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과학기술] 1년만에 180편의 논문에 참여한 '가상 연구자'

2021.05.05 | 조회 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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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하는 여우원숭이

매주 월요일, 따끈따끈한 최신 과학기술을 짧고 쉬운 글로 소개합니다.

2020년에 혜성처럼 나타난 연구자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카뮤 누스(Camille Noûs)인데요, 프랑스 정부의 과학 정책에 반대하는 성명서에 참여하며 처음 등장한 그는 1년 동안 무려 180여 편의 논문에 참여하며 엄청난 생산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론물리학과 천체물리학, 분자생물학과 생태학을 가리지 않는 광범위한 분야에 참여하고 있지요. 구글 학술검색 계정과 개인 프로필도 갖고 있습니다.

실존인물이라면 정말 초인적인 성과겠지만, 카뮤 누스는 가상인물입니다. RogueESR이라는 프랑스 연구 지원 기관에서 만들어낸 가상 인격으로, 프랑스 정부가 2020년 발표한 연구개발 지원 계획을 비판하며 나온 여러 캠페인 중 하나이지요. 그의 이름 누스(Noûs)는 프랑스어로 우리(We)라는 뜻인데, 현대 과학은 여러 학자들의 협력으로 쌓아 올린 결과이며 개인들의 업적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배경을 조금 더 설명해 볼게요. 우선 학계의 시스템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나 미국을 포함해서 많은 국가의 학계는 테뉴어 트랙(tenure track)이라는 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연구 능력이 출중한 박사를 계약직 조교수(assistant professor)로 처음 채용한 다음, 5~10년 정도 지켜보며 그가 훌륭한 실적과 커리어를 쌓는 데 성공하면 비로소 정년이 보장된 정교수(full professor)로 고용하는 방식입니다. 정교수로 전환되는 것을 보통 '테뉴어 딴다'고 하는데, 만약 조교수 기간의 실적이 변변찮으면 재계약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방출하지요.

짐작이 가시겠지만, 젊은 교수들은 아주 극단적인 실적 경쟁에 내몰립니다. 강의는 물론 학과의 온갖 행정적 잡일까지 떠맡아서 해치우는 와중에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내야 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실적이 안 나올 우려가 있는 연구에 도전하기보다는 실적이 금방금방 잘 나오는 연구에만 투자하기 쉽습니다. "테뉴어만 따고 나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연구를 할 거야!"라고 외치면서요. 심하게는 가짜 논문을 여러 편 찍어내서 실적을 날조하기도 하고요. 아래쪽에 링크된 PhD Comics의 만화는 생물학 박사인 작가가 연재하는 학계 풍자 웹툰인데요, 딱 이런 상황을 풍자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불행한 어느 연구자가 죽어서야 'Research In Peace' 하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프랑스 학계는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젊은 학자와 교수들에게 종신 고용이 보장된 준공무원 직책을 보장합니다. 대신 경제 규모가 비슷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연봉이 적은 편이고요. 물론 젊은 박사들 모두에게 교수직을 줄 수는 없으니 교수로 채용되기 위한 경쟁 자체는 존재합니다만, 일단 채용이 되고 나면 테뉴어를 받지 못한 조교수들처럼 극단적인 생존 경쟁에 내몰리는 일은 거의 없고 학문적 자유를 좀 더 많이 누린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2020년에 프랑스 정부에서 발표한 학술 제도 개편안에는 임용 후 6년 동안의 성과를 보면서 종신계약 여부가 결정되는 테뉴어 트랙 보직을 신설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프랑스 정부에서는 전반적으로 학자들의 연봉 수준을 올리고 테뉴어 트랙을 추가해서 프랑스의 학문적 경쟁력을 높이겠다고 주장하는 거고요. RogueESR의 캠페인은 바로 이 테뉴어 트랙 보직의 신설에 반대하는 내용입니다.

RogueESR의 반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자들의 '실적'이 어떤 방식으로 계량화되는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학자들의 학술 활동은 학술대회 발표, 논문 출간, 대중 강연, 단행본 저서 출판 등 여러 양상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실적'이라고 말할 때는 발표한 논문의 편수와 피인용 횟수를 의미해요. 많은 논문을 발표할수록, 자신이 발표한 논문을 다른 학자들이 많이 인용할 수록 유능하고 실적 좋은 학자인 거지요.

