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의 관계가 서로의 반쪽처럼 엮여 있는 것은, 우리가 여자라는 아주 오묘한 세계를 나눠 가졌기 때문이다. 내가 아들로 태어났으면, 엄마의 영향력이 나의 마음 속, 머릿 속, 영혼 속 깊은 곳까지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엄마도 내가 딸이기 때문에 당신의 연장선이나 분신처럼 여기는 것이 아닐까? 성(性)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인지, 엄마의 연애는 훗날 나의 연애를 매어둔 닻처럼 멀리 표류하지 못 하고 그 주변을 빙빙 돌게 잡아 두었다.
내가 만난 엄마의 첫 남자 친구는 아키였다. 그는 얼굴이 가로로 긴 직사각형처럼 넙데데하고 각진 편이었다. 옆머리는 짧게 깎고 윗머리는 좁은 파마를 하여 뽀글거리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루밍에 진심이었던 남자였다. 눈은 눈썹 뼈보다 깊게 들어가 있었으며 코는 약간 메부리코, 까무잡잡하고 반질반질한 얼굴을 정교히 깎은 수염이 테두리를 그리고 있었다. 그에 대한 첫 기억은, 침대에 오줌을 싸 아침 잠에서 깨어난 직후였다. (그렇다. 나는 침대에 오줌을 자주 쌌다.)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에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대 머리맡에서 고개를 위로 들어 침대 속 엄마를 바라보며 울 듯이 말했다,
“Mommy I wet my bed. (엄마 이불에 오줌 쌌어요.)”
엄마는 나를 안심시키려 미소를 지으며 집게손가락을 입 앞에 갖다 대고 “shhh," 조용히 하라고 신호 했다. 엄마가 고개를 들자, 엄마 옆에서 잠들어 있는 아키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어깨는 얼굴처럼 까무잡잡 했고, 팔 밑에는 새까만 겨드랑이 털이 한 뭉치가 보였다. 나는 그때 남자 어른의 겨드랑이를 처음 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황의 어려움을 피하려고 공상하며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닦아온 방어기제였다. 뇌과학자들이 분석한 투쟁, 도피, 경직 (fight, flight, freeze) 반응은 위험 상황에서 생존 확률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작용하는 원시적 방어 시스템이라고 한다. 무의식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맞서 싸우거나, 피하려고 하거나, 그 자리에서 얼어버리는데, 나는 그중 '도피'의 여왕이다. 엄마의 침대 속 이방인을 발견한 그 순간도 나는 아마 현실에서 도피했던 것 같다. 앞뒤 일들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침대 속 나체 사건 외에는 아키에 대한 기억이 많진 않지만, 그를 싫어했던 것은 확실하다. 일본인이라는 것도 왜인지 싫었고, 그가 타고 다니는 투도어 스포츠 차의 문짝이 보통 자동차와 달리 45도 위로 열린다는 점도 싫었다. 마치 도약하려는 메뚜기의 모습처럼 요상했다. 엄마의 친구들은 보통 나의 응석을 들어주는 편이었는데 아키는 나에게 안 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던 점도 싫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의 유일한 애착 관계였던 엄마를 잘 모르는 사람이 가로챈다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싫었던 것은 약과, 공포스러웠던 것 같다.
