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견문록

스카이 라군

연기가 모락모락, 첫 온천

2025.12.02 | 조회 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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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김토성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낫기 위해서인가, 숨기 위해서인가. 그 중간 어딘가에서.

아이슬란드에서 도로를 따라서 운전하다 보면 가끔 저 멀리 흰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보인다. 그 연기의 시작엔 보통 온천이 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의 시작에도 온천이 있었다.

 

활화산이 수십 개이고 강과 호수, 빙하도 많아 물도 풍부한 편이라 조금 과하게 얘기하면 땅 파면 온수가 콸콸 올라오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을에는 온천과 온수 수영장이 하나씩은 있다. 덕분에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던 10일 중 6일은 온천을 할 수 있었다.

함께 여행한 모두가 온천을 워낙 좋아해서 다른 건 몰라도 우리가 묵는 마을에 온천이 있다면 웬만하면 다 가봤고, 일부러 거길 가려고 그 마을에 가기도 했다. 차고 넘치게 했다고 당시에는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한 번 더 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너무나 좋았다, 아이슬란드의 온천들.

 

여행을 시작한 건 11월 4일.

그리 춥지 않은, 조금 떨어져서 겨울 앞에 서있는 듯한 그런 날씨.

원래는 숙소에 짐을 풀고 마트에서 장도 보고 저녁에 첫 온천을 가려고 했다. 하지만 19시간을 날아오니 숙소고 뭐고 일단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고, 일정을 변경해서 바로 온천으로 가기로 했다.

 

아이슬란드에서 간 첫 번째 온천은 Sky Lagoon.

레이캬비크 남쪽 항구 해안가에 있는데 바다와 맞닿아 있는 온천이다. 아이슬란드에서 방문한 대부분의 온천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 온천이 있는 게 맞나?’ 싶은 곳에 갑자기 온천 건물이 등장했다. 입구가 특이했는데 역설적이긴 하지만 '커다란 호빗'의 집 같았다. Sky Lagoon이라고 쓰인 모노리스처럼 생긴 검은 돌을 지나면 입구가 있었다. 비싼 곳이라 그런지 입구도 멋있다고 생각하며 들어갔던 것 같다.

 

샤워실에서 물을 틀자 레이캬비크 특유의 유황 냄새가 나는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8년 전 아이슬란드에 처음 왔던 게 떠오르면서 내가 여기 다시 왔다는 게 이제야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난 유황이 섞인 아이슬란드의 뜨거운 물 냄새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웠던 대상과 만나는, 그런데 너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라 혼자 감상에 젖어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문을 열면 바로 탁 트인 곳이 아니라 동굴 안 같은 곳이 나온다. 오른편으로 밖으로 가는 통로가 있고 그곳을 따라가면 바로 온천으로 들어간다. 곧 천장이 사라지고 탁 트인 하늘이 보인다. 이때부터 감격과 행복에 몸부림치며 ‘와 진짜 좋다, 정말 너무 좋다’ 이런 말을 무의식적으로 내뱉게 되는데, 나도 한참을 그렇게 좋아무새처럼 좋아좋아거리면서 돌아다녔다.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온도의 물에 온몸을 담근 채 앞으로 걸어가면 넓게 펼쳐진 바다가 보인다. 이 쪽 바다는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만이라 파도가 없어 수면이 잔잔하다. 하늘도 맑고 구름은 잠잠해서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는 것 같아 보인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커다란 온천 주변으로 아이슬란드의 풍경을 닮은 암석과 이끼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마치 아이슬란드의 요정들이 목욕하는 곳에 몰래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정말 자연속에서 온천욕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곳 온천은 자연속에 잘 다듬어 만들어진 온천(일본의 노천온천 같은 느낌)이 아니라 그냥 트래킹하다가 '어 여기 온천이 있네? 들어가볼까?'에 가깝다. 그리고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바다와 접해 있는데도 바다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공기 속에서 바다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없다. 그래서 처음에 순간적으로 호수라고 착각했었다.

 

현실감 떨어지는 풍경 속에 담긴 것도 모자라서 지친 몸을 따뜻한 온천에 담그고 바다를 보고 하늘을 보고 바위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음료를 파는 바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격한 행복감이 두피를 지나 머리카락 끝까지 팽팽하게 차올랐다. 그만큼 좋았다. 19시간을 날아왔지만 이것만 하고 다시 돌아가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스카이 라군엔 시그니처 프로그램이라고, 온천 말고도 냉탕(콜드 플런지) → 사우나 → 냉안개 샤워 → 바디 스크럽 → 스팀룸 순서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다. 난 사우나가 참 좋았는데, 바다가 한눈에 다 보이는 통창으로 된 큰 사우나였다. 아주 조용한 공간이라 가열된 돌이 가끔씩 탁탁 튀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우나에서 창밖으로 바다를 보는 게 너무나 좋았다. 뜨거운 공기와 나무 냄새 덕분에 나의 의식이 물리적인 몸을 또렷하게 감각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평소에 내 몸을 섬세하게 감각할 일이 별로 없다보니 묘하게 차분해지면서 기분이 좋았다. 그 안에서 가만히 창밖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보면 방송이 없는 채널을 튼 TV처럼 항상 잡음이 가득하던 머릿속이 또렷해지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한 순간이 찾아온다. 따뜻하고 평온하고 안정적이고 잔잔하고 풍성한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사우나는 뜨거운 골방이라고 느낄 만큼 정말 좋은 곳이었다.

 

이날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마트가 더 늦게까지 열었다면 아마 더 있었을 거다. 그리고 떠나는 날 비행기 시간이 늦었다면 한 번 더 왔을 테고.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기분 좋은 공간이 얼마나 있을까. 온천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걸 차치하고도 충분히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꼭 한 번씩 가보면 좋겠다.

 

구독자님이 레이캬비크에 가신다면 스카이 라군은 꼭 가보셨으면 좋겠어요. 사우나도 꼭 여러 번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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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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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사커피의 프로필 이미지

    회사커피

    1
    4 days 전

    유독 추운 오늘 아침에 이 글을 읽으니 그 온천에 너무 가보고 싶네요.🫠

    ㄴ 답글
  • 옐의 프로필 이미지

    1
    3 days 전

    읽는내내 웃음이 지어지는 글이었습니당!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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