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하는 인간

추석에 밤을 줍다가 떠올린 것들

2021.09.23 | 조회 5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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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와해된 가정의 일원으로서 보내는 명절은 단출하다. 우리 가족은 모두 세를 산다. 어디 멀리서 온 적도 없는데 한데 지어졌다가 찰기를 잃은 밥알처럼 낱낱이 흩어져 살고 있다. 명절이 되면 어디 따로 또 같이 여행갈 생각도 못하고 엄마 곁으로 간다.

본가란 무엇인가. 그 말이 큰집이나 작은집이라는 말만큼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거점 없이 규모와 단위를 재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이지만 이런 내가 좋아하는 셈도 있다.

무언가 시작할 때 하나, 둘, 셋을 세는 것. 한 판에 이길 확률이 적어 세 판 정도 겨루는 것. (뜸을 들일 수 있는 준비의 시간과 계속되는 기회가 주어지는 삶을 내심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몇 해전부터 추석이 되면 엄마를 따라 나와 바닥에 떨어진 밤을 줍는 게 하나의 낙이 되었다. 인근 저수지까지 걸어가는 길 위에 놓인 밤송이들. 포장 도로까지 굴러간 밤송이들은 신호 없이 쌩쌩 지나가던 차 바퀴에 으깨진다.

잘 익은 밤송이에서 세 개의 알을 발견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며 걷는다. 어쩌다가 한 알이 크게 자리한 밤톨을 보더라도 기이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자리를 고루 나눠 가져도 벌레 먹은 밤톨도 있다. 한껏 살이 오른 밤벌레도 그저 귀엽다. 어쩌다가 운이 좋아 세 개의 밤톨을 한꺼번에 주울 때 엄마가 "오예"를 외치면 나는 그게 좋다.

아빠와 엄마의 나이 차, 나와 동생의 나이 차, 동생과 동생의 나이 차. 그 간격이 모두 세 살 터울씩 벌어져 있다는 걸 발견한 어린 시절부터 3에 대한 집착이 생겼다. 마음이 쏠리고 길조라고 여기는 숫자지만 막상 발음하다 보면 다소 퍽퍽한 삶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퍽퍽한 삶만큼 사이가 벌어져 있구나, 느끼는 날들 속에서 밤송이를 짓이기는 발의 힘을 복기한다.

명절마다 갈음하는 단어들이 있다. 밤이나 밤 같은 단어들. 도통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발음이 같아서 속으로 마음껏 굴리고 무칠 수 있는 단어의 이미지들. 풍성함을 이야기하다보니 외로움마저 풍성해지는 그런 날들에 지나온 명절의 풍경을 그려보면 북적거린다. 전이나 잡채를 만드는 손길처럼 지지고 볶고 하는 게 정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세상에 꼭 그런 정만 있을까. 

내년에는 조금 더 맑은 명절을 보내고 싶다. 슬픔이 고이더라도, 밑바닥을 저어서 흙이 일어나더라도, 기다려서 맑아진 물 위에 돌멩이를 던져서 첨벙 소리를 듣고 싶다. 그런 참을성을 이 계절로부터 배운다.

귀여운 밤톨들
귀여운 밤톨들

추신, 만물박사 김민지. 연휴 끝에 레터를 띄웁니다. 각자 좋아하는 수만큼의 밤톨을 주머니에 넣는 상상을 해보세요. 시답잖은 상상이지만 설핏 유쾌해질 수 있습니다. 다음 레터는 인터뷰로 준비해서 올게요. 레터에 달아주시는 답글들, 따로 보내주시는 답장들 감사합니다. 곧 또 봬요.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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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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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ver 2 years 전

    저도 추석마다 밤을 줍는 게 큰 낙이었던게 기억나네요. 밤 줍기는 몰입도가 큰 행위여서 줍다보면 세상에 나와 밤톨들만 존재하는 것 같은 놀라운 기분이 들 때도 많았어요. 채집활동의 즐거움이란 게 이런거구나 싶었습니다. 양쪽 주머니가 터질듯이 밤을 채우면, 괜히 우쭐해지는 가분이 들기도 했어요.ㅎ 민지님 덕분에 옛 추억을 더듬어보네요. 항상 감사해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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