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과학기술] 전기가 통하는 물을 찾아서

2021.09.09 | 조회 7.1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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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하는 여우원숭이

매주 월요일, 따끈따끈한 최신 과학기술을 짧고 쉬운 글로 소개합니다.

좀 이상한 제목이지요. 젖은 손으로 콘센트를 만지지 말라거나, 물이 흥건한 곳에서 전자제품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거나 하는 이야기를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 들어 왔습니다. 포켓몬스터에서도 물 속성 포켓몬들은 전기 속성에 약하잖아요? 물을 통해 전류가 흘러 다닐 수 있다는 건 거의 상식의 영역이지요.

하지만 "순수한 물"은 전류가 거의 흐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물에 전기가 통하는 것은 물 때문이 아니고, 물에 녹아 있는 이런저런 불순물, 그중에서도 미네랄 같은 이온들 때문이에요. 그래서 "물"의 전기 전도도는 그 안에 어떤 물질이 얼마나 녹아 있느냐가 결정합니다. 바닷물처럼 이온이 잔뜩 녹아 있는 물은 보통의 물보다도 전기가 훨씬 잘 통하지만 설탕물처럼 이온이 아닌 물질을 녹였을 때는 전기가 별로 통하지 않지요. 바닷물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시는 생수보다 100~1,000배 정도 전류가 잘 흐르지만, 순수한 증류수는 생수보다 10,000배 가량 전기 전도도가 낮습니다. 물론, 실험실이 아니라면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증류수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으니 물 묻은 손으로 전기를 다뤄서 안 된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설령 이온이 잔뜩 들어 있는 바닷물이라고 하더라도 금속에 비해서는 전기전도도가 형편없이 낮습니다. 가장 전류가 잘 흐르는 금속은 은(silver)인데, 은의 전기전도도는 바닷물에 비해 약 1,000만 배 정도 높거든요. 금속에서 전류를 옮기는 주체는 아주 가벼운 전자이고, 금속의 전자는 규칙적으로 배열된 원자핵 격자와 거의 충돌하지 않고 흘러 다닐 수 있는 반면 소금물 속에서는 전자보다 훨씬 무거운 원자핵이 물 분자와 수시로 충돌해 가면서 전류를 옮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기를 가르고 날아가는 총알과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는 리어카를 비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2021년 7월 28일, 물을 액체 금속으로 바꿀 수 있다는 연구가 과학 학술지 <Nature>에 발표되었습니다. 순수한 물에 전기가 통하게 하려면 일반적으로 행성의 맨틀처럼 어마어마한 압력에 노출시켜야 하는데, 그런 극단적인 조건 없이도 잠깐이나마 유지될 수 있는 금속 상태의 물을 만들어낸 거죠.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금속이 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금속이 뭔지 제대로 정의하려면 양자역학적인 에너지 준위를 따져 봐야 하긴 하는데, 간단하게는 "자유롭게 떠돌아다닐 수 있는 전자가 있는 물질" 정도로도 정의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물질은 원자핵에 달라붙어 있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금속이 아닌 물질에서 이 전자는 원자핵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떼어내려면 많은 에너지를 가해서 억지로 뜯어내야 합니다. 아래 그림의 왼편은 물 분자를 구성하는 산소와 수소 원자핵, 그리고 이들과 결합해 있는 최외각 전자들을 표현한 그림입니다. 전자들이 모두 자신들의 원래 자리에 강하게 고정되어 있어서, 이 녀석들이 자기 자리를 벗어나 이동하게 하려면 아주 강력한 전압을 걸어 줘야 합니다.

(좌) 물 분자의 구조. 출처: https://openstax.org/books/biology/pages/1-introduction, CC BY-SA 4.0 (우) 금속의 구조. 출처: Wikimedia Commons/Julen Aduriz EHU, File:Elektroi itsasoa.jpg, CC BY-SA 4.0
(좌) 물 분자의 구조. 출처: https://openstax.org/books/biology/pages/1-introduction, CC BY-SA 4.0 (우) 금속의 구조. 출처: Wikimedia Commons/Julen Aduriz EHU, File:Elektroi itsasoa.jpg, CC BY-SA 4.0

반면, 금속에는 '자유 전자(free electron)'라고 불리는 전자들이 존재합니다. 이 전자들은 특정 원자핵 주변에 강하게 달라붙어 있는 대신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어요. 아주 약한 전압이라도 가해진다면 자기 자리를 즉시 벗어나서 전압의 방향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자유 전자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공간을 채우고 있다고 해서 '자유 전자의 바다'라는 말도 쓰지요.

이번 논문의 연구진들이 사용한 트릭은, 바로 물에 대량의 전자를 공급해서 물 속에 자유전자의 바다를 만들어준 것입니다. 남들에게 전자를 내어주는 성질이 비교적 강한 알칼리 금속과 물을 접촉시켜서 물에 자유전자를 공급하는 거죠.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나트륨이나 칼륨과 같은 알칼리 금속은 물과 접촉하면 엄청나게 격렬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면서 폭발해 버립니다. 아래 영상처럼요.

연구진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액체 알칼리 금속 표면에 아주 적은 양의 물을 천천히 노출시키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우선 나트륨과 칼륨을 1:1로 섞은 NaK 합금을 준비합니다. NaK는 특이하게도 상온에서 액체 상태인데요, NaK를 노즐을 통해 진공으로 흘려보내서 물방울 모양으로 노즐 끝에 맺히게 합니다. 이제 다른 노즐을 통해서 수증기를 "아주 천천히" 흘려보내게 되면 수증기의 일부가 NaK 방울 표면에 조금씩 응결하는데요, 이때 물의 양이 너무 적기 때문에 나트륨이나 칼륨과 폭발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많은 전자를 넘겨받을 수 있게 됩니다. 결국 NaK 방울 표면에 아주 얇은 "금속 물"의 층이 생기고 황금빛으로 반짝이게 되는 거죠.

(좌) 수증기에 노출되기 전의 NaK 방울입니다. (우) 금속 물방울입니다. 두 이미지 모두 유튜브 영상을 캡처했습니다.
(좌) 수증기에 노출되기 전의 NaK 방울입니다. (우) 금속 물방울입니다. 두 이미지 모두 유튜브 영상을 캡처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번 금속 물 연구는 깊은 이론적 탐구나 실용적인 응용 목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금속 물이 생겨나는 조건도 제한적이거니와 불과 몇 초 만에 금속 물 상태는 사라져 버리거든요. 연구를 지휘한 파벨 융비르스(Pavel Jungwirth) 교수는 평소에 단백질의 시뮬레이션 연구를 주로 하는 화학자입니다. 물을 금속으로 바꾸는 과제를 딴 것도 아니었고요. 융비르스 교수의 인터뷰를 옮기자면, 이번 작업은 "과학은 그 자체로 재밌을 수 있다는 증거"라고 해요. 주중 근무 시간에는 평소처럼 단백질 연구를 하다가, 주말에 쉬는 시간에 여가 삼아 호기심만으로 진행해 본 연구인 겁니다.

이 논문에는 특이한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논문의 제1 저자인 필립 메이슨 박사는 Thunderf00t이라는 계정으로 활동하여 구독자 100만 명 가까이 확보한 과학 유튜버입니다. 그래서 논문 막바지의 사사(謝辭, 감사의 말)에는 자신의 구독자에 대한 감사를 남겨 놓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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