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구독자! 잘 지냈어? 다시 일주일만에 인사를 전하게 되서 좋다! 마감해야 한다는 압박도 있지만 글쓰기에 몰입할 시간을 갖게 되서 기쁘기도 해. 지난 글은 길기만 하고 재미가 없었던 것 같아 너무 아쉬웠어. 시즌2가 '체험 삶의 현장', '워크맨'처럼 단기알바를 한 후기 콘텐츠인데 이 장르가 낯설고 어떻게 쓸지 감이 잘 안 잡히더라고. 이번엔 그.영.어의 원래 컨셉에 잘 맞춰보려고! 구독자(과)와 카페에서 수다떠는 느낌으로 써볼게.
왜 갑자기 마켓셀러가 됐을까?
때는 두 달 전! 1월에 이스트 런던에서 단 하루 열리는 마켓에 참여하게 되었어. 그 말은 즉슨 내가 판매할 게 있었다는 거잖아? 그게 뭐냐면... 상품이 무려... 1개! 2025 달력이야! 단 하나의 상품밖에 없었어🤣 나는 그래픽 디자이너인데 일러스트에도 관심이 많거든. 작년 11월말, 취업이 안되서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12월이니까 달력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야. 초집중해서 일러스트와 디자인 작업을 했어. 작업 2주일, 인쇄가 1주일 걸리는 바람에 진짜 달력을 받은 건 12월 셋째주였어🤣 근데... 그동안 디자이너로만 살다보니 디자인만 하면 끝인 줄 알았거든. 그건 시작에 불과했지 뭐야... 엣지샵(네이버 스마트스토어같은 플랫폼)을 급하게 열고, 홍보용 이미지 작업을 하고, 온라인 마케팅을 하기 시작했어. 사업감각이 0이었던 나는 12월 말이 되어서야 달력을 팔기 시작한 거야. 달력은 보통 10월부터 판다는데 끝물에 시작해놓고 야심차게 100부나 인쇄했네... 돈을 벌어보려다가 영국인쇄소에 돈만 왕창 썼어. 한국에서 인쇄할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지. 이미 사업적으로 망했지뭐ㅎㅎ 하지만 어떡해. 그래도 팔아봐야지...
사실 난 소셜미디어를 멀리 하고 싶었어. 경제적으로 안 풀리다보니까 발작버튼이 넘 많았거든. 근데 달력을 팔려면... 소셜미디어로 달력을 알려야겠더라고? 내 바람과는 달리 틱톡, 유튜브, 인스타, 스레드에 인스타 유료광고까지... 온갖 소셜미디어 활동을 하기 시작했어. 근데 정말 쉽지 않더라고. 조회수도 적었고 별 반응이 없었어. 홍보를 하고 있는 건지,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손 흔들며 허우적거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더라.
그럼 런던 마켓에서 직접 팔아볼까? 하지만 상품이 하나밖에 없어서 거절당할 것 같았어. 여러군데 지원했지만 역시나 거절당했어. 그때 친구가 알려줬어.
"마켓 루트라고 들어봤어? 한국디자이너 마켓인데 생긴지 얼마 안 됐더라. 거기 한 번 참여해봐."
마켓 루트?
마켓루트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보니 영국에 젊은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단체같더라고. 신선하고 트렌디해보였어. 팔로워수가 천 명이 안 되고 포스팅이 적은 걸 보니 시작한지 얼마 안 된 것 같았어. 마켓루트는 세 달에 한 번 새로운 장소에서 마켓을 연다고 적혀 있었어. 한국 창작자들이 함께 모여 직접 만든 K-디자인 상품을 판매하고 네트워킹을 한다고 해. 예전엔 한국인끼리 어울리는 걸 지양했는데 이제 영국 온 지 한참 됐겠다, 영국사회로의 통합이 쉽지 않다는 걸 느끼던 차에, 이제는 뭉치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진짜로 '창작 에너지'가 불타는 사람끼리만 모인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마침 다가오는 1월말에 세번째 마켓을 연다는 거야! 오옷?? 이거이거 타이밍 좋은데?
'일단 도전!'이란 기세로 링크를 누르고 거침없이 셀러로 신청했어. 한 일주일 정도 흘렀을 때 안내 메일이 왔어.
