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풀리는 이야기 l 우리술에도 빈티지가?
우리 술에도 ‘빈티지’가 있을까?
구독자 선비, 와인 코너에 가면 항상 고민에 빠지게 되지 않는가?
같은 와이너리 제품이라 하여도 ‘2019’, ‘2020’처럼 숫자가 다르게 표기되는 걸 알고 있을걸세.
이 숫자가 와인의 맛과 값어치를 결정하는 ‘빈티지’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네. 그해의 날씨가 포도 농사를 좌우하고, 잘 익은 포도로 만든 와인이 명품이 되는 이유라네.
그렇다면 우리 전통주에도 이와 같은 빈티지의 개념이 존재할지 궁금하지 않는가? 쌀로 빚는 우리 술에 ‘몇 년산’이라는 표현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네. 하지만 와인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녔지.
와인의 빈티지 vs 전통주의 빈티지
가장 큰 차이는 기준이 되는 해(年)에 있네.
와인 빈티지는 포도를 수확한 해, 전통주 빈티지는 술을 빚은 해, 곧 제조 연월이 기준이 되지. 와인은 포도의 작황이 절대적이라네. 그래서 수확 연도가 무엇보다 중요하지.
반면, 전통주의 주재료인 쌀은 포도보다 기후의 영향을 덜 받는 편이네.
물론 그해 쌀의 품질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누룩의 상태, 술을 빚는 날의 온도와 습도, 그리고 양조인의 손길이 맛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네.
즉, 전통주의 빈티지는 언제 수확한 쌀인가보다 '언제,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빚었는가' 가 핵심이라 할 수 있지.
빈티지의 개념이 있는 ‘약주’와 ‘청주’
우리 술 가운데서도, 빈티지의 변화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술은 맑은 술, 곧 ‘약주’와 ‘청주’이네. 잘 빚은 약주와 청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지.
갓 빚은 약주·청주는 상큼하고 풋풋한 향이 도드라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과일 향, 견과류 향, 감칠맛, 발효장 같은 깊은 향미로 진화하네. 이 변화가 몇 달, 혹은 몇 년의 빈티지 차이에 따라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라네.
최근에는 많은 양조장에서 특정 연도에 빚은 술을 ‘특별한 에디션’으로 일부러 내놓으며 그 가치를 알리고 있다네. 같은 양조장의 같은 술이라도 2023년산과 2024년산은 그 맛과 향이 미묘하게 달라, 비교하며 마시는 재미가 있지.
막걸리와 증류식 소주는 어떨까?
막걸리는 보통 갓 빚은 신선함이 으뜸이라 여기지만, 모든 막걸리가 그런 것은 아니네. 전남 해남의 ‘해창생막걸리 18도’처럼 알코올 도수가 높고 드라이한 막걸리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산미가 부드러워지고 맛이 깊어진다네.
증류식 소주는 위스키나 브랜디처럼, 병입된 후엔 더 이상 숙성이 되지 않는다네. 허나 오크통이나 옹기에서 얼마나 오래 숙성되었는지가 중요하므로, 빈티지보다는 숙성 연수가 품질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네. 그래서 ‘3년 숙성’, ‘5년 숙성’ 같은 문구가 등장하는 것이지. 이는 곧, 우리식 빈티지의 표기법이라 할 수 있겠네.
그렇다면 왜 아직 빈티지 전통주가 흔하지 않을까?
빈티지의 개념이 있다는 건 분명하나, 왜 우리는 아직 쉽게 마주치지 못하는 걸까?
1. 유통기한의 문제
살균하지 않은 생막걸리나 약주는 유통기한이 짧아, 장기 숙성이 어렵다네.
2. 인식의 부족
‘오래된 술은 식초가 된다’는 편견이 여전히 견고하지.
3. 시장 여건
와인처럼 빈티지를 즐길 만큼 숙성주를 찾는 이가 많지 않은 현실도 있소. 양조장 입장에서도 장기 숙성에 과감히 투자하긴 어려운 구조이기도 하네.
하지만, 최근 몇년 사이에 전통주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자신만의 철학을 담은 빈티지 술을 선보이는 양조장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지. 이는 우리 술의 다양성과 깊이를 보여주는 긍정적인 징조라 할 수 있겠네.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다음에 전통주를 고를 일이 있다면, 병 라벨 뒤쪽에 적힌 제조 연월일을 한 번쯤 확인해보시게. 같은 이름이라도 다른 해에 빚어졌다면, 그 안엔 다른 시간과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지.
이제는 우리 술도, ‘언제 만들었느냐’를 음미할 줄 아는 시대가 찾아오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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