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2.3 내란 사태에 온 세계의 관심이 뜨겁다. 이웃 일본에서는 한국의 방송들과 생중계 경쟁도 벌인다. 마침 일본에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온갖 질문 공세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질문 공세를 벗어나기 위해 이번 사태를 보면서 인상 깊게 느낀 것이 무어냐고 되물어보았다. 대답은 電라이트이다. 펜라이트라고도 불리는데 우리말로 하면 응원봉이다. 일본에서도 선풍을 일으킨 뉴진스의 K-POP 동경 공연에 등장한 응원봉이 생중계 된 계엄반대 집회에 보이더라는 것이다. 세상에 그렇구나.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생중계된 계엄
우리 헌정사상 18번째에 해당하는 계엄은 과거의 것에 비하여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지면 관계상 두 가지만 꼽아보자. 첫 번째는 전체상이 보였다는 것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모든 것이 보인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인 흐름이 보였다. 그것도 방송사의 생중계로. 개개인의 유튜브 중계로. 국회의원의 헬기가 국회의사당 운동장에 착륙하고 있구나, 서강대교를 건너 장갑차가 들어오고 있구나. 시민들이 국회의사당 담장 밖에서 저항하고 있구나, 국회 안에서 보좌관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구나, 등등.
1980년 5.18 비상계엄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5.18의 전체상은 지금도 미완성이다. 외신기자를 통하여 뒤늦게 대학가에 전해진 모습은 일부였지만 충격적이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도 유명한 위르겐 힌츠페터(Juergen Hinzpeter)는 독일 제1공영방송(ARD)의 북독일 특파원으로 외국인 전용 호텔 택시 기사 김사복과 함께 광주에 들어왔다. 한국 언론들도 취재를 했지만 검열의 문턱을 통과하기 어려웠고 그런 탓인지 외신기자들은 한국기자들에 비해 환대를 받았다. 한강의 소설 「소년」에 나오는 소년과 동갑내기였던 내 눈에도 그랬다. 5.18 민주광장에서 열렸던 어느 날인가의 집회에서는 외신기자가 격려차 준 것이라라며 담배가 소개되고 광장의 모두는 큰 환호성을 질렀다. 전체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실의 일단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전해달라는 간절함이었을 것이다.
평화적 방법에 의한 대항
두 번째 특징은 평화적 대항문화가 정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제는 ‘아재’세대에 속하는 이들에게 집회참가는 각오와 결심이 필요했다.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이 평화로운 집회의 기회와 공간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누구는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정당사 문을 부수고 들어갔느니, 누구는 미국문화원을 점거하였다느니 하는 소식이 잊을만하면 들려왔다. 야음을 틈타 도심 한복판에서 잽싸게 구호를 외치고 죽어라 도망다니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 유인물을 살포하고 잡혀가고, 뭐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2024년 12월 3일, 어떤 사람은 국회로 모이라는 국회의원들의 생중계를 보고 급한대로 슬리퍼 신고 나왔다가 추워서 혼났다는 사람, 운동하고 집에 가다 장갑차가 지나가서 아무래도 막아야 할 것 같아서 장갑차 앞에 섰다는 사람. 외신들은 한국 사람들의 이러한 모습을 ‘반사’적 이라 묘사하고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학습의 발로 아닌가 하는 것이다. 반사적 모습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계엄 저지 후이다. 탄핵소추를 요구하는 집회가 이어지는 2주일간, K-POP 공연에 가듯 응원봉을 든 사람들이 여의도를 메우기 시작했다. 지금 세상에 계엄을 선포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여 뭔가 보여주어야 할 것 같아서 나왔고 촛불 대신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기상천외한 깃발들도 등장했다. 12월 7일 여의도 DB산업은행 앞, 인산인해로 앞으로 전진할 수 없는데, 눈 앞에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의 깃발이 보였다. 제발 정치 좀 잘해라 우리가 집에서 나와서 일어나야겠냐 뭐 그런. 해가 바뀐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월 15일 광화문 광장에 어느 젊은 여성이 홀로 깃발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깃발에는 ‘둘째 딸’이라고 쓰여 있었다.
1980년 계엄 하에서는 엄혹한 국가폭력 앞에서 대항하는 이들은 정당방위를 위해서라도 일정한 물리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2024년의 계엄 하에서는 대항문화도 극렬한 물리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 당분간 트렌드가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집회 및 시위를 규제하기 위하여 야간집회를 문화제로 한정한 집시법 개악이 오히려 각오와 결의 없이도 지나가다 보고, 보다가 참가하고, 참가하다 볼 일 있으면 집에 가는 식으로 집회참가의 문턱을 대폭 낮춘 것 같다. 평화적인 저항문화는 참가자의 저변을 확대시켰고, 확대된 저변에 기초한 저항은 사회적 영향력이 더 커지는 나비효과를 불러온 것 같다.
응원봉에도 못 쫓아가는 보수
평화적 대항문화의 정착과정에도 불구하고 백래쉬는 존재한다.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에 반대하여 법원이 습격을 당한 것이다. 누구는 1980년대의 급진 저항문화와 역버전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겉모양만 같을 뿐 양자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1980년대의 급진 저항문화는 대의와 명분이 있었다. 대의명분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물리력의 동원은 필요 최소한에 그쳤고 왜 우리는 점거했는가를 성명문에 담아 웅변하였다. 응원봉과 같은 그런 대중성은 없었지만. 그러나 2025년의 법원 습격 사건은 대의도 명분도 없는 난동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폭력적 난동 과정이 남긴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나라의 보수가 사실은 극우였다는 것이고, 가령 모든 보수가 그렇지는 않더라도 지금 보수가 극우에 이끌려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보수의 위기이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다름 아닌 극우의 반짝 등장과 보수의 급격한 퇴조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다시금 평화를 얘기하기
생각해보니 이번 계엄은 생중계로 계엄의 전체상만 보인 것이 아니다. 평화적으로 저항하는 모습도 생중계되었다. 평화로운 수단에 의한 평화를 얘기하고 198가지의 평화적 저항방법을 얘기했던 진 샤프(Gene Sharpe)의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198가지의 방법에는 다양한 카테고리가 있는데, 예를 들어 상징적 대중행동, 행렬, 물리적 개입, 심리적 개입 등 평화로운 수단으로 평화를 주장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등장하는데, 진 샤프가 살아 이 상황을 목도하였다면 199번째 방법으로 응원봉을 추가하고 상징적 대중행동에 분류하지 않았을까 싶다.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갈등 해결을 핵심으로 하는 평화권*의 저력을 국내정치에서도 다시금 확인하는 시절이다.
*평화권은 그저 소극적으로 국가권력의 간섭만을 배제하는 권리에 그치지 않고, 국가에 대해 평화주의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 무력공격에 가담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청구할 수 있는 권리, 즉 청구권적 권리로서의 성격도 동시에 갖는다. 평화권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은 제3세대 인권이 갖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출처: 이경주(2014). 평화권의 이해. 사회평론. pp. 55~56
/이경주
'씨앗'. 기후위기라는 거창한 말을 핑계삼아 요즘 도시농업에 관심이 많다. 누군가 그랬다. 농사는 자연을 텍스트로 삼는 매력적인 공부라고. 거기에는 해와달이 있고 물과 바람이 있다. 생명의 생과 멸이 있고 순환과 변이가 있다. 그리고 몸에 대한 이해와 탐구가 있고 관계에 대한 경험과 사유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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