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31

여름 - 4

2025.09.19 | 조회 1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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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김토성의 프로필 이미지

명랑한 은둔자. 김토성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낫기 위해서인가, 숨기 위해서인가. 그 중간 어딘가에서.

며칠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을 연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했던 여름이 멀어지는 게 느껴진다. 어디쯤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볼 수 없을 만큼 먼 곳에서부터 우리 집 창가까지 흘러든 가을의 냄새가 희미하게 난다.

 

한창이던 여름의 어느 날에

힘듦을 토로하며 투정을 부리고 스스로 위로하고자 시작했던,

매일 한 편씩 한 달간 쓰겠다며 써내려가던 글이 뚝 멎었다.

 

메말라 가던 강릉의 소식을 들으며 내 마음을 떠올렸다.

강릉에도 곧 비가 올 거야. 텅 빈 저수지가 다시금 차오를 거고 사람들의 수돗가엔 다시 투명하고 반짝이는 물이 흐를 거야.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건조해서 바스라진 감정의 부스러기만 나부끼는 내 마음도 다시 차오르고 촉촉해질 거라고.

 

언제부터인가 내가 가사가 잘 들리는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평소에 음악을 배경음처럼 듣는 걸 좋아해서 그때의 분위기에 맞는 플레이리스트를 걸어 두고 그냥 생각 없이 듣곤 했는데, 얼마 전에야 내가 가사가 잘 들리고 귀에 꽂히는 음악을 주로 듣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랬을까.

아마 누군가가 나에게 말해 주는 걸 듣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아팠다든지, 괜찮다 힘내라든지, 아니면 그냥 세상은 다 네모의 꿈일 뿐이라든지. 길에서, 사무실에서, 버스 안에서 잠깐이나마 세상과 나를 분리하고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게 아닐까. 노래 자체에서, 그 어떤 시절의 노래에서, 노래 가사를 통해.

 

꺾이긴 해도 무너지지 않으려 나름 혼자 애썼구나 싶었다.

나도 모르는 또 다른 나는,

날 토닥이고 위로하며 같이 걸어왔나 보다.

난 가슴이 말라 버려서 글도 쓰지 못했는데.

 

덕분에 기운이 났는지 어제부터 뛰기 시작했다.

아침에 갈 곳이 없어진 난 일찍 일어나 석촌호수로 간다.

 

오랜만에 뛰는 거라 너무 힘들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발은 잘 따라오고 숨도 차지 않았다. 간만에 느끼는 뜀의 감각이 기분 좋게 몸 전체를 울려서 기분이 좋았다.

 

발로 힘껏 땅을 밀쳐 내고, 박자에 맞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앞뒤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팔과 적당히 힘이 들어간 허벅지 근육의 긴장감. 그리고 목 끝을 스쳐 지나가는 아침 바람. 잊고 있던 여러 감각이 차곡차곡 맞춰지니 조금씩 템포가 빨라지고 밀어내는 발에 힘이 들어간다.

수영할 때 가끔 ‘물을 탄다’고 표현할 때가 있다. 물을 탈 때면 내 몸의 움직임과 물살이 아주 잘 맞아서 딱 맞는 박자에 춤을 추듯 매끄럽게 물을 가르며 나아간다. 오늘은 잠깐이었지만 간만에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맑게 뚫린 하늘 아래서 앞만 보고 뛰면 되는 그 순간이 즐거웠다.

돌아보지 않아도 되니까.

지나간 걸 생각할 필요도 없고 스쳐가면 그만이니까.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해서 뛰면 되니까.

그저 시간의 흐름 속을 자연스럽게 가르고 지나는 순간이 평온했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무얼 하든 각자의 길 끝에선 모두 멈춰 선다. 끝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현재의 감각이 살아나고 매 순간이 애틋해진다.

그래서 끝이 있는 달리기가 좋은가 보다.

 

여름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남은 여름 글도 끝맺어야겠다.

끝이 없는 건 너무 아쉬우니까.

여름이 끝날때까지 잘 부탁합니다 구독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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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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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냐옹이의 프로필 이미지

    냐옹이

    0
    3 months 전

    꺾여도 무너지지 않은 마음에 응원의 마음을 담아 박수를

    ㄴ 답글 (1)
  • 회사커피의 프로필 이미지

    회사커피

    0
    3 months 전

    뚫린 하늘처럼 가슴이 좀 뚫리길..! 하지만 다치지 않게 뛰기!

    ㄴ 답글 (1)
© 2025 명랑한 은둔자. 김토성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낫기 위해서인가, 숨기 위해서인가. 그 중간 어딘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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