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저장

일기 모음

(25.12.28~26.02.23)

2026.04.28 |

일기 모음


25.12.28 소설

그 아이가 돌아왔을 때 집은 이미 엉망이었다. 별 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아이가 온다는 사실 만으로도 멀쩡한 가정이 무너졌다. 싸우지 않기 위해 싸우고, 당하지 않기 위해 먼저 상처를 내는, 그 누구에게도 평화롭지 않았던 전쟁의 시대가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시기가 다시 찾아온다는 데에 겁을 먹고 도망쳤다. 한 사람을 계도하기 위해 가족 모두가 그 이상이 되어야 했다. 그건 누군가에겐 정상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해도, 다른 누군가에겐 비정상이 되는 길이었다.

 

25.12.30 일기

12월 한 달은 거의 매일 캐롤을 듣는다. 그게 아니라면 크리스마스와 연관된 헐리우드 영화를 본다. 특히 90년대 미국 영화를 즐겨 보는데, 화려하고 풍요롭고 낭만적인 대국의 호황기를 추억할 수 있어서 좋다.

화면 속에서 그들은 라디오를 듣고 모두 모여 저녁을 먹고, 지금은 구식이 된 포드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 디지털이 발을 디딜 틈이 없는 낭만의 시대—아날로그가 아직은 좋은 나는 과거의 영상에서 추억을 발견하고, 그것을 내 생활 양식으로 삼는다. 이렇게 전통은 어디에서나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25.12.31 소설 <10초>

이제 단 10초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기존 인류들은 그 생명을 다했고, 신인류가 기존의 자리들을 대체할 것이다.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인연을 찾아 떠났다. 누군가는 불같은 사랑을, 또다른 누군가는 (마음의) 빚진 사람을 찾아, 마무리 되지 않은 무언가의 매듭을 지으러 밖으로 향했다. 

 

26.01.05 영화감상

<얼굴>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소설을 쓰다보면, 퍼즐의 한 피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것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영화’로부터 힌트를 얻는 편이다.

줄거리 대로 줄줄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지루하다. 그렇다고 재미있는 부분만 뚝뚝 잘라 끊어내면 그 파격을 이해하는 사람은 나뿐일 거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영화에서의 ‘연출’이다. 영화를 보면 대사와 전환과 전개를 배울 수 있다. 부디 오늘의 감상에서도 필요한 퍼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26.01.06 일기

그 많은 유모차들은 어디로 가는가?

산책을 하다보면 한 번은 마주치는 풍경이 있다. 어린 아이의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부모, 아니면 텅 빈 유모차를 지탱해 걸어다니는 노인의 모습말이다.

시간을 역행할 수는 없으니, 나의 미래에 가까운 것은 유모차를 미는 노인일 것이다. 그 마저도 없는 노인들은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할 테니 나의 미래는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고독히 산책을 즐기는 모습, 혹은 방안에 틀어박힌 모습 둘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아이들은 두발로 서기 위해 유모차를 거쳐가지만, 노인들은 두발로 서지 못해 유모차에 의지한다. 우리의 미래가 그 바퀴위에 얹혀 있다.

 

26.01.07 일기

오늘은 엄마가 키우던 식물들을 버렸다. 딱히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베란다를 치우다가 정리하자는 말이 나와서 그렇게 됐다. 예전에는 내가 열심히 모았던 인형들을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 떠나보낸 적도 있다.

이렇듯 우리 인생의 연속된 시간 속에서 사건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데 모든 일엔 이유가 없다.

매년 연말연시에는 기분이 들뜨곤 한다. 뭔가 새로운 일, 특별한 일이 우리를 특별한 누군가로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12월 31일도 1월 1일도 인생의 긴 연대기 중 하나의 날일 뿐이다. 그저 이유없이 화분이나 오래된 인형들을 처분하고 싶어지는 그런—.

 

26.01.24 일기

이건 사건이다. 전에 아빠가 베란다에 있는 엄마 화분을 모두 치웠는데, 그 중에 내 사랑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당연히 죽은 화분들만 버린 줄 알았는데, 펄펄 살아 날뛰는 내 사랑무까지 버렸을 줄이야—내가 ‘사건’이라고까지 표현한 이유는 그 화분이 23년도, 내 공모전 수상 기념으로 들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울컥한다. 내가 또 언제 공모전에 입상을 할 수 있을까. 아빠는 또 수상하면 하나 사준다고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다음이 어딨냐고 쏘아붙였다. 진짜 내가 또 언제 공모전에서 상을 타겠냐고…. 너무 슬프다.

 

26.01.26 일기

<염과 습>

소설을 쓰기 위하여 염하는 과정을 찾아보게 됐다. 교육적 목적으로 한 노인의 염습 전과정을 촬영한 영상도 있었는데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사후강직이 오기 전, 그러니까 사망진단을 받은 직후 장례지도사들은 굳은 시신을 반듯하게 펴는 ‘수시’작업을 하게 된다. 뼈를 맞추고 살을 닦는 과정이다. 푹꺼진 볼에 솜을 넣고,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봉하고, 채 나오지 않은 배설물을 정리하는 모든 절차가 장례지도사의 사명을 띠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었다. 숭고하다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고인의 가족도 아닌데, 살아있었다면 부끄러움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치부까지 들여다보고—가족일지라도 할 수 없는 일까지 묵묵히 해내는 모습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사람이 태어나 아주 사소한 일로 감정 놀음을 할 때도 있고, 그런 감정 따위는 가져다 댈 수도 없는 원대한 포부를 품기도 하는데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똑같이 한 줌 재로 돌아간다.

사랑도 명예도 돈도 다 채워줄 수 없는 무상한 시간이 무한대로 이어진다. 내 소설 속 주인공에겐 어떤 마지막을 선물해 줘야할지 고민이 되는 밤이다. 슬픔 이상의 감정으로 압도된다.

 

26.02.05 일기

여름이면 보사노바가 땡긴다. 종로로 가는 버스였던가, 아니면 명동으로 가는 버스였던가. 암튼 버스 안에서 ‘girl from ipanema’가 흘러 나왔고 노래가 끝날 무렵 라디오 진행자가 말해주는 곡명을 외워두었다가 무한 반복하며 들었던 기억이 있다.

보사노바는 해변위에 떨어지는 무수한 별빛처럼 반짝거리고 환상적이고 금방 사라져 버린다. 보사노바를 들을 때면 손아귀에 쥔 따끈한 모래가 사르르 빠져나가는 듯한 간지러움을 느낀다.

 

26.02.10 일기

모든 생명에는 성숙기와 쇠퇴기가 있다. 꽃을 피웠으면 꽃이 진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나이들어간다는 것은 경험과 지식의 축적으로 인해 벌어들이는 소득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그런 장점 외에도 ‘노화’라는 불가항력적 단점이 있다.

쌓여가는 것들과는 반대로 젊음을 잃어간다는 것은 나름대로 공정거래라고 할 수 있다. 청춘대신 얻은 ‘부’로 노화를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가치임을 반증하기에 청춘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주간 수집 수요산문집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 2026 주간 수집 수요산문집

취향을 수집합니다.

메일리 로고

도움말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2-31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