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형이 목욕 바구니 쓰게 해줬잖아.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덕분에 나중에는 전부 목욕 바구니 쓰게 되고.'
맞아 그랬었지. 그 더러운 세면 백 꼴도 보기 싫었으니까.
군인이었을 때, 내가 속했던 부대에서는 시덥지 않은 차별이 있었다. 이등병은 담배를 끌 때 털어 끌 수 없으며, 일병이 되어야 세탁기를 누군가의 허락 없이 '스스로' 쓸 수 있으며(손세탁 하란 소리다), 다이소에서 파는 구멍 송송 뚤린 플라스틱 목욕 바구니는 상병이 되어야만 쓸 수 있었다. 이것들 말고도 더 많았지만 대충 생각이 나는 것들은 이정도다. 이 중에 내가 제일 싫어했던 차별이 목욕 바구니였다.
입대 후 1년이 지나 상병을 달기 전 까지는 처음 군대에서 보급 받은 작고 통풍 구멍 하나 없는 세면 백을 써야 했다. 어쩌다 여행가서 한두 번 쓰는 거라면 모를까 매일 그 안에 샴푸부터 샤워 타월까지 넣고 다녀야 하니 잘 관리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피거나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하지만 한창 불려다니고 일할게 많은 이등병, 일병이 잘 관리할 시간이 있을리가 없다. 더럽고 냄새나고 찜찜했지만 어쩔 수 없이 써야했다. PX가서 플라스틱 바구니 그거 사서 쓰면 되는데 상병이 아니니까 쓸 수가 없었다.
운이 좋게도 1년간 신병이 들어오지 않았던 분대에 배정이 되었고 남들은 전역 할 쯤에나 달던 분대장을 난 1년만에 달았다(내가 워낙 빨리 달았던 편이라 다른 분대의 분대장은 모두 나보다 선임들이었다). 분대장이 되자마자 내가 했던 일은 상병이 아니라서 '더러운 세면 백'을 들고 다녀야만 했던 분대 후임들에게 모두 플라스틱 목욕 바구니를 사주고 앞으로는 샤워할 때 목욕 바구니를 들고 다니라고 했던 일이었다. 누가 넌 왜 상병도 아닌데 이걸 들고 다니냐고 뭐라고 하면 분대장이 들고 다니라고 사줬다고 하라고 했다.
목욕 바구니 사준 날, 타분대 분대장 몇명이 샤워실에서 내 분대원들이 목욕 바구니를 들고 다니는걸 보고 기함을 토하며 너가 뭔가 이런 짓을 하냐며 뭐라고 했다(욕을 했다). 아니 내 분대 애들 내가 쓰게 해준다는데 너가 왜 그러냐. 분대 내에선 알아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리고 솔직히 저 세면 백 너무 더럽지 않냐. 뭐 이런식으로 얘기하고 돌려보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주 지나서 보는 눈이 있어서 그랬던지 다른 분대도 하나 둘 모두 목욕 바구니를 허용했다. 그렇게 모두 목욕 바구니를 쓰게 되었다.
얼마전 군대 후임들과 만나 술 마시다가 이 목욕 바구니 이야기가 나왔다. 덕분에 그 때 목욕 바구니 쓰게 되어서 너무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오래 전 치적을 칭찬받는 은퇴한 정치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5년 전에 내가 했던 일로 칭찬을 듣는게 흔한 일은 아니다보니 나 좀 괜찮은 사람인가 하는 어깨 으슥하는 기분도 들었고.
나는 왜 그랬을까.
제일 큰 이유는 그 세면 백이 싫었다.
냄새나고 위생적이지 않은 세면 백을 들고 다니기 싫었다. 저 플라스틱 바구니가 뭐라고, 군대가 아니었다면 고민도 없이 쉽게 살 수 있는데 살 수 없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사지 못하는 이유도 단순히 상병이 아니라서라니 어처구니 없었다.
두 번째, 씻는건 중요하니까.
여러 명이 모여있는 공간이니 잘 씻고 뭐라도 잘 바르던지 뿌리던지 관리를 잘 해야한다. 내가 분대장으로 있는 분대에서 냄새나는건 용납할 수 없었다. 냄새 프리를 위해서 제일 중요한건 깨끗하게 잘 씻어야 하는 일인데 샴푸 하나 넣으면 꽉 차는 썩어가는 작은 세면 백으로는 제대로 씻기 힘들다. 여러가지 샤워 아이템을 들고 다니려면 플라스틱 목욕 바구니가 필요하다. 그리고 세면 백 핑계대며 잘 안씻고 세탁기 못 쓴다고 빨래 잘 안해서 냄새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핑계대지 않고 씻게 하려면 목욕 바구니가 꼭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당한 걸 다음 사람들이 당하지 않았으면 했다.
세상에 당연한건 없고 바뀌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나쁜 일은 되풀이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20대 초반, 염세적이고 매사에 삐딱하고 날카롭던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니 기특하기도 하지만 삐딱하니 세상에 대립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랬던걸까 싶기도 하다. 온실 속 화초처럼 큰 주제에 발걸음은 진취적이고 혁명적이라고 생각하던 때였으니까.
어느 정도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다.
선임 보다 내 동기들이 더 많아지던 시기였고 입대 후 1년이 넘어가 슬슬 실세로 활약하는 시점이었다. 선임이 뭐라고 해도 이제 개겨볼만 했고 분대장이 자기 분대원 관리를 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이걸 쓰고 있는 지금에 느끼는 거지만 플라스틱 목욕 바구니 그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비장했나 싶다.
목욕 바구니 해방은 그 일이 일어난 곳이 군대라는 작은 사회였고 2년짜리 트루먼 쇼라서 여기에서 한 행동은 여기에서만 적용된다는걸 알고 있었으니까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을지 모른다. 365일 같이 지내며 생긴 끈끈한 애정 덕분에 내 식구들이 힘들어하는게 싫었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생활을 같이 즐겁게 해쳐나가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하나 둘 합쳐져서 했던 행동 같기도 하다.
지금이라면 해방자 역할을 자처할 수 있을까? 난 그 때 보다 겁도 많고 용기도 없다. 분명 고민을 엄청 할거다. 하지만 내가 그런 선택을 해야하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 스스로 떳떳한 선택을 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훌륭한 사람이나 대단한 사람은 못 되어도 내가 한 선택이나 하지 않은 선택에 비겁한 변경을 덧붙이기는 싫다. 매 순간 내가 하는 선택에 후회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만약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으려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나는 모든 순간의 부분 합이다. 매순간의 선택과 그 선택의 결과가 촘촘하게 쌓여서 만들어지는게 나다. 잘 쌓아 나가다 보면 언젠가 대단한 결정의 순간에 후회 없는 선택을 하지 않을까. 아니다, 후회 없는 선택까진 바라지 않지 후회가 덜 한 선택을 하게 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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