때가 있잖아요.

맞아요. 그래도 가끔 서로 뒤엉켜 세탁기통 속을 뒹굴 때 어지럽지만 재밌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찬물을 맞아도 깨끗해지고 있다는 믿음 속에서 지낼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인간의 게으름에 강요를 당해도 좋을 것 같아요.


검정을 걸치고 하양을 신고 걸어가던 고양이
검정을 걸치고 하양을 신고 걸어가던 고양이

추신, 이제 캐럴을 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한 강추위가 찾아왔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만물박사 김민지. 오늘은 검정과 하양의 스몰토크를 간추려보았습니다. 연말이네요. 어떤 시간을 보내고 계신가요. 깊은 안부를 여쭙고 싶네요. 지난번 말씀 드렸던 책자가 이달 나온다고 합니다. 무료 배포라고 하니 아래 링크를 통해 마음이 가시는 분들은 마음 편히 신청해주셔요.

📮프로젝트 '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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