참가...할까말까, 할까말까
흠... 근데 막상 안내 메일을 읽고보니 여러모로 고민이 됐어. 참가비, 시기성 등을 생각하니 참가할 확신이 안 들더라고. 며칠이 흘렀어. 근데 뜻밖에도 마켓루트에서 연락이 왔어! 안내메일 확인했냐고 물으시더라고.
"가이드를 읽어보니 제가 지금 팔 게 달력 하나밖에 없고 브랜드라고 하기엔 아직 준비가 덜 된 거 같아서 나중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월말엔 구경가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신청할게요. 죄송합니다. ㅜㅜ"
라고 답했어. 당연히 여기서 끝날 줄 알았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아앗 그러셨군요!! 저희는 브랜드 아니신 분들도 참여하세요:) 안그래도 달력이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네 딱 수수님이 너무 예쁜 달력을 만드셔서 참여하시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구정기념 마켓이라 달력 판매 잘 될것 같은데 혹시 고민해보시구 생각 바뀌시면 말씀 주세요! 저희는 또 셀러들끼리 작업얘기도 많이 하고 커넥션도 쌓을 수 있어서 셀러로 참여 강추드려요!"
라고 친절하게 답장해주시더라고? 저 밑줄 친 부분에 기분이 사르륵 좋아지는 거야. 잔뜩 기죽어 살고 있는데 저렇게 말해주시니 망설이던 마음이 확 '할까'로 기울더라고. 뭘 좀 아시는 분이야😉
생각해보면 마켓루트에 참여 안하면 오히려 덜 팔리면 덜 팔렸지, 더 팔릴 거 같지 않았어. '어차피 달력 팔기에 늦었는데 저날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나가보자. 다른 창작하시는 분들도 알게 되는 것도 좋을 거야!' 운영자님의 격려와 배려로 다시 용기내서 나가기로 결심했어!
어떻게 준비할까?
때는 2021년, 작년에 영국에 다시 돌아왔지만 그때 한국에 아예 돌아갔었거든. 귀국정리한다고 스토크뉴잉턴 근처 마켓에 참여한 적이 있었어. 참가비는 단 돈 £5(약 만원). 그 마켓은 매주 주말마다 열리는 중고마켓이었어. 그때는 내가 직접 디자인한 게 아니라 내 물건을 처리하는 게 목표였으니 £1, £2에 팔았지. 오는 손님들은 젊은 힙스터도 있었지만 대부분 저소득층 아줌마 아저씨들이 많았어. 저 가격도 깎아달라고 했었지...
그때도 상인으로 손님을 직접 마주하며 겪는 상호작용이 재밌다고 생각했거든. 이번엔 내가 직접 디자인한 제품으로 손님을 맞이할 생각하니 더 설레더라고! 나의 창의적 노력과 가격을 알아줄 사람들을 만나게 되다니! 장소도 힙스터의 명소 런던필드 동네에 있는 카페였어.
곰곰이 생각했어. 어떻게 준비할까?
일단 손님들에게 한눈에 보이도록 달력을 세워서 진열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세 면을 접어서 아이패드를 세워주는 거치대 케이스 있잖아. 그 방법을 적용하여 택배상자를 잘라서 세 면을 삼각형으로 만들었어. 상자판이 부실해서 지지해주는 면이 벌써 구부러지더라.... 그래도 꿋꿋이 앞면에 후크를 붙이고 달력을 걸어봤어. 음 나쁘지 않겠군. 가까이서 보면 정말 허접한 상자때기지만 달력으로 시선이 가니까 괜찮을 거야...
다음으로 뭘 준비할까? 달력을 사준 친구들이 후크를 아직 안 사서 달력을 못 걸고 있다는 얘길 들었어. 런던 사는 한국인 대부분은 세입자일텐데 벽에 쉽게 못을 박거나 후크를 붙일 수 없겠구나. 내가 벽걸이 달력을 좋아하다보니 딱 벽걸이용으로만 만들었거든. 그래서 아마존으로 쉽게 뗄 수 있는 벽걸이 후크를 몇 개 미리 사놨어. 별도로 팔려고!