문제는 논문을 혼자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현대 과학이 점점 고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웬만한 연구를 진행할 때는 서로 다른 분야를 전공한 학자 여럿이 모여서 공동 작업을 하게 됩니다. 분야에 따라 크게 다르지만 요즘은 한두 사람만 참여해서 발표한 논문은 보기 힘들고 보통 대여섯 명, 많게는 3~4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참여한 대규모 협업 논문이 많습니다. 그러면 30명이 참여한 논문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학계에서는 관례적으로 학술논문의 저자 중 '제1 저자'와 '교신저자'를 특별히 지정합니다. 제1 저자(first author)는 말 그대로 저자 목록 중 제일 앞에 오는 사람으로, 해당 논문에 실린 연구를 수행하고 논문을 작성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입니다. 교신저자(corresponding author)는 원래 학술지 편집부와 연락을 주고받거나, 학술지의 독자가 궁금한 사항이 생겼을 때 연락해야 하는 사람(to whom the correspondence should be made)이었는데 요즘은 '연구팀의 수장' 정도의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A교수 연구실의 박사과정 대학원생 B가 석사과정 대학원생 C의 보조를 받아서 연구를 수행하고 논문을 발표했다면 A가 교신저자, B가 제1 저자가 되는 식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실적'은 제1 저자나 교신저자로 참여한 논문의 편수만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나 세 번째 저자로 참여한 논문이 100편이 있더라도 자신의 실적은 한 편도 없는 거예요. 좀 이상하지요? 그래서 요즘은 '공동 제1 저자(co-first author)'라는 트릭을 많이 씁니다. 논문 첫 페이지나 마지막 페이지에 주석을 달고 "B와 C는 이 논문에 동등하게 기여하였음"이라고 표시하는 건데요, 저는 공동 제1 저자가 무려 다섯 명인 논문도 본 적 있습니다. 실적 경쟁이 빚어낸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현상이지요.

RogueESR에서 현대 학계의 실적 계량화 경향을 비판하는 지점이 여기 있습니다. 애초에 여러 사람이 협력해서 만들어낸 연구 성과물을 특정 몇 명의 실적으로만 인정하는 게 부자연스럽다는 거지요. 그런데 논문 실적에 따라서 젊은 학자들에게 종신계약 보장 여부를 결정한다면 자유롭게 학술 연구에 몰두하는 대신 실적 쌓기에만 학자들이 집중할 테고 이런 방식으로는 모두의 협력으로 쌓아 올린 현대 과학의 지식 체계가 다 무너질 거라는 비판입니다. 비교적 젊은 학자들에게도 종신계약을 보장하던 프랑스마저 종신 계약을 조건부로만 보장하는 테뉴어 트랙 직위가 신설된다면 프랑스 학계의 토대가 무너질 거라는 거고요.

실존 인물이 아닌 카뮤 누스의 '작업'은 당연히 다른 학자들이 논문을 출판하면서 저자 목록에 고의로 누스의 이름을 넣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누스 본인이 '참여'하지 않은 논문에도 이름이 들어가다 보니, 이 캠페인에 참여하는 학자들이 많을수록 누스의 '실적'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겠지요. 지금은 누스 한 명만 명성을 얻은 '사람'이지만, 누스와 같이 엄청난 실적을 자랑하는 가상 프로필이 자꾸 등장한다면 논문 편수를 기반으로 실적을 평가하는 현재의 시스템에 오류와 균열이 일어날 거고 결국 학술 실적을 평가하는 제도의 우스꽝스러움을 폭로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입니다.

UCU의 제인 톰슨. 이미지 출처: https://wellcome.org/, CC Attribution UK 2.0
UCU의 제인 톰슨. 이미지 출처: https://wellcome.org/, CC Attribution UK 2.0


2021년 3월 22일, 영국의 웰컴 재단에는 연구 문화에 관한 여러 제언이 기고되었는데요, 영국 대학노동조합(University and College Union)의 제인 톰슨의 글에는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학계 연구직 일자리는 안정성이 매우 떨어지는 다수의 일자리와 그 경쟁을 뚫고 정규직에 안착한 소수의 사람들로 구분되지요. 프랑스뿐 아니라, 여느 나라의 과학기술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직의 68%는 단기 계약직인데, 이 숫자는 2002년에 법안이 새로 제정된 이래로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 우리는 불안정한 연구직 일자리를 디딤돌로 써야만 안정적인 커리어를 얻을 수 있다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버리고 애초에 비정규직 계약이 왜 그렇게 만연한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Around 68% of research staff are currently on fixed-term contracts, a figure that has remained relatively static since new legislation was introduced in 2002.  (...) We need to challenge outdated notions that insecure research roles are a stepping stone to secure academic career paths and ask why insecure contracts are so endemic in the first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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