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종지만도 못한 마음
요새 소설 쓰는 것 때문에 불교 철학 서적을 가까이에 두고 있다. 어려운 말은 다 흘려보내고, 쉬운 얘기만 취하다 보니 어느 틈에 벌써 세 권이나 읽었다. 그중 내게 남은 것이 얼마일까?
어느 선사는 말한다. 한밤중 길을 가는데 눈 앞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다면 당연히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다시 보니, 그것이 꼬아진 새끼줄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두려움은 어디로 가겠는가? 그것이 뱀이 아니라는 사실에 두려움은 곧장 사라지고 그 자리는 안도감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러니 뱀을 보고 느낀 두려움은 애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세상사 무소용이다.
모든 것은 무無고, 공空이다. 형상에 구애받지 말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불교 서적 서너 권으로 모든 불법과 도를 깨달을 순 없다. 그러나 마음에 들어와 맺히는 상은 있다. 망막에 비친 상이 아니므로 볼 수는 없지만 마음께에 자그맣게 더듬어지는 것이 있기는 하다. 그게 아상(我相)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무언가 깨달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깨달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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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한 벌을 샀다. 청자잔과 찻잎 거르는 망, 그리고 뚜껑이 세트로 온다. 찻뚜껑은 종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커서, 거름망을 받쳐 두거나 차와 함께 즐길 다과를 놓아도 좋다. 보기에 예쁘고 실용적이라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딱 하나, 찻종지에 뾰족 솟은 티끌만 제외하면.
푸른 빛 도는 찻잔이 생겨 기쁜 마음이 그 작디 작은 티끌 하나에 부풀어 오르다 만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제법 날카로워서 의식하지 않으면 언제든 다칠 일이 생길 거라는 불안이 생긴다. 뱀과 새끼줄 이야기를 떠올리며, 찻잔을 오래 사용하다 보면 날카로운 부분이 닳고 닳아서 언젠가는 없어질 테니 지금 내가 느끼는 불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슬쩍 우겨보아도 불만이 가시질 않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내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 불안이 아니라 불만이었다는 것을.
지난 겨울, 그리고 연이어 봄에도 하자가 있는 물건을 받아 돌려보낸 적이 있다. 나는 다이어리들을 사모으는 것을 좋아한다. 기록을 많이 하고, 소설도 전부 손으로 구상하기 때문이다. 각양각색의 다이어리에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담겼다가 소설로 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여 합을 이루어 나가는 게 좋다.

그러나 소비는 또 다른 이야기다. 하나를 가지면 새로운 것이 갖고 싶고, 새로운 것을 사면 또 다른 모양에 이끌린다. 그렇게 사용처나 목적이 없이 사들인 다이어리는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차곡차곡 쌓인다. 덮어 놓고 사다가, 올해 초 연달아 문제가 생겼다.
가죽에 스크래치가 있고, 얼룩이 지고, 곰팡내가 나는 하자품을 받고 반품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객관적인 하자라 구매처의 이의 제기는 없었다. 문제는 소소하게 즐기던 소비의 기쁨이 불쾌감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당장에야 쓸모가 없어도 그대로 놔두면 언제든, 무엇이든 쓰게 되므로 다이어리들이 많아지는 것에 특별한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하자품을 받는 다는 것은 기분이 달랐다. 제값을 줬으면 제값하는 물건을 보내주어야 이치 아닌가? 나는 월급쟁이로 8년을 살면서 돈 받은 만큼은 하고 살았는데—더 하지는 않아도—나에게는 당연한 그 직업의식이 남에게는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속이 상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기분 따라 사서 쟁이는 소비습관은 여전했다. 제값하는 브랜드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그때의 불쾌감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여름의 길목에 또다시 마주한 것이다. 나를 괴롭혔던 그 하자들과 말이다.
어여쁜 도자기잔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뿔
어여쁜 도자기잔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뿔. 그것은 못 본 체 하려다가도 줄곧 따끔하게 내 신경을 건드리는 통에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문의 결과, 도자기 제품의 특성상 그럴 수 있으니 양해를 바란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내가 생각하는 도자기 제품의 특성이란 매끄럽고 단단한 것인데?
나는 제품의 특성이라는 이유로 도자기의 돌기마저 감안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냥 쓰라니 쓰긴 하겠지만 매번 차를 마실 때마다 돌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게 될 테니 아쉽지만 이 공방에서 재구매하는 일은 없겠다고 했다.
한참 뒤에 답변이 돌아왔다. 뚜껑만 하나 다시 보내줄테니, 기존의 것은 그냥 선물로 여겨 달라고. 그러면서 없는 재고들을 긁어 모아 사진을 찍어 보내온다. 숨구멍이나 가마자국, 유약이 덜 발려 미색 면이 노출된 부분까지 가감없이 드러내며.
나는 그것이 진심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표면이 매끄럽기만 하다면 아무거나 괜찮다고 했고, 지금 찻뚜껑은 배송되어 오고 있는 중이다. 돌기는 사포로 갈아내고 종지처럼 쓰면 된다고 하셔서 손톱 가는 파일(당연히 새것)로 살살 문질러보니, 뾰족한 면이 둥글어졌다. 갈아낸 만큼 청자에 흰 점토가 드러나 더욱 두드러져 보이지만,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으니 괜찮다.
이제는 찻뚜껑이 아니라 찻종지로 용도가 바뀐 것을 들여다 보면서 생각한다. 결국 내가 갈아 낸 것은 남의 티끌이 아니라 내 욕심이었다는 것을.
조그만 돌기에 집착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형상에 얽매인 것이다. 어떤 잔이든 안에 담긴 차는 바뀌지 않는다. 부분이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어떤 책에서는 남을 부처 대하듯 하라고 했다.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아도, 내가 부처로 대하면 그 사람은 부처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다. 모든 것은 나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찻종지만도 못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나 역시 타인 덕분에 부처가 되어 볼 기회를 얻는다. 도자기 공방의 사장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골라 보내주는 마음은 남을 부처 대하듯 하라는 선지식의 말씀을 실천하는 불자의 마음과도 같다. 실상이야 그렇든 말든 내 마음에 맺힌 상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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