마지막으로 카드결제기기가 없으니 계좌이체를 위해 QR코드를 만들었어. 또 제품 설명글과 가격도 인쇄해놨어. VIP는 £13, 일반입장은 £15로 팔기로 결정했어. 처음에는 £22로 팔려고 했는데 달력 수요가 확 줄어든 시점이라 그냥 확 줄여서 재고를 최대한 많이 처리해야겠더라고.
아직 수십개가 남은 재고를 얼마나 가져가야 할지도 고민됐어. 작은 여행가방에 20개를 담았어. 이걸 다 팔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한편 이게 다 팔리면 어떡하지도 싶었어. 최대한 재고를 없애고 싶은데... 이때 한 친구가 가져간 게 다 팔리면 온라인으로 주문받으라고 하더라! 굿 아이디어!
드디어 D-Day
1월 25일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 밝은 하늘을 보니 벌써부터 입가에 미소가 번졌어. 마켓은 아침 10시 오픈이고 셀러는 8시 30분까지 현장에 가야 했어. 남편까지 동원하여 짐을 바리바리 들고 후다닥 출발했어. 1시간 넘게 떨어진 장소로 가는 길에 오버그라운드로 갈아탔거든. 알고보니 반대방향인 거야... 급하게 내려서 우버를 타는데 우버가 자꾸 안 잡혀서 결국엔.. 9시 반에서야 도착했어.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지각한 사람들 잘 알지? 억울하면서도 민망했어. 하지만 막상 현장에 가니 운영자팀과 모든 참가자들이 자기 테이블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더라고.
분주한 움직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나도 내 테이블에 짐을 풀기 시작했어. 다행히 제품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디스플레이하는 데 오래 걸리진 않았어. 거치대에 달력을 걸고, 인쇄한 정보를 붙이고, 달력 몇 장과 후크, 스티커 등을 놓으니 벌써 끝ㅎㅎ 그때 체크 코트를 입고 멍해보이는 여자분이 슬금슬금 내 테이블 왼쪽 옆으로 왔어. 내 옆 테이블에 한 명이 더 있었나봐. 멍한 눈으로 짐을 푸는 모습을 보니 그분은 양말을 파시는 분이더라. 내 테이블 오른쪽으로는 아이보리계열 옷과 악세사리를 파는 여자 두 분이 부지런히 진열 중이었어. 테이블 뒤쪽에는 통창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포스터를 붙이시더라고. 나도 제일 맘에 드는 달력 페이지를 북북 찢어서 내 테이블 뒤쪽 창문에 붙였어.
디피를 끝냈는데도 오프닝까지 시간이 좀 남더라고. 멀뚱멀뚱 서있는데 쿠키 셀러로 참여하신 분이 쟁반에 쿠키를 담아 모든 셀러에게 나눠주셨어. 아 너무 훈훈하다. 달달한 쿠키로 긴장이 풀렸어. 맛있는 걸 먹으면 힘이 절로 나잖아😍
이번 마켓 장소는 '유구 스토어(Yugu Store)'라고 카페 겸 옷가게인 곳이었거든. 카페는 여전히 운영하는 중이라 남편에게 커피 한 잔 사주고 헤어졌어. 다른 셀러들과 네트워킹하고 싶어서 찐내향인인 그는 집으로 보냈지. 물론 그도 그게 편할 테고 ㅎㅎ
10시. 시원하게 뚫린 통유리창문에 들어오는 햇살 따라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어. 대부분 한국분들이지만 30%정도 외국인도 있었어. 내 친구들도 온다고 해서 손님 올 때마다 목을 쭉 빼고 봤지. 내 첫 손님은 영국 여자분이었어. 내 달력이 컬러풀해서 한 눈에 들어오긴 했나봐😉 그 분이 우리쪽 테이블 주변을 스윽 보더니 달력을 사고 싶다고 하는 거야.
다행이다. 고마움이 밀려왔어. 사실 이렇게까지 작업한 적은 처음이었거든. 클라이언트 없는 개인 작업을 제대로 완성한 적도 처음이었어. 작업하는 2주동안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절실함 + '진짜로 하고 싶은 일러스트를 하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했거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10시간, 12시간씩 작업했는데 그 가치를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알아줬다는 사실에 방실방실 웃음이 났어.