여섯 살 때,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미국에서 보낸 마지막 여름, 우리는 미주리주의 대형 식물원인 파월 정원에서 열리는 나비 축제에 갔었다. 온종일 나비를 보고, 나비 페이스 페인트를 받고, 나비 모양 헬륨 풍선을 사들고 나오는 길, 주차장에서 풍선 끈을 놓쳐 집에 오는 길 내내 차 안이 떠나가라 울었던 적이 있다. 그날도 아키가 있었다. 내가 악을 쓰며 우는 것이 웃겼는지, 조수석에서 나를 비디오카메라로 담은 모습도 테이프로 남아 있다. 그 영상 속 내 얼굴은 눈물·콧물에 나비 페이스 페인트가 줄줄 흘러내려 분홍색, 보라색 얼룩이 져 있다. 그 비디오테이프에는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가지만, 아키와 엄마의 영상도 있다. 아키가 엄마 뒤에 서서 엄마의 허리를 감싸고, 엄마는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 편하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다. 거기서 본 엄마의 표정은, 내가 자라면서 보고 기억하는 모습 속에는 없는 표정이었다. 내가 딸로서 절대 터치할 수 없는, 여자 김희진의 로맨스와 안전함과 평안함, 그것이 그 영상 속에 남겨져 있었다. 그때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다. 어쩌면 너무 당연했다. 엄마에게는 아키의 유머러스하고 권위적이고 남성스러움이 잠시 기댈 수 있었던 곳이 아닐까? 비극으로 불타버린 결혼생활 속 잃어버린 여성성에 샘터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지금의 내가 아키같은 남성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엄마와 나의 연애가 평행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스무 살, 나의 첫 연애 상대는 이삭이였다. 뉴욕대에 다니던 그를 대학교 2학년 추수감사절 방학 때에 처음 만났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대학교에 다니던 나는, 방학을 맞아 뉴욕에 있는 친구네 거실에서 지내고 있었다. 내 친구의 친구였던 이삭이는 스무 살 답지 않은 의젓함과 확고함이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아이치고 한국 문화와 언어에 유창했으며, 경제를 공부하고 월가에서 경력을 쌓을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확신도 가득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대담하게 관심을 표현했다. 다 같이 모여 추수감사절 저녁 만찬을 준비할 때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나의 음식 솜씨를 칭찬하였다. 한국에서 보낸 겨울방학 때는 나를 삼청동으로 불러내 팥죽을 사줬다. 지나가다 들른 갤러리에서 우연히 엄마의 후배를 만났을 때, 마치 자신의 친척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깍듯하게 인사했다. 우리는 뉴욕과 볼티모어 사이를 주말마다 오가며 연애를 시작했다.
나와 처음 잤을 때 이삭은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십대 때 나에게 큰 의미 없는 남자에게 이미 동정을 잃은 뒤였지만, 자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동정을 아껴 놨다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도 나처럼 십대 때 동정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정은 나에게 중요한 기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삭은 옳고 그름이 확실한 아이였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옳은 쪽에 있어야만 하는. 한 번은 뉴욕의 멋진 일식당에서 외식하고 있었다. 꿈의 월가에서 여름 인턴을 하던 중이었던 이삭이는 식사 내내 핸드폰 알람 소리에 반응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는 가볍게 웃고 지나가자고, 나 좀 보라고 두 젓가락을 콧구멍에 넣으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삭이는 정색하며, 이렇게 고급 레스토랑에서 무례한 행동을 했다고 야단쳤다.
그래도 나는 그가 좋았다. 특히 발가벗고 그의 품 안에 안겨 내 관자놀이를 그의 가슴팍에 대고 있으면 안에서부터 밀물처럼 꽉 차오르는 만족감이 좋았다. 그의 품에 안겨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나의 얼굴에는 엄마가 아키의 품에 안겨 지었던 미소가 있었다. 이삭도 아키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에 특유의 유머로 사람들을 매료시킬 줄 알았다. 그렇게 엄마와 내 연애의 평행을 보았다. 이삭과 나의 관계는 엄마와 아키의 관계처럼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의 통제력과 단호함은 나에게 안전히 기댈 수 있는 곳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억눌렀다. 우리는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술에 취해 자신의 분을 식히지 못하고 욕을 쏟아내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헤어짐을 결심했다.
그 후로 나는 몇 번을 더 연애했다. 아버지의 부재가 남긴 큰 결핍의 구멍을 이 남자 저 남자로 채워보고자 애썼다. 다만 나는 늘 결정적 순간에 관계에서 달아나는 습관이 있었다. 아키를 엄마 침대 속에서 발견한 아침 공상 속으로 회피했듯,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그 줄을 잘라버리려고 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내하기보다는 상황을 달아남으로써 문제를 외면하려 했다. 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연애는 날 오랫동안 닻처럼 나아가지 못하게 묶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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