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과학기술] 주 4일 근무, 혹은 주 36시간 근무

아이슬란드의 사회 실험, 대성공하다

2021.07.26 | 조회 5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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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하는 여우원숭이

매주 월요일, 따끈따끈한 최신 과학기술을 짧고 쉬운 글로 소개합니다.

'놀토'라는 말을 기억하시나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초·중·고등학교에서 시행되었던 제도인데, 매달 둘째, 넷째 토요일에는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제도였습니다. 학교 안 가고 놀아도 되는 토요일이라고 해서 '놀토'라고 줄여 불렀지요. 이제 와서는 아주 생경하게 들리지만 2004년 이전에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요일만 빼놓고 매일 등교해야 했거든요. 2012년에는 주 5일 수업제가 전면 도입되어서 모든 토요일에 학교를 안 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놀토'라는 말도 사라졌습니다.

학업 시간을 축소하는 제도를 도입하면 으레 그렇듯이, 주 5일 수업제가 시행될 당시에는 제법 저항이 있었습니다. 전면 주 5일 수업제 시행을 눈앞에 둔 2011년에는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여가를 늘리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에 반대된다"는 보도가 나왔지요. (그런데 한국 학생들이 공부를 너무 적게 했던 시기가 있기는 했을까요?) 이제 와서는 아무도 학생들이 너무 논다고 토요일에도 학교 보내자고 하지는 않는 걸 보면 역시 기우였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공부 말고 근로 시간은 어떨까요? 현대 노동의 역사는 대체로 근로자의 노동 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19세기 초 산업혁명기의 영국 공장 노동자들은 많게는 하루에 16시간씩 일했습니다. 하루 8시간 노동을 세계 최초로 법제화한 국가는 1917년의 소련으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8시간씩, 주 48시간 근로제를 도입했지요. 1919년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주 48시간 근로제를 채택한 이후 한동안 이것이 세계적인 기준이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의 큰 변화는 1926년,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만들었습니다. 그는 노동자 임금을 올리고 근로 시간을 단축하는 일련의 실험을 계속하다가 1926년 주 48시간 근무를 주 40시간 근무로 단축하고 자사의 모든 노동자가 일주일에 5일만 근무하도록 합니다. 이때 중요한 점은, 근무 시간이 줄었다고 근로자의 임금을 6분의 5로 삭감하는 게 아니라 6일 근무하던 시절의 임금을 그대로 주면서 근무 시간만 단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근무 시간이 줄어든 만큼 노동자의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회사가 오히려 이득을 본다는 관점이었죠.

거의 100년이 지난 2021년, 우리는 또 다시 근로 시간을 줄일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아이슬란드에서 진행된 대규모 사회 실험의 상세한 결과가 공개되었는데, 임금을 줄이지 않은 채로 주당 근무 시간을 40시간에서 35~36시간으로 단축하더라도 생산성이 전혀 나빠지지 않으며 근로자의 행복도는 크게 증가한다는 강한 결과가 발표되었거든요.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실험은 총 2,500명의 근로자를 대상으로 시행되었는데, 아이슬란드 인구의 대략 1.3% 정도에 해당합니다. 한국으로 치면 약 67만 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것과 마찬가지지요. 실험을 주관한 아이슬란드 연구 그룹인 지속가능성 및 민주주의 연합(Association of Sustainability and Democracy, 이하 ALDA)에서 발표한 보고서(50~51페이지)에 따르면, 참가자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변화를 누렸다고 합니다.

  • 근로자의 생산성은 변하지 않거나, 경우에 따라 생산성이 높아지기도 함
  • 스트레스 지수가 감소하고 가족이나 친지와 보내는 시간이, 또는 쉬는 시간이 크게 증가함
  • 평일에 집안일 등을 해결할 시간이 많아져서 주말 생활의 질이 높아짐
  • 이성 부부 중 남성이 가사에 참여하는 시간이 늘어남
  • 한부모 가정 등 '타임 푸어' 인구의 삶의 질이 개선됨
  • 실험 참가자의 가족이나 친지 등, 직접적으로 근로시간이 줄어들지 않은 사람들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행복도가 증가한 것으로 보고함

헨리 포드가 1926년에 주 5일 근무제를 처음 도입했을 때와 거의 비슷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조직의 관리자들도 부하 직원들이 근무를 덜 하고도 여전히 비슷하거나 더 좋은 성과를 내서 만족했다는 내용도 보고서에 들어 있는데, 임금을 그대로 주면서 근무 시간만 단축한다고 하더라도 회사의 생산성은 감소하지 않은 반면 직원들의 행복도와 애사심은 오히려 개선된다는 거죠.

근무 시간이 줄었는데 어떻게 비슷한 수준의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요? 연구진들이 꼽은 가장 주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기존에 꽤 많은 시간을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일에 낭비하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을 4시간 빼앗기게 되자 그 쓸데없는 업무를 찾아내서 효율화하도록 하는 압력이 가해졌다는 지점입니다. 지루하고 길게 이어지는 오후 회의라거나, 모든 직장인의 길티 플레저인 동료와의 기나긴 커피 타임 같은 것들이죠.

사실 주 40시간 근무가 처음 도입된 지 이미 100년 가까이 지났고, 그 동안 업무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돕는 수많은 기술 발전이 있었으니 근무 시간을 더 줄일 여지가 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일주일에 40시간은 오피스에서 채운다'는 근로 계약에 묶인 사람들이 굳이 4시간 정도 시간을 단축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공연히 주어진 일을 빨리 해치워 버리면 보통은 집에 일찍 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일거리만 떨어지잖아요? 반면 주 36시간 근무가 실제로 회사의 규정이 되었는데 우리에게 할당된 일이 줄어들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시간 안에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퇴근하기 위해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 노력할 겁니다.

물론 이번 실험의 긍정적인 성과는 아이슬란드의 근로 문화 때문에 유독 크게 나타난 지점도 있을 거예요. 아이슬란드는 1인당 국민 소득이 6만 달러를 넘나드는 선진국인 데다가 정치적 진보 성향이 세계 4위로 분류됩니다. 한국에서처럼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엄청난 잔업이나 눈치 보기 야근에 시달리는 환경이라면 정부 주도로 근무 시간을 36시간으로 단축 선언해 봤자 실제 근로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통제된 실험에서 근로 시간 단축이 생산성 감소 없이도 근로자의 복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결과는 분명 경영자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당장 주 36시간 근무를 시행하는 것 이전에, 대부분의 일터에 만연하고 있는 무의미한 업무 관행을 뜯어고치기라도 해야 한다는 강력한 증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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