그런데... 이 장소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와이파이가 안 되는거야😨 와이파이를 연결해도 창가쪽 테이블근처는 아예 안 터졌어. 그럼 데이터로는 연결이 되야 하는데 아예 신호도 안 터지는 거야. 그래서 손님이 구매할 때마다 가게 입구쪽에 나가 거래해야만 했어. 1월이라 아직 추운데 가게 밖에서만 신호가 터지니까 난감하더라고. 거치대에 붙여놓은 QR코드가 무색해졌지. 이런 변수가 생길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 같아. 운영자분들도 당황하셨어. 그런데 어찌하나. 단 하루 열리는 마켓, 번거롭지만 이렇게 진행됐지 뭐!
마켓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었어. 카드, 헤어밴드, 쿠키, 초콜렛, 인형, 옷, 양말, 화장품 그리고 달력까지 ㅎㅎ 셀러들은 95% 한국여자분들이었어. 남자는 참여한 여자분의 남편들이었어 ㅎㅎㅎ 셀러분들 모두 감수성이 많고 상냥해보이셨어. 한국 여사친 만들기 전문가로서 나는 양옆 셀러들과 자연스레 말을 트며 조금씩 조금씩 친해졌어. 내 오른쪽 테이블에 있던 그 멍한 친구는 알고보니 여기서 연영과를 나와 뮤지컬배우를 하는 분이었더라고. 근데 어젯밤 숙취로 힘들어하고 있던 거였어. 내 왼쪽에 있던 팀은 런던 유학생들이었고 그 중 한 명이 패브릭 브랜드를 조그맣게 하고 있어서 참여했다고 해. 쿠키를 팔던 분은 지금 여기서 학교를 나와 현재는 호텔소속 제빵사인데 사이드로 자기만의 쿠키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셨어.
영국에 있는 내 친구들은 다들 직장인이라 이렇게 자기만의 브랜드를 과감하게 론칭하는 사람들을 만나니까 신선하더라구. 나도 회사를 다니며 항상 꿈꿨던 일이긴 해. 내가 디자인한 굿즈를 팔아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일을 벌이게 되서 신기해. 역시 사람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움직이나봐.. 비록 한 가지 제품이었지만 이런 멋진 기회를 통해 다른 창작자분들의 열정을 가까이서 접하게 되서 심장이 뜨거워졌어.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는 소속감이 없잖아. 나처럼 고독한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연대를 이룬 것에도 힘이 났어.
얼마나 팔았을까?
옆 셀러들과 수다 떨다가, 손님들과 결제하러 왔다갔다 하다보니 어느덧 해가 졌네. 아침부터 저녁까지 복작대는 곳에서 잔잔한 사람들과 조곤조곤 대화를 하다보니 구직생활로 답답했던 마음에 틈이 생긴 것 같았어.
그래서 몇 개 팔았냐고?
1,2,3,4...10! 10개 팔았어!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다고 할 수 있는 개수지. 별로 기대하지 않아서 이 정도면 괜찮았어. 직접 와서 구매해준 친구들과 낯선 이들 모두에게 정말 고마웠지. 엄청 큰 수익은 아니지만, 멋진 사람들과 함께 마켓을 연 것 자체가 큰 의미였다고 생각해.
마켓루트 덕분에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을 정말 많이 만났어. 대부분 유학생 출신이고 온 지 4년 미만이시더라고.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았던 것 같고, 비유학생이라 좀 놀라시더라 ㅎㅎ 하... 이젠 내가 연장자라는 게 여전히 낯설다...뭐 그래도 내가 겪었던 일을 들려주며 그들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다는 게 좋기도 해.
요즘 AI가 창작과정을 다 생략하고 1분만에 그림, 디자인 등을 해주는 걸 보면 내가 계속 이쪽길을 가는 게 맞는 걸까 회의감이 들었어. 그 와중에 여전히 창작노동의 가치를 알고 과감하게 이쪽길에 서 있는 창작자들을 만나서 기뻤어. 앞으로 마켓루트가 더 번창해서 더 많은 한국디자이너들이 함께 런던에서 잘 되기를 바라!
그럼 오늘 레터는 여기서 마무리할게. 다음주에 만나!
수수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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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쑤쑤님이 너무 멋지고 존경스러워요❤️ 한국에서는 달력 구매 어렵겠죠? ㅠㅠ
그래서 영국이 어땠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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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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